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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6화)
2장 입으로 싸우면 하늘인들 못 이기랴(2)
다시 일 년의 세월이 흘러, 그 이 년 동안 마가장에도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겨우 십여 명 남았던 무사들도 공공연히 마가장을 떠나고, 소와 양을 키우던 하인들은 자신이 키우던 소와 양은 물론 마구간의 말도 대부분 몰래 팔아 치우고 도망쳐 버린 것이었다.
그 낌새를 눈치챈 마초가 마구간을 밤새워 지켜서 간신히 남은 것이 바로 혈풍이었다.
그날도 마구간에서 밤을 샌 마초는 혈풍을 타고 천천히 주변 초지를 돌면서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열다섯의 나이,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았지만, 어느새 거의 육 척 가까이 자란 마초의 모습은 어른을 방불케 했다.
사막이라 해도 약간의 계절 변화는 있다.
겨울의 공기는 무거움 속에 차가운 떨림이 느껴졌고, 봄의 공기는 자잘한 물결 속에 잠긴 듯 안온한 느낌이 들었고, 여름의 뜨거운 대기는 세차고 격렬하게 피부에 부딪쳐 왔다.
이제 봄기운과 비슷한 초가을이 지나 늦가을이 되니, 스산한 공기 속에 허허로운 기운만이 공중을 부유하는 듯싶었다.
뚜렷이 사계절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변화하는 자연의 기운을 느끼는 것이 자연과의 동화를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무도(武道)의 지향점이었다.
마초가 혈풍을 타고 넓은 초지를 한 바퀴 돌았을 때, 쭈뼛거리며 다가온 두 사람이 있었다. 원소와 서구였다.
“저기 삼공자님…….”
“훗.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자꾸만 그렇게 부르세요?”
“뭐, 어떻습니까? 뭐, 삼공자님도 장주님의 핏줄이 아니랍니까?”
원소가 생김새답게 핏대를 올리면서 소리쳤다.
“이봐, 서구. 그렇지 않아? 대공자는 아예 폐인이 되었고, 이공자는 폐관 수련한답시고 아예 코빼기도 안 보이고, 거기다 장주님은 병석에 누워 기동도 못하시는 판국에…….”
말이 길어질 것 같자 마초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마초는 오늘따라 누구의 눈치도 안 볼 만큼 말이 험해지는 것을 보고, 그들이 모종의 결심을 한 낌새를 채고 있었다.
“저, 저기…… 마가장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서구가 주저하면서 대답했다.
그의 말을 듣고 마초의 눈이 원소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원소가 말도 없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인다.
“휴유……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떠나시려면 당분간 먹고살 만한 돈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건 걱정 마십시오. 뭐, 산 입에 거미줄 치기야 하겠습니까?”
원소가 가슴을 탕탕 두드릴 것처럼 큰소리쳤지만, 두 사람의 언행은 어쩐지 과장스런 느낌이 풍긴다.
“그래, 어디로 가시려고요?”
“중원으로 가려고요.”
서구가 대답하자, 원소가 한마디 보탰다.
“평생 사막에서 살아오다 보니 바닷물을 구경도 못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아예 바닷가에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네. 항주에서 자그만 무관을 차리려고 해요. 삼공자님도 언제 중원에 나오시면 항주를 들러 주세요.”
“네에. 그리 결심을 하셨다니 아무쪼록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마초는 그들에게 보탬을 해 줄 능력이 없어 그들의 무운장구를 빌 뿐, 다른 할 말이 없었다.
“저, 저기, 무관 이름은 토룡이라고 지으려고 하니까 토룡무관을 찾으시면 돼요.”
서구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하자, 마초의 입술이 약간 비틀어졌다.
토룡(지렁이)이라면 마조린과 마쌍린이 마초를 욕할 때 쓰는 말이 아닌가. 그들이 자신의 별명을 무관 이름으로 하겠다는 말은 곧 자신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이 떠난 지 반 시진가량 지났을 때, 빠르게 마구간으로 접근해 오는 인영이 있었다.
마쌍린이었다.
이 년간 안 보는 새 원래 길었던 턱은 더욱 길어지고, 노란 빛이 감도는 눈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얼굴이 푸르뎅뎅해진 것을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기색이다.
마초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쥐고 있자, 마쌍린이 오자마자 마초의 멱살을 틀어쥐고 소리쳤다.
“그, 그 새끼들 어디 갔어?”
다짜고짜 그 새끼들 어디 갔냐고 따진다.
“……?”
“지렁이 새끼, 네놈과 친하게 지냈던 원소와 서구 어디 갔냐고!”
“요즘은 얼굴을 못 봤어요.”
마초가 무덤덤하게 대꾸하자, 마쌍린의 눈이 이마빼기로 쭉 찢어졌다.
“새끼, 거짓말하지 마! 그 자식들이 이쪽으로 갔다는 하인들의 얘기를 들었다고!”
“그, 그렇지만 난 만나지 못했는 걸요?”
마쌍린이 마초의 눈을 쪼개듯 쏘아봤다.
눈은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특히 마초처럼 멍청한 놈이 거짓말을 했다면 눈빛이 심하게 흔들려야 했다.
하지만 마초의 눈에는 의아한 기색만 떠 있을 뿐이었다.
‘하기야, 놈들이 지렁이 새끼를 만날 이유가 뭐 있겠어?’
“으드득. 그 새끼들이 아버님의 처소까지 뒤집어 놓고 돈이 될 만한 재물은 싹싹 긁어 갔어. 우린 이제 빈털터리야! 너도 이젠 네가 먹을 건 스스로 알아서 하란 말이야! 알겠어?”
화가 나서 씩씩거리던 마쌍린이 마초가 고삐를 쥔 혈풍을 힐끔거렸다.
“크흣. 순종 한혈마니까 값이 엄청날 거야.”
득의만만하게 중얼거리던 마쌍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나 양, 말 등을 닥치는 대로 팔아먹고 도망친 무사나 하인 놈들이 왜 진짜 값나가는 혈풍은 내버려 두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이 말이 형님의 소유라고 봐줄 놈들도 아니고…… 아항! 이놈이 하도 성질이 포악해서…… 아니, 그게 아냐. 멀리서 보니까 저 지렁이 새끼가 말을 타고 있었잖아?’
마쌍린이 짧은 생각 끝에 말고삐를 낚아챘다.
집안에 망조가 들었어도 혈풍을 팔아 치우면 또 한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끼히힝!
그러나 마쌍린이 마초가 잡았던 고삐를 낚아채는 순간, 얌전하던 혈풍이 두 다리를 허공을 한껏 치켜 올리면서 날뛰기 시작했다.
“이, 이 놈이 미쳤나?”
순간적으로 소리를 빽 질렀지만, 마쌍린은 미친 듯한 혈풍의 발길질을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가까이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빠각!
혈풍의 쇠뭉치 같은 발굽이 마쌍린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끄아악!”
마쌍린의 머리에서 핏물이 왈칵 튀어 흩뿌려지고, 마쌍린의 신형은 썩은 나뭇등걸처럼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혈풍은 지면에 나가떨어진 마쌍린의 온몸을 짓밟고 돌아다녔다.
보통 말의 배에 가까운 혈풍의 체중이 실린 발길에 마쌍린의 온몸은 만신창이 되어 버렸다. 저 정도의 충격이라면 아마 전신의 뼈가 분쇄될 만한 위력이었다.
겨우 촌각에 마쌍린은 피떡이 되어 버린 것이다.
워낙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마초도 미처 말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만!”
마초가 짧게 대갈일성하자, 미친 듯 날뛰던 혈풍이 동작을 뚝 멈추더니 고개를 푹 떨구었다.
마초의 번갯불이 튀는 듯한 눈초리가 무섭게 혈풍을 쏘아보았던 것이다.
혈풍이 주춤주춤 다가와서 마초의 어깨에 머리를 비벼 댔다.
“아니,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이라면 사양하겠어. 저자가 죽이고 싶을 만큼 더러운 놈이지만, 나와 핏줄을 같이한 형제. 난 너의 발보다는 내 손으로 저자를 징벌하고 싶어.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네 마음대로 일을 저질렀으니 너에게 벌을 주지 않을 수 없어. 오늘은 굶어!”
흡사 마초의 말을 알아들은 양 혈풍이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가만있자. 저 고삐.’
그러고 보면 마쌍린이 혈풍의 고삐를 잡다 경을 치른 것이 아닌가.
“그래, 혈풍아. 이젠 누구도 너를 함부로 잡지 못하게 하겠어.”
마초는 혈풍의 고삐를 풀고 얼굴에 씌운 마구를 뜯어내 던져 버렸다.
마초는 속이 후련했다. 혈풍에게 자유를 준 셈이다.
“이제 네 고삐를 풀어 주었으니 네 멋대로 살아가렴.”
마초가 혈풍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슬쩍 힘주어 밀었다.
이히히힝!
두 다리를 높이 들고 울음을 터뜨린 혈풍이 몇 번 발을 구르더니, 이내 마초의 시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핏물이 철철 흐르는 마쌍린의 참혹한 몰골을 보고도 마초는 서슴없이 그를 어깨에 메었다. 보통 이런 상태면 들것에 날라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가볍군.’
비슷한 체구의 마쌍린을 어깨에 둘러멘 마초는 그 생각 끝에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이 년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대도무문공을 연마하다 보니, 얼마 전부터 단전에 벌레가 스멀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것도 어떤 때는 견디지 못할 만큼 가려워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혹시 너무 무리해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은 주걸은 뛸 듯이 기뻐했다.
단전의 생성!
바로 그거였다.
적당한 내공심법을 익혀 진기를 채워 넣기만 하면 내공이 자라날 것이다.
걱정이 해소되어서일까, 그때부터 마초는 몸에서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집채만 한 바위를 들어 십 리 밖으로 내동이칠 수 있겠다는 턱없는 자신감도 드는 것이었다.
“어어? 마초가 여긴 웬일이지?”
몇몇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들이 마쌍린을 어깨에 멘 마초가 다가오자 서둘러 옆으로 비켜서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숲 속의 오두막과 마구간과 초지만 오고 갈 뿐, 전각 쪽으로는 한 번도 오지 않던 마초이기에 더욱 이상스러웠다.
그러나 마초에게 업혀 늘어져 있는 사람이 바로 이공자 마쌍린이라는 것을 알아본 하인들이 지들끼리 쑥덕거렸다.
“마초가 이공자를 때려서 혼절한 모양이야.”
“야아, 혼절한 정도가 아닌데. 혹시 돌아가신 거 아냐?”
“에이, 설마. 그랬으면 업고 올 리가 없잖아?”
“아닐 거야. 마초는 무공이라면 반 초식도 모를 텐데 어떻게 이공자를 때렸겠어?”
설왕설래하는 와중에 하인 한 사람이 재빨리 장주의 거처로 뛰어 들어갔다.
“뭐, 뭐야? 그 천한 지렁이가 내 아들을?”
내실에서 뾰족한 고함이 터져 나오면서 달려 나온 여인이 있었다. 최고급 옷에 장신구가 짤랑거리는 귀부인. 바로 마가장주 마중인의 처로, 마가장의 안주인인 피 부인(皮婦人)이었다.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도 워낙 잘 먹고, 피부 관리를 잘한 것인지 아직도 탱탱한 피부에 젊음이 넘쳐흐른다.
파팍!
그녀가 연미표(燕尾慓)를 펼쳐 다가오는 모습은 무척이나 경쾌하고 빨랐다. 그녀도 무가 출신이니 한가락 무공을 못할 리가 없었다.
짜악!
그녀의 신형이 물 찬 제비처럼 날아와 마초의 오른 뺨을 후려쳤다.
마초의 얼굴이 반대쪽으로 홱 돌아가며 다리가 비틀했다.
“이 천한 놈! 어서 내 아들을 내려 놔라!”
피 부인이 고래고래 악을 써 대며 마초를 노려보았다. 흡사 벌레를 보는 듯 싸늘한 눈초리에 살기가 떼구르르 구르고 있었다.
“둘째야!”
마초가 마쌍린을 바닥에 내려놓자, 피 부인은 아들의 몸을 이곳저곳 매만지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마쌍린의 고개는 바닥에 축 늘어진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이이, 천한 지렁이 새끼! 도대체 내 아들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느냐!”
“저…… 수작 부린 거 없어요. 그, 그냥 이공자께서 혈풍을 붙잡다가 그 녀석이 발작하는 바람에…….”
마초가 떠듬떠듬 변명했다.
“그럼 그렇지. 네가 무슨 재주가 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말 못하는 짐승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녀의 눈이 앙칼지게 찢어지면서 마초를 노려봤다.
“혈풍은 네가 돌보고 있던 게 맞지?”
“그, 그야…….”
마초가 얼떨결에 대답하자, 그녀의 손이 바짝 치켜지며 버들처럼 휘청 휘어져 마초의 얼굴에 떨어졌다.
사삭.
그러나 마초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젖혀지면서 가볍게 몸이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어엇?’
마초는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끌어당기지 않았나 싶어 부지불식간에 뒤를 곁눈질했을 정도였다.
“이놈이!”
황당한 것은 피 부인이 더했다. 워낙 가까운 상태라 자신의 유엽수(柳葉手)가 빗나가리란 것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유엽수는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단순하지 않다. 근접한 거리에선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수법으로, 그 수에 당한 고수들도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피 부인은 그것이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마초가 무공을 익히고 있을 것이라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그녀가 한 걸음 바짝 접근하면서, 이번엔 발끝을 살짝 치켜 올리면서 마초의 오금팽이를 걸었다.
그녀의 수법은 매우 단순해 보였지만, 그녀가 펼치는 초식은 어렸을 때부터 수십 년간을 연마한 것으로, 짧은 거리에선 그만큼 효과적인 수법도 드물다.
파앙!
그녀의 발끝에 마초의 오금이 걸리면서 마초의 신형이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호홍! 역시 우연이었구나!”
피 부인의 얼굴이 기세등등하게 변했다. 자신의 자식은 당장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그사이에 마음에 걸리는 놈을 죽여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곤두박질친 마초의 몸은 거기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약간 경사진 곳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것이다.
“지렁이 새끼! 오늘 완전히 죽여 버릴 거야!”
그녀의 신형이 붕 떴을 때, 쌩하고 앞에서 날아오는 어른 주먹만 한 돌멩이가 있었다.
“흥! 같잖아서!”
그녀가 코웃음을 치면서 살짝 옆으로 몸을 비키면서 그대로 달려가려 했다. 그러다 멈칫하고 말았다.
“아, 안 돼!”
그녀가 몸을 비킨 사이, 그녀의 몸 옆을 지나친 돌멩이가 마쌍린의 얼굴에 적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