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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4화)
Chapter 2 환생(2)
나뭇잎 사이로 갑자기 햇볕이 쏟아지자 무당벌레가 놀란 듯 거친 날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이곳은 파운드 제국 역사상 최고의 무장(武將)으로 칭송받았던 몬테규 대공의 영지. 대륙 1차 대전 이전에 있었던 조그만 나라보다 오히려 더 큰 대공 직할령이다. 영지 대부분이 농민인 곳답게 성실함과 조용함이 이곳의 분위기였으나 유독 오늘의 몬테규 영지는 기분 좋은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13대째 내려져 온 대공 가문에 가장 큰 근심이자 거의 유일한 걱정은 대를 이를 후손이 귀하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영주를 사랑하는 이곳 사람들의 걱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몬테규 대공의 아내인 엘리사 여사의 출산 임박 소식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사실 40살이 넘은 엘리사 대공부인의 임신 소식에 시민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지만 어젯밤 영지 내 최고 산파인 산드라가 급히 궁으로 불려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의 기대도 한껏 높아져 있었다.
체통과 위엄 따윈 모두 잊어버린 듯한 중년의 사내가 굳게 닫힌 방문 앞을 초초하게 오가고 있었다.
파운드 제국 최고 무인(武人) 가문의 후손답게 그는 강인한 눈을 빛내고 날카로워 보이는 턱을 앙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불안과 초조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고대하고 고대하던 아이의 첫 울음소리가 들렸고 산파의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는 소리,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는 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오자 몬테규 대공의 어깨에도 스르륵 힘이 풀어졌다.
어젯밤 급히 데려온 산파 산드라가 큰 소리로 아들이란 소리를 외쳤을 때 몬테규 대공의 눈에는 ‘드디어’라는 단어가 나타난 듯 보였다. 가문의 존속을 위해 후처나 첩이라도 맞이해야 한다는 주변의 끊임없는 조언과 지금의 대공부인에게 청혼하던 순간 유일한 사람이라 약속했던 기억이 충돌해 사실 그의 지난 10여 년은 속이 시커멓게 타 버렸던 것이다.
충성스런 부하들의 말과 진심으로 걱정하는 친구들의 조언을 10여 년이나 버텨왔지만 사실 그에게도 가문은 평생을 목숨 바쳐 지켜야 할 존재였다. 그런 가문을 이을 후계자가 드디어 태어난 것이다.
몬테규 대공은 아직 보지도 못한 방금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영특할 것이다, 잘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영지민들을 사랑할 줄 아는 자애로운 사람일 것이라며 생후 1일차인 아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성 안에는 몰려든 시민들의 환호 소리와 곱게 자른 색종이, 향기를 가득 머금은 꽃잎이 바람을 타고 함께 날아오르고 있었다.
생후 1주일.
아이의 눈동자에 부모의 얼굴이 맺히기 시작했다.
“여보, 어서 와서 이것 좀 봐요. 우리 귀염둥이의 눈동자에 제가 정확히 보인다구요.”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사 대공부인이 몬테규 대공을 재촉했다.
“이 녀석, 정말 그렇구나. 나를 쏙 빼닮았어. 벌써 부모에게 눈으로 인사하는 영특함이란.”
함박웃음을 지으며 몬테규 대공이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우리 이 매력덩어리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줘야 할까요?”
여전히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남편에게 다정한 눈빛을 건네는 엘리사가 물었다.
“매력적이니 매력이라고 불러야지! 차밍이라고 부르는 게 어때? 차밍 드 몬테규!”
계속되는 몬테규 대공의 바보 같은 소리였다.
“여보, 물론 저도 그렇게 부르고 싶지만 그건 놀림 받기 쉬운 이름이잖아요. 너무 노골적이에요.”
아닌 척 단호하게 몬테규 대공의 말을 자르며 엘리사가 눈을 흘겼다.
“그렇다면 차니라고 부릅시다. 차니 드 몬테규. 이건 아마 우리밖에 모를 거야. 그리고, 이름에 부모만 아는 숨겨진 뜻이 있는 것도 분명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난 더 이상 양보 못해요.”
정말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고집을 부리는 몬테규 대공이었다.
“차니 드 몬테규. 좋아요. 차니. 앞으로 넌 차니란다.”
눈가에 웃음을 풀지 않고 물끄러미 몬테규 대공을 지켜보던 엘리사가 순순히 동의하며 사랑스런 자신의 아들을 침대에서 들어 올려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엘리사의 품에 안긴 차니, 아니 항우는 즐거워하는 몬테규 대공과 엘리사를 바라보며 깊이 생각에 빠졌다.
‘여긴 어디지? 시간을 준다고 했는데 왜 내가 다시 전장에 있지 않고 이방인들 앞에 있는 걸까? 몸이 어딘가에 묶여 있는 것인가? 왜 팔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는 건가? 대체 저들은 뭐라고 지껄이며 나를 향해 웃고 있는가? 욕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생후 1개월.
“차니∼. 이 잠꾸러기 녀석. 배고프지 않니? 잘 먹고 어서 무럭무럭 자라야 해.”
곤히 잠들어 있던 아이를 깨워 젖을 물리며 엘리사가 재촉했다.
그때쯤 항우는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간을 준다던 천제(天帝)는 아예 처음부터 시간을 준 것이었다.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세상에서. 이제 자신에게 놓여 있는 선택권은 둘 중 하나였다. 단식을 통해 천제가 준 시간을 빨리 포기하고 염라대왕 앞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정말 처음부터 다시 무예와 병법을 수련해 이전의 자신보다 더 강해져 돌아가거나.
한 달 내내 지켜보았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중원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중원이 아니었다. 병법을 수련하기 위해 천하 곳곳의 지형을 익히던 20대에 안 가본 곳 없이 다 가보았노라 자부하는 그였지만 두 개의 달이 뜨는 곳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들어보거나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천제의 뜻은 명확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힘을 길러라. 준비를 마치면 다시 너를 중원으로 돌려보내겠다.’라는.
어차피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남는 게 시간인 그는 조용히 지난 생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숙부의 애정 어린 보살핌으로 성장한 어린 시절. 양쯔강 남쪽의 어느 동굴에서 기연을 얻어 수련하게 된 검. 자신이 평생토록 사랑해 마지않았던 단 한 사람 우희. 그리고, 진시황의 가혹한 폭정에 시달리는 수많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치렀던 수많은 전투. 그 전투 속에서 잃었던 자신의 가족.
지난 생의 수많은 후회가 번뇌로 변해 항우를 괴롭혔다.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이 과연 몇 명일까?’
몇 명 정도의 수준이 아닐 것이다. 중원 천지에서 천하제일검이라 불렸던 그였다. 역사상 유례없이 무림과 중원을 모두 통일할 수 있었던 단 한 명인 그였다. 강자에게 철저히 강하고 약자에게 너무나도 관대했던 그였지만 아무리 약자라도 자신과 부하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철저히 응징했던 것도 그였다.
한왕의 세력이 아직 보잘 것 없을 때 재빨리 한왕을 쳐부술 계획을 세우고 있던 항우는 뜻하지 않게 내란을 겪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지체된 시간 동안 한왕의 세력이 점점 불어나자 내란을 일으킨 주동자는 물론 거기에 동원된 백성들에게까지 가혹한 징벌을 내렸다. 심지어 늦게 항복한 성의 군사는 물론 주민들까지 한 번에 20만 명을 생매장하기도 한 그였다. 끝끝내 항복하지 않은 성은 사람은 물론 개, 소, 닭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는 잔인함을 보이기도 했다.
항우의 그런 잔인함은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는데 항복해서 죽나 저항하다 죽나 매한가지인 적들이 결사항전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100만 대군이었던 항우의 군세는 어느덧 20만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한왕과 직접적인 전투를 할 때에는 10만이 채 되지 않았다. 반면, 항복한 적은 무조건 받아들이고 심지어 거짓 항복과 배신을 3번이나 반복한 자도 미련스레 용서했던 한왕의 군세는 점점 불어나기 시작해 항우와 결전을 치룰 때엔 어느덧 70만이 넘는 대군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항우의 무예가 워낙 출중한 탓에 10만 대 70만의 싸움이 장기전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지 그때 군사들의 사기나 민심은 이미 한왕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많은 군사들이 나를 버렸던 것일까? 내 잔혹함 때문인가? 아니면 너무 내 욕심만 채우고 살았던 걸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비록 민심은 항우를 떠났지만 군심은 항우를 떠나지 않았었다. 자기 배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항우는 모든 것을 군사들과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추울 때엔 똑같이 춥게 잤고 밥을 먹을 때도 다른 장졸들과 어울려 같은 밥을 나눠 먹었었다. 잔혹함은 항상 적을 향해서만 내뿜었고 그토록 잔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동료들의 죽음이 애달팠기 때문이었다.
그의 몰락은 오히려 너무 깨끗한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었다. 힘든 전투를 끝내고 나면 장졸들은 목숨을 건 대가로 승리자의 권리(약탈, 강간, 살인 등)를 원했지만 항우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었다. 어쩌다 부하 장수가 재산을 모은다는 소리가 들리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처형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그였기에 오랜 시간 권력의 정점에 머물렀음에도 심복이 없었다.
‘아……. 지난 생의 나는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구나.’
슬펐다.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 지난 생의 동료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나를 위해 아니 서로를 위해 목을 내어줄 수 있는 벗을 사귀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런 친구를 가지리라.’
‘지난 생에 내게 호감을 느끼고 다가와 준 이가 없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꾸밈없고 시원시원한 성품과 게으름을 모르던 그를 누가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가까워진 자들은 저마다 항우의 압도적인 힘과 재능에 주눅 들기 일쑤였다.
대개 친구란 비슷한 처지에서 비슷한 고민을 나누며 또한 비슷한 목표를 향해 오랜 시간 함께 정진하다 우정이 돈독해지기 마련인데 항우의 곁에 있던 자들은 도무지 그런 일을 겪을 수 없었다. 천 년에 한 번 나오기도 어렵다는 태양지신(太陽之身)으로 태어난 그에게 무예와 병법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 끝 간 데 모를 재능을 뉘라서 함께 할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친 항우는 크나큰 결심을 하기로 했다. 바로 자신이 노력하여 이룩한 마지막 깨달음인 대동신공(大同神空)을 봉인하기로 한 것이다. 내가기공의 고수였던 항우는 대동신공으로 내공을 갈무리하여 엄청난 성취를 이룩했었다. 그런 내공을 봉인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큰 모험이 될 수 있었다. 비록 이번 생에서 벗과 더불어 살며 사랑과 용서를 깨닫는 삶을 살고자 다짐하였다지만 괜히 자신의 힘을 봉인했다가 어이없는 죽음을 맞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을 마친 항우는 이윽고 결심한 듯 자신의 기억 일부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 아니 뛰어난 사람이 들어도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항우는 자신의 뇌를 조작하여 한편에 조그만 공간을 만들더니 그곳에 대동신공을 넣고 봉인해 버렸다. 그리고 그 봉인은 20여 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도록 조치했다.
그도 이제 미친 듯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저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게 없는 평범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자 이제 이번 생에 어떻게 적응할지가 관건이군.’
미치지 않고 다시 인생을 처음부터 살기 위해서는 철저한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했다. 자신을 노장이 아닌 1살로 인식하고 체면을 내려놓는 것이 그것이었다.
평생 겪어 보지 못한 부모란 존재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가슴이 터지도록 좋기도 했다.
한 맺힌 성장과정으로 인해 잔인한 성품을 가지게 되었던 전생의 항우와 부모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자라는 차니의 성품은 아마 많이 다르리라. 전생의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단 하나, 그것은 바로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아마, 천제께서는 그런 자신의 성품을 처음부터 다시 바꿀 기회를 준 것이리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즈음의 항우는 이미 철저히 생후 1개월 된 아이로 살아가고 있었다.
‘오케이,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어머니, 기왕이면 이제 고기랑 밥도 좀 주세요. 이렇게 먹어서 언제 자라냐고요. 저 급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