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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



무신 1권(1화)
Chapter 1 죽음(1)


중원 통일이란 기치 아래 진시황이 천하를 하나로 아우르자 백성들은 5백여 년 동안 이어진 지긋지긋한 혼란이 끝남을 기뻐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그 강력한 진나라가 멸망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5년이었다.
이제 천하는 둘로 쪼개졌고 저 둘의 싸움이 끝나야 천하는 다시 잠잠해질 것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항우와 밑도 끝도 없이 그저 운 좋은 사내라 여겨졌던 한왕의 싸움은 예상외로 한 해가 다가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50척 나무가 쓰러져도 끝닿는 곳이 있다 했던가? 드디어 그들의 용쟁호투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이 항우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치열하게 공격하던 무리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는 듯 물러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멀리서 보아도 그의 모습은 한 시진(2시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억척스레 들고 있던 창도, 박힌 듯 굳게 딛고 있던 발도 서서히 힘이 빠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항우’라 불렀다. 불을 뿜어내듯 타오르던 항우의 눈은 어느덧 스르륵 감겨 있었고 두 발로 서 있는 것이 고작인 것처럼 보였지만 항우를 포위하고 있는 군사들 중 누구도 먼저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항우는 초나라 최고의 장수였던 항연의 유일한 핏줄로 항연이 누명을 쓰고 그 일족이 몰살당하던 환란에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손자였다. 잘해야 도망자 신세나 면했을 그가 지금 천하를 두고 한왕과 경쟁하는 최고의 장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실력이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전쟁이란 국가의 흥망이 결정되는 더 없이 중요한 사건이다.
위(魏)나라와 조(趙)나라가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을 때는 그 말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주변의 다른 나라들은 또 하나의 전(前) 세대 강대국이 사라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약관을 갓 넘어 보이는 젊은 무사의 출현으로 그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귀신이 붙었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질 정도로 그의 창은 매서웠고, 장수가 되고 난 후 그의 용병술은 제나라 시조인 태공망 여상(강태공)을 떠올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무사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 자신의 형이 남긴 유일한 혈육을 기르는 데 전념할 뿐이었다.
그의 본명은 항량. 바로 억울하게 죽어간 초나라 최고의 장수였던 항연의 아들이었다. 방랑 생활을 할 때조차 먹을 것이 생기면 조카인 항우에게 먼저 먹이곤 했던, 조카를 지독히 사랑하는 숙부였다. 항우는 그런 숙부에게 창을 배웠고 숙부가 구해 준 ‘창천지검(蒼天之劍)’이란 비급을 통해 스스로 검을 익혔다.
그러나, 불행은 일생을 관통한다 했던가? 영원할 것 같던 숙부와의 행복했던 시간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몇 해 전, 진나라와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니 질 수가 없는 전투에서 조력자의 배신으로 항량이 죽고 말았던 것이다.
숙부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정신이 혼란해지기도 했지만 항우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억울하게 죽어간 숙부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조부의 넋을 달래기 위해. 하지만, 그런 그에게 매정한 하늘은 오늘, 죽음을 선고하고 있었다.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천하에 대한 욕심이 그렇게 크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고 말 것을 왜 그리 모질게 백성을 다그치고 자신을 채찍질해 왔는지 모든 게 허무할 뿐이었다.
‘허허, 그래. 이렇게 가는 것인가.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내 나라, 내 백성은 어찌하라고.’
어찌 백성뿐이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한왕의 10만 군사들 사이로 그녀가 보였다.
10여 년 전이었던가? 자신이 묵고 있던 곳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천하를 떠돌다 우연히 들른 소주(蘇州)의 한 여관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를 만났다.

쨍그랑.
탁자 위에 있던 잔과 그릇들이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망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초나라 음악을 백주 대낮에 부르고 있느냐!”
앙칼진 진나라 관리의 목소리가 들리고 비파를 타며 한창 노래에 열중하던 우희는 깜짝 놀라 음악을 멈추었다.
“나으리, 이 노래는 초나라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옵니다. 다만, 오랜 시간 가지 못한 고향이 그리워 부르고 있었던 것뿐이옵니다.”
우희가 자신을 나무라는 진나라 관리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주변은 이미 진나라 관리가 데리고 온 10여 명의 군사들이 우희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를 벗어나는 길은 저 진나라 관리에게 비는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시끄럽다. 이년. 국법이 지엄한데 어찌 감히 불순한 너를 살려둘 수 있으리! 여봐라.”
“예.”
“예.”
“저년을 당장 포박해 관청으로 압송하라.”
진나라 관리의 추상 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우희를 포위하고 있던 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희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 순간 2층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초나라 사람이니 함께 데려가시구려.”
말을 마치자마자 8척 거구의 사내가 저벅저벅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왠지 모를 그 기세에 눌린 진나라 병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치며 움츠러들었다. 어느새 계단을 다 내려온 항우가 우희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처자도 초나라 사람이오?”
“그렇습니다. 대협께서도 초나라 분이시옵니까?”
“그렇소. 나는 죽어도 초나라 사람이라오. 하하하.”
시원하게 웃어젖히는 항우를 보며 우희가 다시 말했다.
“초나라 분과 동행하게 되었으니 이제 이렇게 죽는다 해도 덜 억울할 듯합니다.”
사실, 고향이 그립지 않고, 망해 버린 고국이 안타깝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마는 악랄하기로 소문난 진나라의 국법 앞에 감히 초나라를 입에 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망국의 한을 노래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진나라 관리들의 손에 죽어 갔다. 심지어, 뜻도 모르고 그저 노래를 따라 부르던 어린아이들도 예외 없이 처형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진나라에 망한 지 이제 겨우 10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이런 상황이니 망해 버린 고국을 재건하는 일은 어쩌면 가망이 없어 보였다.
대대로 초나라 고관을 지낸 가문의 여식인 우희는 그런 현실에 기운을 잃었고, 여자의 몸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지면 초나라의 노래를 불러 마음을 달래고는 했던 것이다. 오늘에서야 겨우 자신처럼 목숨을 내걸고 초나라를 그리워하는 동포를 만난 것이 기쁘기도 하고 한편 자신 때문에 봉변을 당하는 듯하여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항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항우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죽고 싶소? 아니면 이곳에서 살아 나가고 싶소?”
생사 따위에 미련을 잃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우희를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든 항우였다.
“죽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포박당해 관청으로 끌려가 모진 매질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습니다. 다만, 대협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같은 초나라 사람이 홀로 핍박 받고 있는 걸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소. 처자는 부디 그런 마음을 거두시구려.”
“그래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는 우희의 말을 끊고 항우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우린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마친 항우가 진나라 관리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갔다.
저벅. 저벅.
8척 거구의 항우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심한 위협을 느낀 진나라 관리는 그때까지의 여유로운 모습을 잃고 급히 병사들을 다그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저 연놈들을 포박해라!”
관리의 고함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진나라 병사들이 다시 항우를 포박하려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항우가 우레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
항우의 사자후에 놀란 병사들이 두 손으로 귀를 잡고 주저앉았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던 고함소리에 병사들이 귀를 잡고 주저앉자 진나라 관리의 머릿속엔 퍼뜩 무림인이란 존재가 떠올랐다. 하늘을 날고 검으로 바위도 쪼갠다던 말 같지도 않은 소문의 다른 세계. 어쩌면 눈앞의 저자가 바로 무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목숨이 걸렸다는 위기감이 들자 관리는 전에 없던 순발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혹시, 무림인이십니까?”
“그렇다면?”
항우가 느긋하게 대답하자 관리가 다시 다급히 말을 이었다.
“관과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저 초나라 여인을 데려가도록 허락하신다면 대인께는 아무런 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피식.
입가에 조소가 걸린 채 항우가 말했다.
“내가 굳이 나선 것이 저 여인 때문이라면?”
항우의 태도에 얼굴이 굳어진 진나라 관리가 턱을 앙다물고 분을 삭히는 듯하더니 이내 못 참겠다는 듯 다시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언제까지 바닥에 엎드려 있을 것이냐! 어서 저 연놈들을 포박하지 못할까!”
“예!”
“예!”
10여 명의 병사들이 다시 항우를 향해 다가오자 항우가 느긋하게 우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초나라 노래를 다시 한 곡 들려주시겠소?”
우희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생면부지의 남자가 부탁한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잠기는 목을 애써 가다듬고 대답했다.
“네.”
“부디 눈을 감고 불러주시구려.”
“그리하지요.”
‘아…….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죽게 되었지만 저 사람은 되레 나를 걱정해 자신이 죽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게 하는구나. 서럽고 서럽도다.’
아마도 오랫동안 항우의 모습과 마음씀씀이가 자신을 괴롭히리라 생각하며 우희는 비파를 켜며 노래를 시작했다.
“초나라 남쪽에는 푸른 숲이 있어 새들도 들짐승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