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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2화)
서장 신목원(神木園)(2)


“지랄. 술을 마시면 다 좋은데 금세 오줌이 마렵거든.”
앞에 앉은 덩치 큰 원소가 알딸딸하게 취한 눈으로 일어선 서구를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 참, 덩치가 작으니 오줌보도 작다니까?’
“딸꾹! 금방 쉬하고 올 테니 혼자 다 마시면 안 돼?”
“아, 그러세.”
선선히 대답하면서도 원소가 술병을 흔들어 보았다.
“제길, 겨우 쥐새끼 오줌만큼 남았군.”
서구가 뒤로 돌아 창고 뒤편으로 가는 동안, 원소가 술병을 기울여 냅다 마셔 버렸다.
원래 토룡주는 죽엽청은 저리 가라 할 만큼 센 술이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뱃속에 털어 넣은 원소가 머리를 지면에 박아 넣고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때, 서구는 서둘러 허리띠를 풀러 물건을 꺼내 놓고 있었다. 번데기 같은 조그만 잠지가 새끼손가락처럼 꼼짝거리면서 분비물을 쏟아부었다.
쏴아아!
그 조그만 잠지에서 오줌이 쏟아져 나오며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허! 시원하다!”
잠지를 몇 번 툭툭 쳐서 고의에 쑤셔 넣던 서구는 그제야 술이 조금 깨는 걸 느꼈다. 술이 깨니 안 보이던 것이 눈앞에 와락 닥쳐온다.
‘어라? 이거 누가 이렇게 파 놨어?’
서구가 굴속을 들여다보려고 하다가 쌓인 모래더미를 밟았다. 그리고 그만 자기가 싼 오줌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어이쿠!”

‘엉? 이게 무슨 소리냐?’
주걸은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면서 내려앉는 것 같았다. 비명 소리가 들린 곳이 바로 자신이 땅굴을 판 데가 아닌가. 놈이 땅굴을 발견하고 놀라 소리쳤다면, 마가장 무사들이 순식간에 달려올 것은 뻔했다.
‘하, 이것 참, 쓸 만한 건 하나도 못 건졌는데…….’
아쉽지만 미련을 가질 것도 없다. 아무리 몰락한 집안이라지만, 무공이라고는 경신술이나 지둔법만 하는 자신과 마가장 무사들이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주걸이 서둘러 발을 옮기다 산처럼 쌓인 병기 더미를 툭 건드리고 말았다.
‘아뿔싸!’
주걸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땅굴이 발견되었으니 창고 밖에서는 안에 누가 침입했나, 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지 몰랐다. 그런 와중에 무거운 병기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금속성을 낸다면?
붕!
두 개다!
팔꿈치에 걸려 머리 양쪽으로 떠오른 두 개의 병기.
주걸이 전력을 다해서 머리 위로 튀어 오른 것들을 잡아챘다.
‘휴우…….’
간신히 두 개의 병기를 잡은 주걸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잡힌 것 중에 하나는 녹이 팍팍 쓴 삼 척 길이의 칼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루뭉술하게 끝이 뭉개진 세 개의 살이 있는 철부채였다.
철부채의 속살은 시커멓게 변색돼서 원래 그려진 문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에이! 별 거지 같은 것들이군. 이것도 병기라고.’
하필 손에 걸린 것이 아예 푹푹 썩는 내를 풍길 것 같은 녹슨 병기라니!
주걸은 잡은 병기들을 버리려고 하다가 아차! 했다.

‘제기랄! 도대체 훔쳐 갈 것이 뭐가 있다고 도둑놈이 기어 들어와?’
서구는 미칠 지경이었다. 술도 덜 깨어서 휘청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기어서 땅굴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크으. 미치겠군. 정말 푹푹 썩어 가는 냄새밖에 없어.’
서구가 손으로 코를 막고 머리를 뒤흔들었을 때,
빠각!
주걸이 철부채로 서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끄아아악!”
‘엉?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잠에 빠졌던 원소의 귀에 들린 소리였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깐, 원소는 그 비명 소리가 부랄 친구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타악!
원소는 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서구가 소피를 보러 갔던 창고의 뒤로 달려가고 있었다.
휘딱!
그가 땅굴 곁에 도착한 순간, 시커먼 물체가 그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도, 도둑이야!”


1장 묘한 동거(1)


휘휘휙!
전각 쪽에서 몇 개의 인형이 떠서 빠르게 날아왔다.
터터턱!
그중 세 개의 인영이 원소의 앞에 도달한 것은 겨우 촌각의 시간.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모두 마가의 정통 복식인 노란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으으음…….”
세 인형의 가운데. 둥근 얼굴에 갸름한 눈을 한 후덕하게 생긴 중년인이 자신의 앞에 부복한 원소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마가장주 마중인(馬仲人)이었다.
원소가 급히 내공으로 취기(醉氣)를 감추었지만, 주향마저 감추지는 못했다.
그건 원소뿐만이 아니다.
창고 뒤로 돌아갔던 한 사람이 뒤통수가 함몰된 채 정신을 잃은 서구의 멱살을 잡아끌고 온 것이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땅굴 속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원소가 주절주절 자신이 겪은 전말을 얘기했지만, 그가 본 것은 인영으로 보이는 물체뿐,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놈! 아무리 한직이라고 해도 술을 처먹고 근무를 서다니! 내 네놈을 평생 뇌옥에 가두어 빛을 보지 못하게 하리라!”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을 한 마가장의 대장로 정대수(鄭大手)의 호통이었다. 그의 솥처럼 커다란 손이 당장이라도 물고를 낼 듯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아니오. 다행히 죽은 사람들은 없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오.”
마가장주 마중인이 대장로 정대수를 만류하면서 좌우로 손짓을 했다.
“침입자는 한 놈이라고 했다. 그자가 한낱 길을 잘못 든 좀도둑인지, 아니면 본 마가장의 허실을 탐지하려고 들어온 첩자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동원할 수 있는 식솔은 모두 동원해서 침입자의 뒤를 쫓아라!”
마중인의 지시에 마가장 수비대주 마재선이 서둘러 자리를 떴다.
뎅뎅뎅!
곧바로 수십 명의 노란 인영들이 마가장의 사방으로 흩어져 천라지망을 형성했다. 몰락해 가는 가문이라지만, 아직도 그들의 움직임은 민활한 중에 절제가 배어 있었다.
정대수는 침입자 추적에 나서는 무사들을 보다가 이내 얼굴이 굳었다.
마중인이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신목원 삼대가문 중 마가가 몰락한 것은 삼십 년 전, 현 장주의 바로 윗대인 전 장주의 급작스러운 병사와 가문의 후계자로 각광받던 장남의 객사가 기인한 바가 컸다.
이에 차남인 마중인이 스물다섯의 나이로 가문을 이어받았지만, 그는 워낙 부드러운 성정에 무골호인이라 애초부터 피와 살이 튀는 무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십 년 전에 있었던 삼가쟁투(三家爭鬪)에서 참패를 당하여 가문의 몰락을 부추긴 것이다.
며칠 후에 감가, 장가, 마가 등 세 가문의 후계자 세 사람이 중원 진출을 놓고 승부를 가리게 되어 있어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마당에 침입자라니.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정대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가문의 흥망이 걸린 작금에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있었으니, 이는 불길한 징조일지도 몰랐다.

‘가, 가만, 쫓겨서 마가장을 벗어나기보다는…….’
막 마가장을 둘러싼 숲의 경계를 벗어나려던 주걸은 숲 속의 오두막 지붕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 지금껏 머물던 여관으로 돌아간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도 모른다.
등하불명이라고 오히려 마가장에 숨어 있다가 경계가 가라앉으면 그때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두리번거리면서 오두막에 다가간 주걸은 집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마초라고 밝힌 아이는 잠이 들었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삐이걱!
주걸은 평소의 습관처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헉!’
그러는 순간, 주걸은 경악할 뻔했다. 어둠 속에 타오르는 눈! 어둠에 눈이 조금 익으니 작은 체구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주걸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걸은 이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 고놈 참. 아직도 자지 않고 뭐하냐?”
“할아버지 같으면 바깥이 소란스러운데 잠이 오겠어요?”
“어엉? 그건 맞는 얘기다만. 아니다. 맞는 얘기가 아닌데?”
주걸은 금방 말을 고쳤다. 소란스럽다니! 무고에서 한 놈이 소리를 질렀다지만, 이곳까지는 물경 수백 장이 넘는 거리다.
일류무사의 청력이라면 모르지만, 무공도 모르는 아이가 어찌 그 소리를 들었을까?
더욱이 마가장 무사들의 움직임은 은밀해서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세찬 바람에 갈대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주걸이 새삼 아이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대뜸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고 보면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보자니 아이의 뺨에 난 얼굴의 흉터가 유난히 도드라진다.
장난이 심할 나이에 보통 얼굴을 떠날 새가 없는 생채기는 절대 아니다.
“아, 아파요.”
아이가 이번엔 아이답게 비명을 흘리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리 봐도 아닌데…… 너 어떻게 소리를 들었느냐?”
“소리라뇨? 난 그냥 왠지 주변이 어수선하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입니다. 신경이 날카로운 날에는 잠이 오지 않거든요.”
“아항!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잠이 안 오지.”
주걸이 의당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은 바깥의 수선스러운 움직임을 느꼈다는 거다.
“자식이 감각이 놀랍도록 예민한 모양인걸…….”
주걸은 픽 웃어넘겼다. 괜한 아이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주걸이 방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최소한 며칠간은 아이의 방에서 신세를 져야 할 터다. 그러나 눈을 감았어도 아이가 힐끔거리는 눈초리를 느낄 정도로 그의 감각도 예민해져 있었다.
마가장 무사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지 모른다. 항상 만일의 사태에 대한 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은 무림에서 밥 벌어 먹고사는 데 기본이었다.
그러나 오두막 바깥에서의 움직임은 멀어지고, 주변에 얼쩡거리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주걸은 잠 속에 빠져들었다.
주걸이 가볍게 코를 골고 있을 때, 아이는 생경한 느낌 속에 마음이 포근하게 가라앉았다.
어머니와 사별한 것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이다. 아버지는 가끔 먼발치에서 보긴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아니라 주인님일 뿐이다.
때문에 아버지라는 사람과 한 번도 같은 방에서 잠을 자 보지 못한 아이에게 주걸의 코고는 소리는 어느덧 정다운 속삭임으로 아이의 마음에 젖어들고 있었다.

며칠 후, 팔월 대보름날이 왔다.
신목원의 남쪽 끝에 붙어 있는 구릉 사이에는 수만 평의 평평한 지대가 있다.
그곳은 바로 만장평(萬丈坪)이라고 불리는데, 지금 거의 수천 명의 군중이 사방 오육 장 크기의 석대를 에워싸고 열광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그 환성이 하늘이 무너질 듯 커진 것은 금방이었다.
무려 백 년, 마가장이 신목원을 대표해서 중원에 출두한 지 백 년 만에 감가천하장(甘家天下莊)이 무림에 출두하게 된 것이다.
오늘의 승리자인 감가천하장의 대공자 감대형(甘大兄)의 준수한 얼굴 위로 중천에 떠오른 태양의 광휘가 빛나고 있었다. 그가 짚고 선 감가의 가전지보 태양신검이 오늘따라 찬란한 빛무리를 토하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그 아래 단하에는 그에게 승자의 자리를 선사한 마가제일장의 대공자 마조린(馬朝璘)이 허무한 눈빛으로 하염없이 감대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겨우 삼 초!
마조린은 간신히 이 초를 견디다가 삼 초 만에 칼을 떨구고 말았다.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지만, 마조린은 손에서 고통을 느끼기보다는 심장이 갈가리 찢어발기는 아픔에 신음했다.
마조린이 칼을 떨구자, 공격을 멈춘 감대형의 벌레를 보듯 비웃음이 담긴 눈초리는 마조린의 자존심을 모두 앗아 가 버렸다.
가문의 열망을 등에 업고 감연히 감대형과 맞선 마조린이 땅바닥에 주저앉는 순간, 간신히 버티던 마가의 주춧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