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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4화)
1장 묘한 동거(3)
“너 말이다…… 음…… 내공을 익혀 보련?”
“싫어요.”
일언지하의 거절이다. 아이가 무가로 유명한 마가장 사람이니 내공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저리도 거부반응을 보일 정도면 원래부터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체질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애써 한 결심이 초장부터 무너지는 것이다.
실망한 주걸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너, 혹, 혹시 말이다. 에…… 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인 거냐?”
“아뇨. 난 무공을 익히게 되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될 거예요.”
“그, 그야…….”
주걸은 말을 하다가 꿀꺽 입속으로 삼켰다.
내공에도 수준별로 잡다한 종류가 있고, 상승내공은 배우기도, 익히기도 어렵다. 아니, 웬만한 문파에서는 상승내공을 구경조차 못한다.
주걸이 익힌 삼류내공을 전수한다고 하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그러나 주걸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망설임이 길어지면 영악한 아이가 재까닥 눈치챌 것은 뻔했다.
“내가 전수할 내공은 대도무심공(大盜無心功)이라고 한다. 사실 나 역시 이 내공을 일 할도 못 익혔어. 그런데도 내 발길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빠르구나.”
경망스럽기까지 하던 노인이 사람이 바뀐 것처럼 묵직하게 말을 하자, 마초의 눈이 커졌다.
“대, 대도문의 무심공이라고요?”
“그래. 짧게는 대도무문(大盜無問)이라고 하지.”
대도무문(大道無門)! 큰 길에는 문이 따로 없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그럴싸한가.
주걸은 사실 큰 도둑은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했지만, 아이는 그렇게 듣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에는 천지자연의 온갖 기운을 몸에 담고, 숨을 내쉴 때는 몸속의 모든 기운을 버리듯 하라.”
조용히 진언(眞言)을 외우는 주걸의 모습은 입정한 노승을 보는 것처럼 경건했다.
아이가 열심히 대도무문의 진언을 읊으며, 무아지경 속에 들려고 끙끙대는 모습은 참으로 비장하였다.
실은 이 심법이란 것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진기토납술이었다.
진기토납술은 내공의 기초다. 내공이 집이라면 진기토납은 집을 세울 집터라고 볼 수 있다. 집터란 넓고 단단하게 지면을 다질수록 기초가 든든한 큰 집을 지울 수 있다는 이치와 통한다.
최소한 진기토납술을 열심히 하다 보면 몸이 강건해져서 웬만한 질병에는 걸리지 않는다.
주걸은 훗날 아이가 인연이 닿아 상승내공을 접하게 될 때를 대비해서 정지 작업을 하는 심정으로 진기토납술을 전수한 것이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 구월이 후딱 다가왔다. 바로 이때가 신목원에 들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때다.
태양이 서산으로 뉘엿거리며 지는 시각, 마조린은 한가하게 걸음을 놀려 마구간으로 다가갔다.
그가 가는 길에는 여기저기 연무를 하거나 경비를 서는 무사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기도 한 것이 마조린이 감대형에게 맥없이 패한 후, 이백여 명에 가깝던 마가장의 무사들은 대부분 야밤 도주해서 겨우 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대로 남아 있는 것은 소나 양을 치는 하인들이었지만, 그들은 마가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쉽게 생업을 포기하기 힘들 따름이었다.
‘휴우…… 이러다간 우리 마가는 무가에서 농가로 업종을 바꾸어야겠군.’
마조린은 오늘은 병석에 누운 부친을 문후하고 나온 터라 아직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처연한 눈빛을 하면서도 그의 눈길이 집요하게 향하는 곳이 있었다.
그의 눈이 불쾌감으로 물든 것은 그 직후였다.
‘놈을 도와주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그랬다. 마구간에는 원소와 서구가 말들을 끌어내어 산책을 시키고 있었다.
“어? 대공자님 나오셨습니까?”
눈치 빠른 서구가 왜소한 몸을 숙이면서 인사를 하자, 마조린의 험악한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내 분명 놈이 농땡이 치는 걸 감시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그 지렁이는 어디에 있고?”
“아? 예예. 마구간 뒤에서 대공자님의 말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뭐, 뭣이? 내 말을 훈련시킨다고?”
마조린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럴 리가 없다. 보기 드문 순종 한혈마다. 세상에 가짜나 잡종은 많아도 그처럼 순종 한혈마는 극히 드물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붉은 갈기와 무쇠처럼 단단한 근육이 용솟음치는 광경을 연상해 보라.
흔히 세상에 알려진 명마인 혈홍마(血紅馬)가 피처럼 붉은 털로 알려져 있지만, 한혈마의 털은 불이 타오르는 듯하다.
더욱이 피부마저 붉어 놈이 땀을 흘리면 흡사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한혈마라고 불리지만, 그 성질 또한 포악해서 어릴 때부터 길러 온 주인이 아니면 다루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어찌?
“자, 자, 혈풍아. 그대로 천천히 걷다가 이 통나무를 타고 넘는 거야. 어어? 소리가 너무 커. 나비가 꽃잎에 내려앉듯이 부드럽게, 소리 없이, 알겠어?”
마조린은 어이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이를 물어서 집어 던지기도 하고, 앞발로 걷어차고, 뒷발로 깔아뭉개던 혈풍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것이다.
“됐어! 바로 그거야!”
마초가 손에 들고 있던 홍당무를 내미니, 혈풍이 푸르륵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면서 냉큼 받아먹는다.
그러고는 콧등을 아이의 어깨에 비비면서 아양을 떨지 않는가.
‘저놈이?’
마조린은 마초에게 화가 났는지, 아니면 애마 혈풍에게 화가 났는지 모를 심정으로 거칠게 다가갔다.
“어? 대공자님.”
그제야 마조린을 발견했는지 마초가 그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퍽!
그러나 마조린의 발이 정확하게 마초의 턱을 후려 찼다.
“아아악!”
마초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떼굴떼굴 굴렀다.
“이 지렁이 새끼! 네 맘대로 내 애마를 다뤄? 새끼! 한번 죽어 봐라!”
마조린은 가슴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열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파바바박!
마조린의 무자비한 발길이 이어짐에 따라 비명을 내뱉던 아이가 침묵했다. 지렁이처럼 꿈틀대던 몸은 젖은 빨랫줄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저, 저, 저?’
말을 부리던 손을 놓고 마구간 뒤를 흘끔거리던 서구와 원소가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속으로 안타까운 신음만 발했다.
두 사람은 마조린의 눈치를 보면서 감히 마초에게 접근할 엄두를 못 내었다.
마조린이 싸늘한 눈초리로 마초를 노려보면서 말을 씹어뱉었다.
“다시 한 번 엉뚱한 짓거리를 하는 게 내 눈에 걸리면…… 너는 죽어!”
마조린은 진짜 그럴 결심이었다.
놈은 아무리 짓밟아도 잡초처럼 일어난다. 놈이 자신에게 구타당해서 하구한 날 병치레를 하고 있으면 화가 덜 날 텐데, 놈은 다음 날이면 멀쩡하게 돌아다닌다.
마조린은 그게 싫었다. 놈의 눈을 보고 있으면 목덜미에 흉측한 벌레가 붙어 스멀대는 느낌 때문에 그게 진저리가 났다.
캬악, 퉤!
가래침을 그러모아 마초의 얼굴에 뱉은 마조린이 스적스적 멀어져 갔다.
‘오늘은 춘양루에서 앵앵과 질펀하게 놀아 봐야겠군.’
마조린은 금세 마초를 잊고, 그녀의 풍만한 육체를 떠올리며 입술에 괴괴한 침을 머금었다.
“괘, 괜찮으냐?”
원소가 급히 달려와 물었다.
그러나 물어보나마나 괜찮을 리가 있겠는가. 처음 턱을 정통으로 차였으니, 아이의 입안은 부러진 이빨로 엉망이 되어 있을 게다.
“입술이 조금 찢어졌을 뿐이에요.”
의외로 아이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아이의 곁에서 눈망울만 애처롭게 굴리고 있던 혈풍이 마초의 입술에서 흘린 핏물을 핥으면서 끙끙거렸다.
숲 속의 오두막집으로 돌아가는 마초의 발길은 후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끄응…… 진짜 어깨가 부서질 뻔했어.’
마조린은 정통으로 턱을 찼다고 생각하겠지만, 마초는 차이는 순간 얼굴을 비끼며 오른쪽 어깨를 들이밀었다. 마조린은 발끝에 걸리는 타격감으로 정확하게 턱을 갈겼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뿐이었다.
덕분에 입술이 터지고, 어깨뼈가 떨어질 것처럼 충격을 받아 어깨를 움직이긴 힘들지만,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마초가 숲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야! 너 이리 와!”
쨍쨍 울리는 음성과 더불어 마초와 또래의 아이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저 자식은?’
마초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간신히 참고 얼굴에 헤벌쭉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공자님께서 여긴 웬일로…….”
이공자 마쌍린(馬雙璘)이었다. 나이는 마초의 두 살 위인 열다섯. 마초에게는 대공자 마조린보다 더욱 더럽고, 껄끄러운 상대였다.
틈만 나면 독충이나 독사 같은 흉측한 독물들을 마초의 오두막 방 안에 풀어놓기도 하는 등 악질적인 성격을 가진 놈이었다.
그 성질 그대로 얼굴은 꼭 염소처럼 마르고 길었는데, 점을 콕 찍어 놓은 듯한 올챙이처럼 생긴 눈은 노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실로 급하고 야비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상인데, 그에 어울리지 않게 감색의 고급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새끼, 아직도 멍청한 건 여전하구나. 그건 그렇고…….”
마쌍린이 뒷짐을 풀면서 앞으로 내민 손에는 삼 척 길이의 목도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툭!
마쌍린이 목도 중 하나를 마초의 발 앞에 던졌다.
“내가 요즘 본가의 기본 도법인 비호도(飛虎刀)에 미쳐 있거든. 이걸 연마하다 보니 네가 떠오르더라? 그래서 난 무릎을 쳤어. 네가 아무리 천한 시비의 자식이래도 본 마가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틀림없잖아? 근데 넌 무공의 일초반식도 모른단 말이야. 그래서는 안 돼. 네 한쪽에 마가의 핏줄이 흐르는 한 무공을 전혀 모른다는 것은 본 마가를 이룩하신 선조님들에 대한 불경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로는 꽤나 마초를 생각해 주는 척하지만, 그건 마초를 골탕 먹이려는 놈의 장난질이 뻔했다.
그러나 마초는 그 말을 듣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아요. 반쪽만 마가지만, 나도 가끔 마가의 무공을 익히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뭐 하냐? 빨리 목도를 들고 자세를 갖추어라.”
마초가 어정쩡하게 목도를 쳐들자, 그 즉시 마쌍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야합! 맹호출림(猛虎出林)!”
마쌍린이 몸을 바짝 숙인 채로 목도를 내질렀다.
매우 단순한 일식. 그러면서도 그의 몸이 빠르게 마초의 앞에 접근해 있었다.
마쌍린의 노림은 마초의 옆구리.
마초가 그걸 깨닫고 몸을 비트는 순간, 푸욱 소리가 났다.
“끄웩!”
마초는 그 일격을 받자마자 속이 뒤틀리면서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마쌍린의 목도에서 발출된 기운이 마초의 창자를 꼬이게 만든 것이었다.
가벼운 한 수에 마쌍린은 거의 전 내공을 주입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이십 년에 이르는 내공이다.
마초의 옆구리에서는 핏물이 왈칵 튀어 오르고,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구토를 하고 있었지만, 마쌍린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얏! 호구난무(虎口亂舞)!”
마쌍린의 목도가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마초의 숙여진 뒤통수와 목덜미를 빠르게 후려쳤다.
“끄으으…….”
마초는 목덜미에 불이 나는 듯 엄청난 아픔에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정신이 아득한 것이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어쭈?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아?’
마쌍린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것은 진득한 살심이었다.
“지렁이 새끼, 죽엇!”
마쌍린의 도가 허공으로 높이 치켜 올랐다가 마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비호검법의 세 초식 중 마지막인 호조단천(虎爪斷天)이었다.
‘저, 저, 저런!’
숲 밖에서 나는 소리에 뒤늦게 나와 본 주걸은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허공을 날아 떨어지는 마초의 작은 몸이 크게 확대되면서 들어왔다.
‘으으으!’
주걸은 입술을 잘끈 깨물면서 신형을 날렸다.
“핫하하. 그 새끼, 꼴 보기 좋다. 꼭 송장개구리가 사지를 뻗고 퍼드러진 것 같구나. 음, 오늘은 이만할까?”
주걸이 미처 달려오기 전에 마쌍린이 낄낄 웃으면서 전각 쪽으로 걸어갔다.
가슴이 맺힌 것이 뻥 뚫린 것처럼 후련하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놈도 자식이라고 신경을 쓰는 부친의 눈치를 봐서 심하게 다루진 않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부친 마중인은 골수까지 치민 화기로 병석에 누워 있고, 형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주망태가 된다. 자연스레 마가장의 주인은 자신이 될 것이다.
그 기념으로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 같은 놈을 미리 해치우는 것이니, 이 얼마나 만족스런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