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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3화)
Chapter 1 죽음(3)
“이보시오, 여기가 어디요?”
항우가 바삐 길을 가고 있는 관리로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당신, 기억을 잃지 않았나? 이승에서 쓰던 말을 아직도 할 수 있군.”
진한 묵색의 관복을 입은 사내가 신기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여기가 저승이라도 된단 말이요?”
항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부정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여러 번 입었었다. 아마 자신이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정하는 눈빛을 쏘아 보이는 그였다.
“맞네, 이곳은 저승이고 반 각이 채 지나지 않아 염라대왕께서 자네를 심판해 극락과 지옥 중 한 군데로 보낼 것이네. 그것보다 나는 자네가 어찌 망각의 강(이승과 저승을 잇는 강)을 건너고도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네.”
멀어져 가는 관리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항우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죽어가는 우희를 보며 그렇게 간절히 하늘에 빌었거늘.
진나라 군대를 철저히 응징한 것, 제나라 백성들을 산 채로 파묻어 버린 악업. 모두 자신의 소행이었다. 덕(德)이 아닌 힘으로 백성을 대한 것에 대한 잘못을 그리도 간절히 용서해 달라 울부짖었건만. 하늘은 결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음이라. 그래서 결국 자신은 이렇게 먼 곳까지 와 버린 것이리라.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나?”
무시무시하게 큰 거인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항우.”
체념한 듯 덤덤한 말투였다.
“항우라……. 차사들은 명부를 다시 확인해 보라.”
차사란 이승에서 흔히 말하는 저승사자고 명부란 사람이 죽는 때를 미리 적어둔 장부이다.
“염라대왕님, 아무리 찾아도 항우란 사람은 이번 차사 명부에 없사옵니다.”
차사들 중 제법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이는 다부진 얼굴의 관리가 대답하였다.
“그럼, 대체 저자를 누가 데려왔단 말인가? 차사들 중 누군가가 데려왔으니 저자가 저승에 있는 것이 아닌가?”
염라대왕은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차사들은 자신이 직접 고르고 골라 임명했다. 저들 중 멍청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실수할 성품도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저자는 어찌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다른 명부에는 항우란 자가 있는가?”
염라대왕이 차오르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묻자 말석에 있던 차사가 급히 대답했다.
“예, 초나라 항연의 손자인 항우란 자가 있습니다.”
차사의 말을 들은 염라대왕이 다시 확인하려는 듯 항우에게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
“초나라 사람이 맞소.”
항우가 여전히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란 말투로 염라대왕이 다시 차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렇다면, 명부에 적힌 저자의 수명은 언제까지더냐?”
마지막 줄에 서 있던 관리가 송구한 듯 대답했다.
“초나라 항우의 원래 수명은 아직 30년 하고도 넉 달이 더 남았사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염라대왕이 항우를 보며 물었다.
“항우여, 너는 이승에서의 기억을 잃지 않았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그렇소.”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한 항우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너를 이곳에 데려왔는지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저들 중 누구인지 알겠느냐?”
염라대왕은 다른 생각이 있는 것도 같고 실수한 차사를 가려내려는 것도 같았다.
“저들 중에는 없소. 머리가 붉고 긴 중년의 여인이었소.”
항우는 당연히 기억한다는 듯 말했다.
염라대왕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기다리란 말도 없이 휘적휘적 북쪽으로 걸어갔다. 북쪽 벽에 걸려 있는 불타오르는 거울 앞에 선 염라대왕이 잠시 의관을 가다듬더니 이윽고 거울로 빨려들 듯 쑥 미끄러져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기한 듯 거울을 지켜보던 항우가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를 살피는데 다시 염라대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다시 왔는지 어느새 염라대왕이 이미 원래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항우 자네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군. 천제(天帝)께서 자네의 소원을 듣고 자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싶다 하셨네.”
온화한 말투로 염라대왕이 말을 이었다.
“기회를… 다시 준다?”
무덤덤하기만 했던 항우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렇네. 천제께서는 자네에게 시간을 허락하셨어. 어서 내 뒤로 보이는 저 거울로 들어가 보게.”
여전히 온화한 말투로 염라대왕이 항우에게 말했다.
“시. 간.”
앙다문 항우의 입술에서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염라대왕이라 하셨소?”
항우가 눈앞에 있는 거인에게 물었다.
“죽은 이를 다스리는 자라는 뜻이라면 내가 그 염라지.”
어느덧 다정한 눈빛으로 항우를 내려다보며 염라대왕이 대답했다.
“경황이 없어 무례를 범했으니 죄는 다시 이곳에 왔을 때 달게 받겠소.”
항우가 다시 덤덤히 말하며 거울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 시대에나 예절이란 엄격한 것이었다.
항우가 살던 때의 이승에서는 하늘의 아들이란 천자(天子)가 정점에 있었고 그 아래로 영지를 하사받은 제후가 있었다. 그 제후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으로 나뉘고 그 아래로 벼슬인 경(卿), 대부(大夫) 등이 있었다. 항우의 벼슬은 경이었는데 이승의 천자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을 리 없는 염라대왕을 상대로 무릎을 꿇지 않고 눈을 바라보며 동년배에게 하듯 말을 했으니 그 시절의 예절로써는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잘 다녀오시게.”
별 일 아니라는 듯 항우의 뒷모습에 대고 염라대왕이 말했다.
불타고 있는 3장(1丈=1미터)도 더 되어 보이는 거울 앞에 잠시 멈춰서는 듯싶더니 어느새 항우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Chapter 2 환생(1)
아틀란티스 대륙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신만이 당신의 창조물을 기억할 뿐.
아틀란티스 대륙은 직사각형 모양의 큰 한 덩어리로 되어 있었지만 곳곳에 솟아 있는 거대한 산맥과 바다, 그리고 바다처럼 넒은 호수와 강들로 인해 이동이 편리하지는 못했다. 후대의 학자들은 완벽한 다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습작으로 만든 세계라 칭하기도 했던 그곳. 하지만,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다.
현재의 아틀란티스는 신의 창조물인 인간과 드워프, 엘프 이외에도 각종 몬스터들이 혼재해 살아가고 있는 치열함이 한창인 세상이다. 물론, 그 치열함과 거리가 먼 존재도 있었다. 다른 모든 창조물이 두려움으로 경외하는 ‘드래곤’이 바로 그런 존재이다.
대륙의 역사가 처음 시작될 때 각 종족은 무리의 연합으로 하나의 큰 힘을 이루어 다른 종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며 살아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다른 종족은 물론이고 같은 종족들끼리도 서로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이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이 그러했다.
초기에 인간은 같은 인간끼리 가장 신뢰가 두터운 종족이었다. 다른 종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육체를 타고 태어났기 때문일까? 그들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다른 어떤 종족보다 강하게 연합하여 힘을 키워 나갔다. 작은 부족 단위로 연합을 유지하던 드워프와 엘프는 차자 인간의 대규모 연합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인간을 피해 대륙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와 드워프가 그 정도였으니 지능이 떨어지는 다른 몬스터들은 인간의 공격에 아예 버티지를 못하고 산맥 깊숙한 곳 혹은 인간이 감히 토벌하지 못하는 땅으로 도망쳐 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인간에게 보금자리를 뺏긴 다른 종족들의 원한은 깊었고 우연히 무리에서 이탈한 인간과 마주칠 때면 철저한 응징을 가했다. 안전을 위해 인간은 더욱더 다른 종족들을 심하게 몰아붙였고 그것은 결국 대륙 1차 대전으로 발전했다.
어떤 종족이건 가릴 것 없이 개체 수가 60% 이상 감소될 정도의 치열한 대륙 전쟁은 장장 20년 동안이나 지속됐고 각 종족의 대표들은 이 잔인하고 지루한 소모전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의 평화회담이 성사되었고 인간과 엘프 그리고 드워프 종족의 대표들이 7일이라는 장시간의 회의를 거쳐 이른바 ‘아틀란티스 아젠다’를 발표했다.
장시간의 평화 회담 끝에 합의한 아틀란티스 아젠다의 주요 내용은 세 가지였는데 그것은,
첫째, 아틀란티스 대륙은 인간, 엘프, 드워프 모두의 것이다. 단, 몬스터들은 제외한다.
둘째, 세 종족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
바로 이 두 번째 조항 때문에 회의가 장시간에 걸쳐 이뤄졌던 것이다. 세 종족이 함께 산다는 것은 땅을 공유한다는 것인데 엘프가 점령하고 있는 땅과 드워프가 차지하고 있는 땅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땅이 저마다 다르니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종족의 현자(賢者)들이 모인 회의답게 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는데. 국가(國家)가 바로 그것이었다. 세 군데의 땅에 각각 세 개의 국가를 세우고 각 종족의 인구 또한 1/3씩 나누어 각 국가에 분산시켜 완성된 하나의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마지막 셋째, 각 국가는 다른 국가에서 종족 통합에 관한 불합리한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철저히 감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현자들은 서로를 신뢰했고 종족 간의 쓸데없는 분쟁을 영구히 추방하고자 하는 의도로 만든 조항이었으나 바로 이 조항 때문에 세상은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투쟁을 지속하게 되었는데, 바로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 세 번째 조항을 근거로 다른 나라를 침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동맹과 평화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 가자 각 국가들은 다른 나라의 영토를 탐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진 곳보다 풍요로운 자원이 있는 땅을 뺏고자 서로를 공격했고 이것은 세 개의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아틀란티스 아젠다를 근거로 세워진 세 개의 나라는 아틀란티스를 거의 정확히 삼등분해서 세워졌고 위치는 대략 이랬다. 맨 왼쪽에는 ‘비잔틴 제국’이 있었고 광활한 알스 산맥을 경계로 중간에 위치한 ‘파운드 제국’ 그리고 바다를 경계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나라가 ‘아스카 제국’이었다. 세 나라 사이에는 워낙 험한 자연 국경이 있기 때문에 전투로 다른 나라의 영토를 뺏더라도 일시적일 뿐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알스 산맥을 넘자면 아무리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해도 5000km 이상의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배에서만 지내야 하는 시간이 적어도 1달이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워낙 서로 왕래가 힘든 환경은 종족 간의 유대를 허물기 충분했고 같은 종족이라도 태어난 나라에 따라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게 했다. 결국, 선대의 현자들이 처음 의도했던 범아틀란티스 주의는 빛이 바랬고 지금처럼 치열한 국가주의가 아틀란티스에 살아가고 있는 세 종족의 유일한 가치가 되고 말았다. 대륙전쟁이 세 종족의 대립이었다면 지금은 세 나라의 대립으로 형태가 바뀐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