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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5화)
1장 묘한 동거(4)


마초는 사흘 내내 끙끙 앓았다. 주걸이 자신의 봇짐을 털털 털어서 상비약을 꺼내 바르고, 먹이고 했지만, 정신을 잃은 아이는 깨어날 줄 몰랐다.
‘으으. 내가 조금만 일찍 발견했어도…….’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었다. 주걸은 쫄쫄 굶으면서 그 사흘 내내 마초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했다.
마초의 증세는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했다. 얼굴이 열기로 뻘겋게 타오르다가 금세 얼음을 덧씌운 것처럼 푸르뎅뎅해진다.
그럴 때마다 주걸은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안타까움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사흘이 지나 나흘이 되는 아침, 어디선가 쪼로롱 직박구리 떼가 나뭇가지 사이를 나는 소리가 들렸다.
주걸은 그 새소리를 듣고는 천천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숲 속에 몇 그루밖에 없는 복숭아 나뭇가지 위에 자그마한 푸른 새들이 청아한 목청을 뽐내고 있었다.
“헛허허. 참으로 좋은 날씨에 멋진 노래로다.”
주걸은 조그맣게 소리를 내며 하염없이 직박구리 떼를 보았다. 저렇게 한가롭고, 자유롭게 세상을 떠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으으음…….”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에 정신을 차렸을까, 주걸은 마초의 신음 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바삐 걸음을 옮기려던 주걸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입을 크게 벌렸다. 마초가 일어나자마자 가부좌를 틀더니 눈을 꾹 감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대도무문을 익히려는 자세가 아닌가.
“어허…… 천생 무골이로다.”
깨어나자마자 진기토납술을 연마한다는 것은 정신을 잃은 내내 거기에 염두를 두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빨리 깨어난 것도 지난 한 달간 진기토납술을 꾸준히 연마한 효능일지도 몰랐다.
이렇듯 마초가 깨어난 즉시 대도무문을 연마하고 있을 때, 주걸은 방바닥에 뒹굴며 하얗게 센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었다.
아이에게 뭔가 무공을 가르쳐 다시는 그 염소 똥 같은 놈에게 당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듯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오정이 넘었지만, 주걸은 밥을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비록 쉰밥이지만 부엌 밥솥에 먹다 남은 밥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어찌 그럴 수가 있으랴. 배가 부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애써 식욕을 억제하면서 머리를 쥐어짰지만, 나오느니 꼬르륵대며 밥 달라는 소리와 피곤에 지친 하품 소리였다.
‘하아…… 그것참!’
그래도 젊어서는 약삭빠르다고 정평이 났었는데, 떠오르는 무공은 머리를 뒤죽박죽 어지럽히기 일쑤였다.
‘안 돼, 안 된다고!’
주걸은 수백 번이나 구경한 무림인들의 싸움에서 전개되던 잡다한 무공을 떠올리며 그들의 몸짓, 발짓을 재현하려고 무진 애를 다 썼다.
그러나 노인이 싸움 구경을 하면서 한 짓이라고는 와아! 하고 감탄사나 지르며 박수나 쳤을 뿐, 사실 똑똑히 본 초식은 아무것도 없었다.
‘별수 없다. 그 뭐냐, 만류귀종이라고. 뭐, 사실 도법이라고 해 봤자 찌르고, 베고, 휘두르는 세 가지밖에 더 있냐?’
게다가 내공 한 푼 없어도 한철의 기운을 받아 발힘만 기르면 절정 비슷한 경공도 펼칠 수 있지 않던가.

“끄으음…….”
마초가 대도무문에서 깨어난 것은 주걸의 배에서 천둥소리가 연이어 날 즈음이었다.
이미 깜깜한 밤, 호롱불이 조그맣게 반짝이는 방 안은 새로 지은 구수한 밥 냄새로 몸살을 나고 있었다.
‘제에기, 진짜 몸살 나겠군.’
주걸은 상 위에 차려진 밥과 양고기 구이를 보면서 꿀꺽 침을 삼켰다.


2장 입으로 싸우면 하늘인들 못 이기랴(1)


다음 날 새벽, 마초는 나흘 동안 굶주린 배에 마구 음식을 쑤셔 넣다 보니 속이 탈이 나 버렸다. 밤새도록 뒷간에 드나들면서 휑하니 눈알이 풀린 아이를 앉혀 놓고 주걸이 근엄하게 한마디 했다.
“네가 놈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내내 생각한 것이 있었다. 내가 너에게 전수할 무공은 천지종횡도라 하노라!”
‘처, 천지종횡도……?’
주걸이 말하는 삼재검법을 듣고 있자니, 마초의 눈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마쌍린이 펼친 비호도! 그의 동작이 일목요연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너 오늘부터 일을 나가면…….”
주걸이 방 한구석에 놓인 봇짐에서 쇠고리 네 개를 꺼냈다. 두 개는 크고, 두 개는 작다. 한동안 쇠고리를 쳐다보는 주걸의 눈에 아릿한 그리움이 감돌았다.
‘나에게도 사부가 있었지.’
중원에서 왔다는 기인. 아니, 기인이라기보다 사실 사기꾼에 가까웠지만, 주걸은 아직도 그를 기인이라고 여겼다.
주걸이 모든 수련을 마친 사십 년 전 그 어느 날, 소뿔에 받혀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았지만, 주걸은 아직도 그가 살아 있다고 믿었다. 아니, 나이 들어 죽었다면 우화등선했으리라.
아직도 그가 처음 네 개의 고리를 손목과 발목에 채워 주면서 한 얘기가 귓속에 쟁쟁거린다.

“발에 고리를 채운 것은 발힘을 기르기 위함이고, 손목에 채운 것은 재빠른 손놀림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생각해 봐라. 남의 품에서 잽싸게 물건을 꺼내어 도망치려면 그 두 가지가 기본이 아니겠냐?”

“이걸 끼고 다녀라.”
“이, 이게 뭐죠?”
“뭐긴 뭐냐? 한철로 만든 쇠고리지.”
“앗, 차거!”
마초는 주걸이 양 발목에 고리를 채우자마자 뼈골을 얼릴 듯한 냉기에 몸서리를 쳤다. 고리가 채인 곳에는 벌써 푸르뎅뎅한 자국까지 보이는 것이다.
“하, 할아버지!”
마초의 눈이 놀라 홉떴다. 잘못 동상에 걸리면 약도 없다고 했다.
“놀라지 마라. 설마 이 할애비가 너에게 몹쓸 짓을 하겠느냐.”
그러면서 주걸이 작은 고리를 마초의 양 팔목에 채웠다. 무겁기는 물론이지만, 너무 차가워서 미칠 것만 같다.
“아, 아니…… 할아버지, 이거는 왜?”
마초가 울상을 지으면서 항변하자, 주걸이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사부는 자신에게 소매치기 비법을 전수한다고 했지만, 그걸 그대로 아이에게 말하다간 산통 다 깬다.
주걸은 이미 아이에게 말할 얘기를 밤새도록 연구한 터였다.
“내가 천지종횡도를 익혀 강호를 행도하면서 느낀 게 많았어.”
“와아, 그럼 강호의 고수들과 많이도 싸웠겠네요? 물론 다 이겼겠지요?”
마초가 어린아이답게 눈을 바락 빛내며 주걸을 쳐다보았다.
아이의 관심이란 그가 강호 행도에서 느낀 고절한 깨달음보다는 승부의 결과였다.
노인의 눈알이 빠르게 돌아갔다. 싸워서 이겼다고 하자니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또 꾸며 내야 하고, 졌다고 하자니 대도문의 제자로서 아이의 확신과 자부심을 앗아 갈 터이다.
에라, 모르겠다. 같은 값이면 이겼다고 하자! 뭐,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허어험! 천지와 종횡이 한 가지로 조화로우니, 천지종횡도는 천하제일이로다!”
실로 호기에 가득한 주걸의 일갈이었다.
“와아아!”
아이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 댔다.
이렇게 해서 돈 안 드는 허풍이 시작되었는데, 그의 말은 듣느니 설상가상이요, 말하느니 침 튀기는 소리였다.
아이가 연신 튀는 침 세례를 간신히 피해 가며 ‘그래서요. 아, 그래서요?’를 연발하니,
주걸의 입은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서는 이젠 몸짓, 발짓을 총동원해서 절정무공의 오의를 일러주고 있었다.
“아, 그래서 이 할애비가 소림 무무 대사의 백보신권을 가볍게 대도무전보(大盜無錢步)의 보법으로 흘리고는 천지를 외치며 종횡으로 도를 긋지 않았겠느냐?”
주걸이 ‘천지!’를 강조하면서 십자로 손가락을 긋는 시늉을 하자, 마초가 큰소리로 따라 했다.
“천지! 종횡!”
“그런데 우리 대도문은 인명을 소중히 여기는지라, 무무란 자의 옷고름을 자르는 것으로 그쳤단다.”
아이가 아쉬운 듯 입을 쩍쩍 대자, 노인의 말은 더욱 고조되었다.
“너도 생각해 봐라. 무무 대사라면 무림 십대 고수 중 한 명인데, 그만해도 얼마나 부끄러웠겠느냐?”
“그야, 그렇지만…….”
마초가 여전히 아쉬워하자, 노인이 아이의 이마에 뚝 하고 통밤 한 알을 안겼다.
마초가 슬쩍 이마를 뒤로 물려 가볍게 피하니, 노인의 눈길이 매서워졌다.
‘헉!’
아이가 그의 눈알을 보고 이마를 앞으로 쑥 내밀며 눈을 꼭 감고 맞을 준비를 하니, 주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녀석, 할애비가 설마 눈앞에 있는 네 이마도 못 맞추겠느냐?”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마초가 쑥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재차 묻자, 노인의 눈길이 아릿하게 변했다.
또다시 화려했던 옛일을 더듬는 듯.
“무무가 침중한 눈길로 잘라진 옷고름을 여미더니, 반장을 하면서 그러더구나.”

“아미타불, 시주의 무공은 참으로 놀랍구려.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오. 허허, 소승은 지금껏 우물 안에서 개구리 울음소리나 흉내 내고 있었으니…… 아, 아…… 참으로 부끄러운지고…….”

“그러고는 쓸쓸하게 몸을 돌려 허위허위 걸어가는데, 이 사부도 그때는 마음이 참 안 좋더라……?”
“그럼, 면벽 구 년을 하러 갔겠네요?”
마초가 눈을 빛내며 아는 척했다.
“허허허! 맞다. 무무 대사가 그 후로 은퇴를 했다가 해탈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저, 할아버지. 근데,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없다는데…… 혹시 감가천하장의 감무혼장주와도 싸워 보셨나요?”
히익!
노인이 숨을 급히 들이키며 새어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붙잡았다.
감가천하장의 장주인 태양신군(太陽神君) 감무혼(甘武魂)은 신장 최고수로, 실질적으로 비단길을 지배하는 효웅이었다. 이제 아들 감대형을 중원으로 보내면서 그의 이름은 곧 하늘이 되었다.
“끄으음…….”
그러나 신음은 잠깐이요, 내친걸음이었다.
아이에게 자신은 신이었다. 아무리 크다 하나 신이 인간인 태양신군에게 어찌 꿀릴 수 있으랴! 아이에게 꿈을 키운다! 설령 그것이 개꿈이더라도 고통스런 길을 가는 아이에게 희망이 되리라.
“어헛헛!”
주걸이 헛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천! 지!”
노인이 한마디 꺼내자, 아이가 바로 뒤를 이었다.
“종! 횡!”
“아아하하하!”
“으으허허허!”
앳된 아이의 웃음소리와 노인의 새된 웃음소리가 한데 어울려 잠자는 공기를 깨웠다.

마초가 뒤뚱거리며 간신히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부터 주걸의 멋진 얘기를 들었는지라 손과 발은 무거워도 마음은 가벼웠다.
‘어? 저 새끼 봐라?’
겨우 나흘, 적어도 한 보름 정도는 자리보전하고 나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놈이 너무 일찍 보였다.
마쌍린은 성큼 마초에게 다가가려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초의 몰골을 뜯어보았다.
얼굴은 백반을 바른 것처럼 허옇게 들떠 있고, 다리는 지면을 기는 것 같았으며, 팔은 간신히 흔들리고 있었다.
‘지렁이 새끼가 진창을 기는 것 같구나.’
마쌍린이 보는 새에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던 마초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어나려고 애는 쓰지만, 몸이 자석처럼 땅바닥에 붙은 듯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에이,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마쌍린은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놈에게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싹 달아났다.

해가 바뀌었다. 양손과 양발에 한철 고리를 끼우고 다닌 지 육 개월. 마초는 그때서야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며 천지종횡도를 연마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육 개월이 흘러 마가장에도 여름이 찾아왔다.
어느새 키가 한 뼘은 자라 덩치가 커지고, 힘이 늘은 마초는 그제야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한철 고리를 찬 지 일 년이 지나자, 마초의 몸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한철의 차가운 기운이 거의 사라진 것은 물론, 고리를 찼다는 느낌마저 간혹 생길 뿐이었다.
그때부터는 마구간의 일을 마치고 나면 한밤중에 십여 리의 구릉을 오르는 수련이 더해졌다.
‘도를 찌를 때에는 만근거석이 뚫리고, 위에서 내리칠 때는 천지가 무너지며, 옆으로 휘두르면 산악이 뭉텅 베어져야 하리라.’
마초는 구릉을 올라가면서 녹이 팍팍 쓴 도를 휘두르며 그렇게 속으로 외쳐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