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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2화)
Chapter 1 죽음(2)


오랜만에 듣는 고향의 노래가 즐거운 듯 잠시 미소를 보이던 항우의 등으로 창이 날아왔다.
“어딜!”
시계방향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찔러오던 창을 비켜가게 한 항우가 어느새 발을 뻗어 창을 찌르던 병사의 턱을 걷어찼다. 일격에 턱뼈가 박살난 병사가 쓰러지자 항우는 얼른 그 병사가 들고 있던 창을 빼앗아 들었다. 8척 거구의 항우가 창을 꼬나들고 서자 진나라 병사들은 더욱 심한 위압감을 느꼈다.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에 서 있는 진나라 관리가 다시 독촉해 왔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저자의 창을 뺏고 포박해라!”
‘니가 해봐.’
‘아… 나. 아까부터 자꾸.’
병사들이 대답이 없자 답답한 듯 관리가 다시 한 번 나섰다.
“왜 대답들이 없느냐. 항명으로 죽고 싶기라도 한 게냐! 이놈들을 당장……, 으악!”
한창 열을 올리며 핏대를 세우며 고함지르던 관리가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병사들이 황급히 관리에게 다가가 보니 어느새 관리의 가슴에는 항우가 들고 있던 창이 박혀 있었다. 언제 던졌는지 보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분명 저자는 자신들이 포위하고 있지 않았던가. 알 수 없는 불안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는 찰나 감정 따윈 일체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오지 않겠다면 살려주겠다.”
“네, 네. 안 옵니다.”
“네. 저희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횡설수설하며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한편, 눈을 감고 초나라 노래에 집중하던 우희는 사방이 조용해졌음을 느낀 지 오래지만 불안한 마음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상황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비파를 더욱 크게 연주하며 목에 한껏 힘을 주어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감은 두 눈으로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갈수록 밀려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우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손이 비파를 켜고 있던 자신의 손 위로 포개짐을 느끼고는 살며시 눈을 떴다.
“듣기 좋은 노래였소.”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항우를 보자마자 애써 참으며 흐느꼈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 말하지 않았소. 믿지 못하셨구려. 하하하.”
“믿겠습니다. 이제 다 믿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셔도 다 믿겠습니다.”
주문을 외듯 울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우희를 항우가 다정히 감싸 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통곡이 울음으로 바뀌고 울음이 흐느낌으로 잦아들자 항우가 말했다.
“당신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구려.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소?”
항우의 크고 단단한 팔에 안겨 있던 우희가 고개를 들어 항우를 바라보자 항우는 기다렸다는 듯 다정히 웃어 주었다. 그런 항우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우희가 대답했다.
“저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 믿겠습니다.”
호쾌하게 웃으며 항우가 말했다.
“암, 내 절대 자네를 내치지 않겠네. 부디 내 옆에 붙어 앉아 내가 우리 초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걸 지켜보시게.”
“네. 그리하지요. 백 번이라도 그리하지요.”
뭐가 그리 슬픈 건지 아니면 좋은 건지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우희였다.

땅에 창을 거꾸로 박아 짚은 채 겨우 두 다리로 서서 눈까지 감고 있는 항우를 보며 그를 포위하고 있는 한왕의 군사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뭐야, 드디어 죽은 건가?”
“자네가 한번 가 보게.”
“미쳤어? 자네가 가 봐.”
항우의 수급(머리)을 끊어 바치면 한왕이 큰 상을 내릴 것이 분명했지만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수들조차 좀처럼 다가가질 못하고 있었다. 항우만 사라지면 천하의 주인이 될 한왕이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군사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좀처럼 아랫사람들을 다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죽은 거야? 아직 살아있는 거야? 저 무시무시한 놈이 혹시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속으로만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우희가 한왕에게 귓속말을 건네 왔다.
“신첩이 가서 항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한왕이 그녀를 만류했다.
“우미인은 경거망동치 말라. 그가 죽을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기다리는 것이 옳으리라. 괜히 다가가면 우리 군의 희생만 커질 뿐이니 그대도 그저 가만히 있으라.”
한왕에게 우희는 처음 본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여자였지만 항우의 여자이기에 감히 탐하지 못했던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위험을 찾아가려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우희를 얻은 것 또한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반년 전 항우가 원병을 더 모집하기 위해 잠시 인근 지방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항우의 영채를 기습 공격한 한왕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었으니 바로 사로잡은 항우의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한왕이 자기 진영으로 그녀들을 끌고 가 심문해 본 결과 항우의 여자는 우희 하나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우희의 계집종들이었다.
‘초패왕(楚覇王)이란 자가 단 한 명의 여인만 두었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한왕 자신이 처음 명성을 얻고 세력을 갖추기 시작했던 8년 전에 한 명이던 첩은 어느새 50여 명을 훌쩍 넘겼다. 그런데, 자신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자가 단 한 명의 여인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꿈에 그리던 항우의 여자를 손에 넣은 한왕은 밤낮으로 공을 들였으나 도무지 우희의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젯밤에서야 자신에게 처음으로 웃어 주었던 것이다. 감금시켜 둔 그녀가 무료할까 싶어 보내준 비파 덕분이었다.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마침내 웃어 준 게 고마워 오늘은 더 좋은 비파를 구해 가져 갈 참이었다.
“한왕(漢王)께서는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저자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 한들 저를 해치지는 못합니다. 다 죽어가는 자를 앞에 두고 시간을 지체하는 것이 어찌 병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주지 않겠습니까?”
우희의 입에서 군사들의 사기란 말이 나오자 정신이 퍼뜩 든 한왕은 급히 주위를 살펴보며 번쾌를 찾았다.
“상장군은 어디 있는가!”
한왕이 타고 있는 수레를 뒤편에서 호위하던 무장이 튀어나오며 대답했다.
“신 번쾌 여기 있사옵니다.”
“너는 어서 항우의 수급을 취해오라.”
한왕이 다급히 명을 내렸다. 한왕 진영인 한나라에는 주발, 주영 등 여러 무장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믿음직한 장수는 역시 번쾌였다. 하지만, 번쾌는 항우를 저 지경으로 만드느라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희가 다시 말을 꺼냈다.
“번 장군은 대왕의 오른손과 같은 존재십니다. 몸도 성치 않은 분을 어찌 사지로 보내려 하십니까?”
한왕이 우희의 말을 듣고 번쾌를 다시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한왕이 아차 싶어 잠시 망설이던 순간 우희가 다시 조용히 말했다.
“신첩이 항우의 목에 제 비수를 꽂아 우환을 없앨 것이니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말을 마치자마자 말릴 새도 없이 곧장 앞으로 달려가는 우희의 뒷모습을 한왕이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천하의 주인이 바뀌니 섬기는 지아비도 바꾸는구나. 무섭도다! 우희여.’

어느덧 항우의 발치까지 간 우희가 측은한 표정으로 항우를 바라보았다.
솜씨 좋은 장인이 사슴가죽으로 만든 신발은 피에 물들어 흥건히 젖어 있었고 그나마 발목부분부터는 찢겨서 발을 훤히 드러내놓고 있었다. 거의 단칼에 상대를 제압했던 항우인지라 항상 깨끗이 정돈돼 있던 갑옷과 그 속에 입던 의복 또한 군데군데 찢기고 피에 젖어 숫제 누더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예전의 항우와 같은 모습이라고는 그나마 얼굴뿐이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고 계십니까?”
우희의 목소리가 들리자 희미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깨우며 항우가 대답했다.
“오셨는가?”
“버겁지 않으십니까?”
지금 상황을 말하는 건지, 철로 만든 갑옷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말하는 건지 모를 소리였다. 항우도 막연하게 뜻 모를 소리를 했다.
“버겁군.”
항우답지 않은 대답에 우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면 그만 내려놓으시지요.”
“자네와 약속했으니 차마 그럴 수 없네.”
우직한 항우의 대답에 속이 미어짐을 느끼며 우희가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한왕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저와 한 약속 따위 잊으셔도 좋습니다.”
“이만 멈춰도 되겠는가?”
“충분합니다. 첩은 낭군님 덕분에 많은 꿈을 꾸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흐느끼듯 말하는 우희의 목소리에 좀처럼 열리지 않았던 항우의 눈이 다시 떠졌다.
“자네, 마지막으로 초나라 노래를 불러주시겠는가?”
웃는 듯 우는 듯 항우가 우희를 향해 말했다.
“그리하지요. 몇 번이라도 불러드리지요.”
“부디… 눈을 감고 불러주시게.”
항우의 말에 우희는 다시 심장이 찢어짐을 느꼈다.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처음 만난 날의 진나라 병사 10명과 지금 이 순간 한왕의 군사 10만은 달라도 너무 다른 상황이다. 혼자서 도망치려면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따르던 부하들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항우가 그런 결정을 할 리 없었다. 항우는 이곳에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린 부하들을 따라가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초나라 노래를 부르려던 생각을 고쳐먹은 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사람이 죽고 없는 상황을 보느니 차라리…….’
“낭군, 낭군께서 그동안 주신 사랑을 제가 보답해 드린 적이 없사옵니다.”
불안한 예감이 들어설까?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항우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요. 넘치도록 받았다오.”
항우의 말에 우희가 애써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주신 은혜는 다음 생에서 보답하겠나이다.”
우희의 말에 항우 역시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다음 생에는 부디 나를 비켜 가시구려. 다음 생에까지 자네를 이리 고생시킬까 겁난다네.”
“신첩은 한 번도 고생을 겪은 적이 없나이다.”
“그래도……, 비켜 가주시게. 내 자네를 다시 맞을 염치가 없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다시 뜨며 항우가 힘없이 말을 잇자 흐느끼며 고개를 젓고 있던 우희가 이윽고 결심한 듯 말했다.
“낭군님. 그럼 제가 먼저 가 기다리겠나이다.”
말을 마친 우희는 비수를 꺼내 단숨에 목을 찔렀고 쏟아져 나온 피는 순식간에 우희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안 돼!!! 우야, 우야, 이 무슨 짓이더냐! 니가 왜!”
박힌 듯 서 있던 항우가 다급히 쓰러지는 우희를 받아 땅에 눕혔다. 가까이에서 익숙한 항우의 손길이 느껴지자 우희가 눈을 뜨지 못한 채 말했다.
“낭군님. 오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제가 먼저 당신을 찾을게요…….”
그것이 우희의 마지막이었다.
“으아아아아!”
항우가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자신이 죽는 것은 괜찮다. 각오했던 일이었으니. 초나라를 재건하지 못하는 것도 참을 수 있다. 천명이 다되어 초나라가 망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하지만, 우희가 죽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이 지켜주지 못해 죽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내 당신께 제사를 올리매 한 번도 예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당신께 단 하나를 마지막으로 비나이니 부디 들어주소서.’
항우의 몸이 기우는가 싶더니 이윽고 스르륵 쓰려졌다.
죽었다는 확신을 가지면서도 한나라 군의 장졸들은 감히 다가가 항우의 머리를 자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힘들었던 전투에 진이 빠진 듯 그 자리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다만, 우희의 의도를 미리 알아채지 못하고 항우에게 가도록 내버려 둔 자신을 원망하는 한왕의 자책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