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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5화)
Chapter 3 프레너미
(Friend+Enemy)(1)


파운드 제국 귀족의 모든 자녀들은 5세부터 10세까지 의무교육을 이수해야 하는데, 수도에 있는 왕립 유아 아카데미에서 그 의무교육을 담당한다. 그 교육은 매우 엄격해서 아카데미 기간 내에는 외부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고 그것은 부모도 예외가 아니었다.
휴가 기간도 없어 말하자면 6년 동안 부모와 자식은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편지나 소포는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했다. 다시 말해, 아카데미 기간은 철저히 함께 생활하는 그들만의 관계로 이루어짐을 의미했고 이것은 귀족들 간의 인맥 형성에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 불화로 인한 귀족끼리의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국가의 숨은 의도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아는 안면에 침 뱉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것보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장래가 결정되는 곳이라는 데 있었다.
한 해 50여 명 안팎의 수강생들의 일과는 주 단위로 황제에게 보고되고 월 단위로 평가가 이뤄지며 연 단위로 황제의 심사가 기록된다. 우수한 재목을 미리부터 파악하고 성인이 되면 황제의 충실한 신하로 부르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유아 아카데미는 물론 청소년 아카데미, 성인 아카데미도 있었지만 자아가 형성된 이후의 교육은 큰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져 버려 오늘날에는 오직 유아 아카데미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파운드 제국 건국 초에 인간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엘프와 드워프의 대표 각 한 가문이 공작의 직위를 받았다. 황제가 죽고 나면 다음 황제는 엘프의 가문에서 뽑았고 그 다음 황제는 드워프 가문에서 선출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이 70년 전후인 것에 비해 드워프나 엘프의 수명은 적어도 4백 년이었으니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엔 여간 불합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세 종족의 대표는 황위의 양위를 인물이 아닌 시간으로 정하는 것에 합의했고 그 기간은 5백 년이었다. 대륙 전쟁 후 아직 4백 년이 채 안 되었으니 파운드 제국의 황제 자리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었다.
파운드 제국은 1명의 대공과 2명의 공작, 6명의 후작, 36명의 백작, 90명의 자작과 수백 명의 남작이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지만 현재는 자작과 남작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새로이 나라에 공을 세워 귀족이 된 자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공작과 후작 가문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모든 귀족 가문은 단 한 명의 후계자만을 지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선택받은 한 명의 후계자 외에 나머지 자녀들은 평민 신분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했다.
딸은 어차피 결혼한 배우자의 신분에 따르는 것이 국법에 엄격히 정해져 있어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아들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무지 현실과 맞지 않았고 후계자가 되지 못한 다른 아들에 대한 구제 방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작위하강제’인데 간단히 말해 후계자가 되지 못한 아들은 작위를 한 단계씩 하강시켜 귀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공작 가문에 네 명의 아들이 있었고 한 명이 후계자 지목을 받았다면 남은 세 명의 아들은 후작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작 가문의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후작 작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고 후계자로 선출되면 공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 작위하강제는 남작까지만 유지되는 것으로 만일 자신의 선조가 공작이었더라도 계속 작위가 하강해 남작까지 내려왔으면 그 다음 세대의 아들들은 후계자로 지목을 받아 남작 신분을 유지하든지 아니면 평민이 되어야 했다.
원래 3명의 공작으로 이뤄졌던 체제가 1대공, 2공작 체제로 변경된 것은 4백여 년 전의 일로 당시 빈번히 발생했던 비잔틴 제국, 아스카 제국과의 전쟁 때문이었다.
국가의 최대 위기 상황인 전쟁에서 몬테규 공작은 눈부신 승리를 거듭했고 그가 가진 검의 경지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다른 나라에서는 몬테규 공작의 존재만으로도 감히 파운드 제국을 침범치 못했고 파운드제국에서는 그 공을 인정하여 공석으로 있던 대공이란 작위를 몬테규 공작에게 수여했다.
원래 대공이란 작위는 왕족을 위한 것으로 5백 년이 지나 다른 종족의 가문에 왕위를 양위하고 난 후 기존의 왕족이 받는 작위였다.

* * *

“다녀오겠습니다∼”
설렌 얼굴로 마차에 오르며 차니가 몬테규 대공과 대공부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귀하디귀한 아들을 멀리 보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국법은 지엄한 것이었고 자신의 아들이 잘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몬테규 대공 내외는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실, 자기 아들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저렇게 똑똑한 아이는 본 적이 없었다.
4세가 되어 이미 현재의 언어와 대륙전쟁 이전의 시대에 쓰던 엘프의 언어인 룬어, 드워프의 언어인 불어까지 습득해 버렸고 5세에는 검술과 창술, 궁술까지 곧잘 흉내 내고 있었으니 그리 심한 비약도 아니었다.

파운드 제국의 수도.
도심 한가운데 인공적으로 조성된 티가 팍팍 나는 대규모 공원이 있었으니 바로 이곳에 제국의 미래를 짊어질 꿈나무들을 위한 아카데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 이제 선생님이 여러분들한테 신기한 것을 보여줄 거예요. 그 전에 선생님이 질문 하나 할게요. 밤과 낮의 다른 점이 뭘까요?”
“어두워요.”
“캄캄해요.”
“무서워요.”
제멋대로 신나서 외치는 꼬마들.
“맞아요. 다들 잘 대답해 줬어요. 그럼 왜 밤에는 낮처럼 잘 볼 수 없는 걸까요?”
그런 꼬마들을 애써 사람 취급하며 수업을 이끌어가는 교사.
“빛이요.”
“맞아요. 빛이 없어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한 꼬마들의 자부심 실린 대답에 교사는 싱긋 웃으며 수업을 이어 갔다.
“그럼 밤에 쓸 수 있는 이런 건 어떨까요?”
교사의 손이 무지갯빛으로 아롱거리나 싶더니 갑자기 샛노란 빛을 강렬히 뿜어내는 주먹만 한 구슬이 손바닥 위로 튀어나왔다.
“와∼”
“와∼∼”
“멋져요∼”
“신기해요∼”
신기한 광경에 아이들은 난리를 피웠다.
“이건 라이트닝 볼이라고 하는 마법이에요. 여러분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아카데미가 끝날 때쯤엔 이 라이트닝 볼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어때요? 마법이란 거? 배워보고 싶어졌어요?”
“네!!”
“가르쳐 주세요.”
“너무 신기해요.”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분위기에 전혀 동조되지 않고 있는 금발 머리 꼬마와 검은 머리 꼬마.
그 날은 차니와 제이가 서로를 처음 바라본 날이었다.
딱히 대단해 보이지는 않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차니와 시크하게 입 밖으로 내뱉어 버리는 제이.
“뭐 대단한 거라고.”
시큰둥한 제이의 태도가 아니꼬운 듯 옆에 있던 아이들이 한 마디씩 내뱉으며 공격했다.
“빛을 만드는 건데 대단하지 않다고?”
“너도 할 수 있어?”
“할 줄도 모르면서 잘난 척은.”
발끈한 제이가 아이들을 향해 눈을 흘기며 노려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휴. 내가 저 바보들의 도발에 넘어갈 순 없지.”
그 말에 짜증난 아이들이 제이를 위협적으로 둘러쌌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잘난 척 더럽게 하네.”
“재수 없어.”
“야야, 그냥 밟아!”
위험을 느낀 제이가 도망가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 여기저기서 시작된 주먹질과 발길질을 피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결국 곤혹을 치르는 제이였다.
황급히 달려온 수업 감독관들이 가해자 집단(?)을 몰아내고 맨 밑에 깔려있는 아이를 봤을 땐 이미 아이의 옷과 얼굴이 만신창이었다.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 가르시아가 황급히 달려와 제이에게 회복주문을 걸었다. 잠시 뒤 깨어난 제이에게 가르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니?”
“네.”
“대체 뭐라고 했기에 갑자기 이 난리가 난 거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괜찮다며 선생님한테 말해보라는데도 누더기로 변해 버린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추스르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제이였다.

흔히 아이들은 순수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경험이 없어 거짓말이 서툴고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데 솔직할 뿐 미워하고 공격하는 데는 오히려 어른보다 한 수 위인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어디까지가 합법이고 어디까지가 정도에서 벗어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기분 내킬 때까지 혹은 옆에서 누군가 말려줄 때까지 상대를 공격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이곳에 모인 아이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고귀한 귀족의 자녀로 자라왔다. 너나할 것 없이 잘난 맛에 살아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아이들인 것이다.
평범한 집단에서도 특출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시기와 질투를 받기 마련인데 하물며 자존심 강한 아이들이 모여 있는 이 집단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제이는 공격의 대상이 될 소지가 다분했다.
우선, 동기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나서기 싫어한다거나 어쩌면 부끄럼이 많은 성격 탓일 수도 있지만 다른 아이들이 볼 땐 재능 좋은 놈이 평범한 자신들과 어울리기 꺼려하는 것처럼 오해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이의 재능이 문제였다. 자신들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 되는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현해 버리니 이건 보통 재수 없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차니도 제이만큼 재능이 좋았지만 또래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있었기에 되레 아이들은 재능 좋고 성격까지 좋은 차니를 따르면 따랐지 공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아이들의 최대관심사는 ‘그래서 우리 기수에서 최고는 누구냐?’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