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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3화)
1장 묘한 동거(2)


승부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비룡장가장(飛龍張家莊)은 기권하고, 십 년 전의 삼 대 가주쟁패에서 감가에 참패를 당한 마가에서 절치부심 설욕을 노렸지만, 그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일천 년 감가천하장의 역사상 가장 걸출한 인재라는 감대형은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천하를 질타할 영웅의 재목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천 년 기재였다.
나이 서른, 바야흐로 천하에 그의 시대가 활짝 열려 신목원을 만 년 반석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것이 신목원, 좁게는 감가천하장의 오래된 염원이며 믿음이었다.
퍼퍼펑!
신목원은 대보름 밤을 맞아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축원하는 폭죽놀이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승부에서 비참하게 패배한 마가제일장의 분위기는 초상집을 방불케 했다.
일찍 집안의 모든 등불이 꺼지고, 마가장은 심연의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작은 호롱불이 켜진 숲 속의 오두막집에서 주걸과 마초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된장국과 밥을 올린 초라한 밥상을 앞에 놓고 묵묵히 숟가락을 놀려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유. 이 할아버지는 아직도 떠날 줄을 모르네?’
마초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맞은편 창가 옆에 앉은 주걸을 힐끔거렸다.
집안의 분위기는 사실 아이하고 상관이 없다. 어차피 마가에서 버려진 신세라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이 아니던가.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던 마가의 무사들은 오늘 밤에는 숙소에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전혀 무감각한 것이다.
‘가만있자. 이거 어떡한다?’
주걸은 아이의 가시 같은 눈길을 느끼면서도 밥알의 숫자만 세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식사 시간은 늘어만 갔다.
‘요놈이 마가장주와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 이거지?’
마당을 벗어날 줄 모르는 아이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아이가 피식 웃으면서 한 말을 아직도 곱씹고 있는 거다.
실은 오늘이 아니라도 주걸이 마가장을 벗어날 기회는 많았다.
그런데 하루, 이틀 함께 있다 보니 왠지 아이가 남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아이는 모르지만, 주걸은 지금도 조손이 마주 앉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평생 홀아비로 살아온 그가 어디 아이와 함께 숙식할 일이나 있었을까.
‘쯧. 나이를 먹으니, 별 시답잖은 감상이 꼬리를 무는군.’
나이 육십, 이젠 도둑질로는 볼 장 다 본 나이다.
도둑질을 할 때마다 온몸이 쑤시는 것은 기본이고, 수년 전 높은 담장을 넘다가 허리가 삐끗한 것이 도무지 낫지 않고 고질병이 된 지 오래였다.
언젠가는 중원의 대도(大盜)를 꿈꾸었지만, 이젠 안락한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일견 손쉬운 마가장 털이를 끝으로 도계(盜界)에서 은퇴하려고 했더니, 이처럼 발목을 잡힌 거다.
‘에유. 이게 뭐야? 녹이 팍팍 슨 칼하고 부채밖에 건진 게 없잖아?’
주걸은 먹다 말고 방구석에 던져 놓은 칼과 철선에 눈길을 돌렸다.
‘저게 무슨 계륵도 아니고…… 제기랄…….’
계륵(닭의 갈비)이라도 사실 먹을 살점이 있고, 뼈를 푹 삶으면 감칠맛이 나는 국물뿐 아니라 씹어 먹으면 고소한 맛이 우러나온다.
그런데 지나가는 개새끼도 눈길 한 번 안 줄 만큼 팍팍 썩은 칼과 부채를 보자니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며칠 후 아침, 종달새가 호두나무 가지 사이에서 지지배배 울어 대는 별나게 청명한 아침이었다. 건조한 공기로 숨이 턱턱 막히는 마가장에서 오랜만에 보는 상쾌한 날씨였다.
지난밤에 이슬비가 뿌렸는지 마당을 띄엄띄엄 메운 수풀에 맺힌 이슬방울들이 햇빛에 부딪쳐 아롱거리는 보기 드문 날.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그건 마당 중간쯤의 넓적한 바위 위에 걸터앉은 주걸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숲 속을 헤치는 소리가 어쩐지 거칠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성큼 마당으로 몸을 내민 키 큰 청년이 있었다.
나이는 이십 대 중후반가량. 눈이 날카롭긴 하지만 알맞게 살이 쪄서 고생 한 번 안 해 본 귀공자 같은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술에 절은 그의 모습은 악귀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얼마나 술을 퍼 마신 건지 술독에 빠졌다 기어 나온 듯 후줄근한 옷에서 지독한 주취가 코끝을 뭉갤 것처럼 풍기는 거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그를 보자마자 마초가 공손하게 포권을 하면서 인사했다. 그러면서 슬쩍 곁눈질을 하니, 어느새 사라진 건지 주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끼, 대공자라고 잘도 씨부리는구나. 날 봤으면 오체투지를 해도 모자랄 판에 머리만 까딱하고 말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오체투지란 윗사람에게 예를 표하는 게 아니라, 중죄를 지은 죄인이 하는 행위다.
“아? 네, 네. 잘못했어요.”
그러나 마초의 반응은 달랐다.
주걸은 오두막의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눈만 내밀어 그 모습을 보다가 눈을 의심했다.
그토록 영악하던 아이는 어디 가고, 아이는 오체투지를 하고 몸을 사시나무 떨 듯했다.
“새끼야! 난 네놈만 보면 이가 갈려. 미천한 종년 주제에 아버지에게 꼬리를 쳐서 호의호식하던 그년을 생각하면 너를 당장 때려죽이고 싶어.”
“요, 용서하세요…….”
아이가 바들바들 떨면서 두 손을 비비는 모습은 실로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래, 용서해 달라는 놈이 공짜로 숙식을 해결해? 이 지렁이 같은 새끼야!”
제 성질을 못 이긴 대공자 마조린이 엎드려 떨고 있는 마초의 몸을 발로 짓밟았다.
나이가 어려 빈약한 체구를 한 마초가 그의 모진 발길에 정신을 잃은 것은 금방이었다.
마초가 완전히 정신을 잃고 개구리처럼 뻗었을 때에야 마조린의 발길질이 끝났다.
혐오스러운 독사를 보듯 마초를 노려본 마조린이 그제야 퉤하고 침을 뱉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새끼! 내일 아침에도 일을 안 나갔으면 넌 그 자리에서 죽는 거야. 알겠어?”
꿈틀.
그의 말에 반응을 하듯 마초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마조린이 독살스러운 눈으로 한 번 더 마초를 노려보더니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러다 그만 베어진 나무의 그루터기를 밟고 넘어지고 말았다.
“에이, 씁!”
술이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마초를 마구 짓밟았으니 술이 깨어야 하는데, 오히려 술이 더 취한다.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마조린의 눈에 청명한 하늘이 담겼다.
“씁. 날씨는 지랄같이 좋구나.”
허공을 올려다보던 그의 눈이 간신히 정신을 차린 마초의 눈과 마주쳤다.
사실 불쌍한 놈이다. 겨우 나이 두 살에 어머니를 잃고 버려지다시피 홀로 커 온 아이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그와는 이복형제.
하지만 조강지처를 버리고 아양 떠는 여종과 눈이 맞은 부친이 연공을 소홀히 하다가 감가장주와의 일전에서 참패를 한 것이 아닌가.
마조린은 마가장의 몰락을 가져온 원흉의 자식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다음에 다시 놀고먹는 놈의 꼬락서니를 보면 죽여 버릴 것이다.
수년 전, 실수한 척하고 녀석의 얼굴에 단도를 집어 던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놈은 며칠 끙끙 앓더니 얼굴에 붕대를 감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나타났다. 그러고는 바보처럼 헤프게 웃던 놈의 얼굴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후 이래저래 바보 같은 놈에게 신경 쓰는 것이 한심스러워 손찌검을 하지 않은지도 몇 개월이 지난 것이다. 그건 신목삼가의 후계자 대전이 멀지 않은 때문이기도 했었다.
마조린이 숲 속으로 사라진 얼마 후, 마초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면서 손등으로 입술의 피를 훔쳤다.
“인마, 괜찮으냐?
마조린이 자취를 감춘 직후 부리나케 쫓아온 주걸이 안쓰러운 눈으로 마초의 몸을 세세히 살피는 것이었다.
“큭. 괜찮아요. 요즘은 뜸하더니 또 시작이네요.”
너저분한 옷과 드러난 피부는 흙으로 뒤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었지만,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휴우…… 다행이긴 하다만…… 근데, 너 인마. 사내자식이 배알이 있어야지 오체투지하란다고 납죽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냐?”
“훗. 소나기가 오면 처마 밑에 기어 들어가야 비를 덜 맞아요.”
“엉? 그거야…….”
주걸은 내심 감탄했다.
놈의 눈에는 그가 봐도 진득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만약 아이가 멍청하게 굴지 않고 똑똑한 체했다면 지금껏 살아 있을까?
“그래, 이젠 어떻게 하겠느냐. 그 녀석이 언제라도 너를 죽이려고 할 텐데 도망이라도 가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왜?”
“이 집은 제집입니다. 쫓아내도 다시 돌아올 텐데 왜 내 발로 도망쳐야 하나요?”
“하, 인석이 고집은? 인마, 집도 집구석 같아야 돌아오지…….”
“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이 있고, 그분의 무덤이 있어요. 마가장은 제 뿌리입니다. 뿌리 없는 부평초로 세상을 떠돌고 싶지 않아요.”
아이의 맹랑한 말이었다.
아이를 설득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치밀었지만, 주걸은 애써 그 생각을 억눌렀다.
‘인석아. 너도 더 자라면 알게 되겠지만, 세상이란 그리 단순한 곳이 아니란다.’
육십 년 세월. 주걸은 철이 들기도 전에 중원을 떠돌았고, 십여 년 전에 남궁세가를 털다가 놈들에게 들켜 추적을 받고 새외로 쫓겨 온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무리 정든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아도 언젠가는 떠나야 할 때가 온다. 아이는 언젠가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는 계속 계실 건가요?”
“그, 글쎄다. 그건 왜 묻느냐? 나하고 같이 있으니까 부담스럽냐?”
“하하, 아뇨. 뭐, 밥 한 그릇만 더 지으면 되는데 부담스러울 게 뭐 있겠어요?”
“헛허. 그런데 왜?”
아이가 피식 미소를 흘리더니 전각 방향을 가리킨다.
“가서 일할 게 없는지 알아봐야죠.”
“오? 그래, 그래…….”
주걸은 웬만하면 자신이 나서서 마조린을 묵사발 내놓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씨도 안 먹힌다는 현실을 안다.
경신술로 하자면 놈에게 질 이유가 없지만, 문제는 간단한 기본 무공만 익힌 자신과 마가제일장의 진전을 이었을 놈과 붙으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셈이 되리라.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직전의 어둠 속에서 아이는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 이불이 빠르게 젖혀지더니 아이가 작은 동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곁에 벗어 놓았던 겉옷을 걸치는 것이다.
벌써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주걸은 내심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어제만 해도 아이는 날이 밝은 후에야 일어났다.
오늘은 자신이 깨울까 하다가 녀석의 피로에 젖은 얼굴을 보고 망설이던 차였다. 그런데 아이는 알아서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날 해가 지고, 어둠이 밤을 몰고 올 때에야 아이는 돌아왔다.
아이는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고꾸라져 새된 신음을 흘린다.
“어엉? 너 어디 다쳤느냐?”
주걸이 한 걸음에 달려가 아이의 몸을 살폈다. 피가 얼룩덜룩한 옷은 함부로 찢기고, 몸에는 피멍울이 잔뜩 들어 있었다.
“어, 어느 놈이 너를 이렇게 못살게 굴었느냐? 당장 그놈이 누군지 대라. 내 그놈의 삭신을 부러뜨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주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길고 고달픈 인생길에 참는 데 익숙한 주걸이었지만, 아이의 비참한 몰골을 보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쉿! 할아버지, 목소리가 커요.”
“인석아! 목소리가 커서 온 세상이 다 들으면 어때. 내 그놈을 아예 병신 만들어 버릴 거야.”
“헷헤. 그러면 큰일 나요.”
“큰일이 나도 나한테 나는 거다. 그래, 또 마조린이란 놈이……?”
“사람이 아녀요.”
“사, 사람이 아니라면…… 혹, 요물이라도 날뛰는 게냐?”
“큭. 성질이 더러운 수말이 있어요.”
“수, 수말?”
“예. 마구간에서 일하는데, 말이 스무 마리가 넘어요. 그걸 하나씩 끌고 산책을 시켜야 해요. 근데 대공자님의 말은 주인이 아니면 말을 안 들어서…….”
“허어, 주인이 지랄 같으니 그 놈의 말도 지랄이구나.”
주걸은 설핏 생각에 잠겼다. 겨우 열두 살 어린아이가 덩치가 산만한 수말을 끄는 상상만 해도 위태롭기만 하다.
말 못하는 짐승도 만만한 사람은 용케 알아본다. 그러니 마조린이 가만있어도 아이는 몸 성할 날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