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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



토룡쟁천 1권(1화)
서장 신목원(神木園)(1)


신목원(神木園)은 탑극립마간 사막의 서쪽 끝으로, 비단길 중 천산북로의 입구에 위치한 고창이란 고대 유적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사방으로 이십여 리에 걸친 커다란 녹원이 있고, 그 북쪽을 접해서 천산이 병풍처럼 막아서 있으며, 멀리 남향으로 눈 덮인 곤륜산이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
신목원 내부는 호두나무가 지천을 이루고 있었다.
목련 꽃송이처럼 덩이진 진초록 호두나무 꽃들이 삐죽빼죽 키 재기를 하는 회백색 숲에는 분홍 익모초 꽃이 만발해 있고, 그 뒤로는 푸른 초원이 넓은 구릉을 감싸고 있어 포근한 서정을 선사하고 있었다.

신목원은 거주 인구만 십만 명이 넘는다. 수백 개에 이르는 각종 주루, 기루, 포목점 등이 중앙 대로의 양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천산북로를 빈번하게 드나드는 수많은 상인들로 붐비는 곳이다.
신목원은 토박이 거주민과 비슷한 숫자의 외부인이 체류를 하면서, 상업이 발달한 성읍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신목원의 주민은 세 종류의 토박이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파사족(波斯族), 한족(漢族), 그리고 흉노계와 섞인 고려족(高麗族)이었다.
그 신목원에는 중원에서는 신목령(神木令)으로 널리 알려진 새외 신비세력이 있었다.
신목령은 중원에는 하나의 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감(甘), 장(張), 마(馬)씨 등 신목삼가가 신목원과 그 주변 수백 리에 이르는 녹원 마을들을 지배하고 있었고, 십 년마다 한 번씩 세 가문 간의 비무를 통해 지배 가문을 결정하는 전통을 수백 년간 이어 오고 있었다.
세 가문 중 감가는 파사족, 장가는 한족의 후예이며, 마가는 고려족이었다.
신목원의 주민들은 오랜 세월 같은 지역에서 혼맥을 잇다 보니 서로 용모가 구별이 안될 만큼 섞였다. 하지만 세 가문의 직계후손은 과거의 혈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감가는 덩치가 크고 엷은 푸른 눈을 하고 있었고, 장가는 양자강 근방 출신으로 눈이 크고 검으며 덩치가 왜소하면서 호리호리한 것이 특징이었으며, 고구려 기마민족의 후손인 마가는 황갈색 눈에 눈이 날카롭고 키가 후리후리해서, 외견상 구별이 된다.
더욱이 그들의 생활상도 다르다. 사막 기후에 맞추다 보니 생활상이 비슷해지긴 했지만, 가장 뚜렷한 차이로 감가는 방마다 융단을 깔고 지내고, 장가는 목조 집에 침대 생활을 하는데, 마가는 주로 흙벽돌로 만든 집의 온돌방에 기거한다.
이 때문에 신목원의 정족(鼎足)을 이루는 세 가문은 전통적으로 섞이지 못하고 서로 항쟁하는 역사를 연면히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 마씨 가문은 이런저런 사유로 두 가문에 비해서 세력이 몰락에 가까울 만큼 약화되어 유명무실한 상태로 십여 년을 이어 왔다.
두 개의 가문이 수십 개의 주루나 기루, 철장, 마장, 도박장 등 상점을 소유해서 실질적으로도 신목원의 돈줄까지 잡고 있는 것과 달리, 마가는 외곽 지역인 초지로 밀려나 소나 양을 키우면서 근근이 지탱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오늘도 신목원에는 황혼이 내렸다. 신목원을 에워싼 갈대 사이로 숲을 이룬 노란색 호양목(胡楊木) 잎사귀들이 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를 맞아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곧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빛으로 치장한 사막은 노란 빛으로 엷어지면서 천천히 검붉은 땅거미로 뒤덮였다.
신목원 북쪽 천산 구릉 지역의 초지에 번듯한 건물들이 여러 채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마가제일장이었다.
둘레가 백여 장에 이르는 담장 너머, 호두나무숲이 우거져 있는 숲 속에 흙벽돌로 만들어진 조그만 건물이 있었다.
양쪽으로 두 개의 창이 있는 오두막 앞에, 듬성듬성 풀밭이 있는 작은 마당의 넓적한 바위 위에 몸이 마른 아이가 양손으로 턱을 괸 채 땅거미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후우,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많이 보아 열서너 살쯤 된 아이의 가녀린 음성이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제대로 먹지 못해 바싹 마른 몸매에, 몸에 걸친 허름한 옷도 퇴색한 황토색이라 아이의 곤궁함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보잘것없는 아이의 생김새 중에 유난히 두드러진 것은 밤하늘의 별빛이 담긴 듯한 초롱초롱한 눈이었다.
더욱이 관자놀이로 뻗친 인상적인 검미와 한일자로 꾹 다물린 입술에는 쉽게 굴하지 않는 고집이 배여 있었다. 다만, 아이의 왼뺨부터 입술까지 고랑처럼 깊이 파인 서너 치 길이의 흉터가 아이의 어린 인생이 그리 녹녹치는 않았구나, 하는 추측을 안겨 준다.
사사삭!
아이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마당을 둘러싼 호두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면서 나타난 노인이 있었다.
검은 야행복에 비쩍 마른 체구의 노인은 키가 작았는데, 주름이 가득한 얼굴과 축 처진 눈꼬리에는 심술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다. 겉으로 보기에 칠십 전후의 노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이를 주시했다.
‘이상한걸? 마가 사람들은 모두 저쪽 건물 속에 기거하는데, 멀리 떨어진 숲 속에 작은 오두막이 있다니.’
노인은 혹시나 하고 그 자리에서 눈만 팽그르르 돌렸다.
‘아무도 없어. 저 녀석이 혼자서 오두막에 살지는 않을 것이고…….’
노인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열심히 돌아보면서 아이에게 다가갔다.
‘음? 누구지?’
아이가 자신의 앞에 우뚝 선 노인을 쳐다보면서 어색하게 몸을 움직였다.
‘척 보니 무공은 전혀 연성하지 않은 것 같고…….’
노인은 아이의 얼굴을 살피다가 빠르게 입을 놀렸다.
“야, 너 마가장 사람이 맞느냐?”
“…….”
아이는 눈을 더욱 크게 뜰 뿐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너 혹시 벙어리냐? 인석아! 어른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할아버지는 누구시죠?”
“오호라. 벙어리는 아니구나?”
노인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아이를 두루 살폈다. 목소리는 금세 땅바닥으로 꺼질 듯했지만, 의외로 또렷하다.
그러나 노인은 아이에게 향하는 관심을 바로 거두어들였다.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마지막으로 한탕 뛰고 도적질을 그만둘 생각이라 한시가 급했다.
비록 몰락해 가는 집안이지만 쉽게 도둑질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금물이었다. 아이에 대한 관심은 접었지만, 녀석이 왜 외떨어진 집에서 혼자 사는지 궁금했다.
“인마, 그건 그렇고 네 이름이 뭐냐?”
“……할아버지는 이름이 뭐죠?”
“인석아! 내가 먼저 물었으니…….”
“아뇨. 아무리 제가 아이라도 지킬 건 지키셔야죠. 남의 것만 뺏어 먹으면 그건 날도둑밖에 안 돼요.”
“나, 날도둑? 하, 요놈 봐라?”
노인은 어이가 없었지만, 아이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애가 처음의 나약한 모습과는 달리 당찬 구석이 있었다.
“나, 난…… 음…… 무명자(無名子)라고 한다. 그래, 네 이름은 뭐냐?”
“난 마초라고 해요.”
마초란 말의 여물이 아니던가.
“마초(馬草)? 쩝. 그것도 이름이라고. 인마, 거짓말하지 마! 어느 부모가 제 자식 이름을 그리 지어 주겠냐?”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무리 별호래도 무명자라고 지을 리가 있겠어요?”
“하, 요놈 봐라?”
노인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이가 이번엔 영악하게 보인다.
“어른이 되면 남에게 이름도 숨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게다. 알겠냐?”
‘쩝. 내 이름이 도귀(盜鬼) 주걸(朱傑)이라고 하면 지옥 끝까지 쫓아올 놈들이 부지기순데, 어떻게 내 이름을 밝힐 수 있겠냐? 더욱이 그 자식한테 걸리면 곱게 죽지도 못하지.’
누군가의 흉광을 떠올린 노인은 부지불식간에 몸서리를 쳤다.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노인은 애초와 달리 쉽사리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난 이름을 속인 게 아니어요. 난 말구유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렇게 불려요. 마가장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대면 누구나 다 알아요.”
“그래? 조, 좋다. 그러면 마가장의 사람들은 하인이든, 식객이든 전부 전각 가까이에 살고 있는데, 너만 여기서 사는 이유가 뭐냐?”
주걸이 진짜 궁금한 점이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요.”
‘인석이?’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이 아닌가.
아이는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입을 열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놓고는 시무룩하게 눈을 허공으로 돌린다.
어느새 컴컴해진 하늘에는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인석아, 다음에 보자.”
아이와 얘기해 봤자 별것이 없다고 생각한 주걸이 빠르게 몸을 날렸다.
노인이 몸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가장의 장주인 마중인 등 몇몇 수뇌부가 경신술을 펼치는 것과 필적할 만큼 노인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가벼웠다.

사사삭!
주걸의 신형은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전각 사이를 돌고 있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재물이나 무공비급 같은 큰돈 되는 물건이다.
소림, 무당 같은 대규모 문파에서는 장경각 같은 곳에 수만 종의 잡다한 서적을 비치해서 제자들이 다방면의 지식을 쌓도록 배려한다. 거기서 가끔은 실전된 무공비급이 발견되는 일도 있다지만, 마가장에는 장경각 같은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장주의 처소라든지 비밀 장소를 찾아야 했지만, 몸을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욱신거리는 것이 빨리 한 건을 올려야 한다.
‘그래! 마가장에는 무고(武庫)가 있으니 거기서 그럴듯한 걸 찾아보자. 혹시 아냐? 거기서 상고의 명검이 발견될지.’
주걸은 자신의 생각이 만족스러웠다.
간장이나 막사 같은 전설의 명검은 아니라도 창고 한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잠자고 있는 명검이 없으란 법도 없다.
그럴 만큼 마가장은 누대를 이어 온 신목원의 대표 가문이 아니던가.
백 년 전에는 신목령을 가지고 무림의 풍파를 일으켰던 위대한 가문이 마가장인 것이다.
‘뭔가 돈 되는 게 있을 거야.’
주걸은 확신을 가지고 마가장의 무고로 발길을 옮겼다.
전각 사이를 바람처럼 빠져나온 주걸이 전각의 남쪽 백여 장 아래에 있는 창고 같은 건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양목 고사목들 가운데에 초라하게 서 있는 창고는 의외로 컸다.
거의 버려진 창고인지 외벽에 금이 가고, 기와지붕 한쪽도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창고의 입구에는 두 사람의 경비무사가 자리에 걸터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저 자식들이 경비 서는 흉내만 내고 있구나.’
주걸은 얄팍한 입술에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요처를 경비하는 무사들이라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정광이 어른거리는 눈빛으로 사위를 쓸어 봐야 정상이다.
그런데 사십 대로 보이는 퇴물 무사 두 놈은 아예 바닥에 마주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두 놈이 나누는 대화는, 과연 몰락한 집안의 무사답게 시시껄렁한 잡담을 주고받는다.
벌컥, 벌컥!
“진짜 술맛이 그만인걸. 혀끝에 착착 감기는 달착지근한 이 맛이란! 진짜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것이야.”
얼굴이 곰처럼 넓적한 무사가 감탄하자, 얼굴이 생쥐처럼 뾰족한 무사가 대뜸 술병을 흔들면서 말을 받았다.
얼굴이 곰 같은 무사는 원소(元宵)라 하고, 뾰족한 무사는 서구(徐九)라는 자로, 대대손손 마가장의 무사로 일 해 온 집안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반쯤 몰락한 마가장을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의리를 가지고 있는 게다.
“아 그야, 이 술은 내가 춘양루(春陽樓)에서 애지중지하던 술을 빼앗다시피 가져온 거 아닌가. 이거 토룡주(土龍酒)야.”
“토, 토룡주라고? 어찌 그리 귀한 술이 춘양루에 있단 말인가.”
익히 들어 본 술인지 원소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어엉? 토룡주라고?’
그들의 대화를 들은 주걸은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특히 토룡주라면 남자에겐 물개 저리 가라 할 만큼 정력제로 유명했다.
“그렇네. 토룡소에 살면서 정기적으로 토룡을 잡아 파는 괴인이 있다는구먼.”
신목원 안에는 당연히 토룡(지렁이)이 없다.
토룡이 사는 곳은 신목원에서 남쪽으로 십여 리쯤 떨어져 있는데, 지하 수로가 지렁이 떼처럼 얽힌 듯하다고 해서 토룡소(土龍沼)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토룡소의 늪에 지렁이가 산다는 소문이 있었다.
“허어. 토룡소는 미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나오지 못한다는 얘기도 있는데, 거기에 어찌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건가?”
“그러니 괴인이지. 하여간 그런 골치 아픈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마시자고.”
“그러세.”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걸쭉한 음담패설을 입에 담고 있을 때, 무명자는 창고의 반대편에서 땅굴을 파고 있었다.
‘흐흐. 전부 모래라 쑥쑥 잘도 파지는군.’
주걸은 금세 몸이 들어갈 만한 모래흙을 파고 창고 밑으로 들어갔다.
‘어유, 퀴퀴한 냄새가 지독하구먼.’
무고답게 잡다한 병기들이 창고 안에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수십 년간 손질은커녕 누가 한 번이라도 만져 보지도 않은 양 두꺼운 먼지가 그득히 쌓인 수천 자루에 이르는 병장기들.
그중에는 검과 도 같은 기본적인 병기 외에 창, 곤(몽둥이), 편(채찍), 순(방패)뿐 아니라 철선(부채) 등 다양한 병장기 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제에기, 이건 손대기도 어렵군.’
괜히 손을 대서 쓸 만한 병기를 고르다 산처럼 쌓인 병기들이 와르르 무너지면 밖에서도 안에 사람이 잠입했다는 것을 눈치챌 우려가 있었다.
실망한 무명자가 어디 떨어진 병기가 없나 눈에 불을 켜고 한 자나 쌓인 먼지를 발로 툭툭 차면서 십여 장 너비의 창고 안을 샅샅이 뒤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