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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7화)
3장 토룡소의 괴인(1)


“크, 쿨럭! 뭐, 뭐라고? 네가 돈을 벌겠다고?”
요즘 주걸은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옛날 담 너머 도망치다 허리가 삐끗한 것이 계속 말썽을 부리더니, 이제는 고질병이 되어 버렸다.
“예. 별수 없어요. 지금까지는 마가장에서 보낸 준 양식으로 먹고살았잖아요? 근데 이젠 형편이 어려워서 알아서 먹고 살랍니다.”
“허어…… 그렇게까지 마가가 쫄딱 망했단 말이야? 그래, 어디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일거리가 있기나 하겠냐?”
몇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하면서 주걸은 아이의 처지를 안쓰러워했다.
이 년간 무공 같지도 않은 무공을 익히면서 아이가 한 고생은 자심했다. 고생한 끝에 의외의 결과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마저도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사람도 많고, 집도 많은 신목원에 설마 일자리가 없겠어요?”
“그, 그래도 힘들지 않겠냐? 남의 밑에서 일한다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거든.”
“큭. 걱정 마세요. 그동안 공짜로 잘 먹고산 셈입니다. 이젠 키도 크고, 덩치도 커졌으니, 내 손으로 돈도 벌어 봐야죠.”
말은 대차지만, 겨우 열다섯 아이가 세상에 나가 돈을 번다는 것이 쉬울 리가 있겠는가?
주걸은 이제 와서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졌다. 녀석을 도와주기는커녕 더부살이나 하는 신세라니.
주걸의 눈에 복잡한 상념이 어리자, 아이가 아하하 웃더니 주걸의 앞을 가리켰다.
“근데 할아버지, 그거 뭐 하시는 거죠?”
주걸이 몸이 아파 집 안에 처박혀 있는 날이 늘어나면서 심심풀이로 하는 놀이였다.
검은 나무 쪼가리 삼십이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바로 노름할 때 흔히 하는 골패였다.
“뭐, 그냥 심심해서…….”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던 주걸이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너도 바깥으로 나가 일하게 되면 이것도 쓸모가 있겠구나.”
그러면서 주걸이 봇짐에서 기름 먹인 반 뼘 길이의 종이 짝을 꺼냈다.
잡다한 그림과 함께 일에서 십까지 숫자가 적혀 있는 투전목이라는 것이었다.
주걸이 모두 여덟 장씩 팔 조, 팔십 장으로 이루어진 투전목을 하나씩 뒤집어 그림과 숫자를 보여 주더니, 이내 투전목을 섞기 시작했다.
착착착!
주걸이 소리도 경쾌하게 투전목을 치더니 바닥에 뒤집어엎어 놓고 마초를 쳐다보았다.
“자, 네가 투전목을 가리키면 그게 뭔지 맞추어 보겠다.”
주걸의 말에 따라 마초가 줄지어 놓인 투전목을 한눈에 살피다가 불시에 하나를 가리켰다.
“이거요!”
“물고기.”
“이거…….”
“꿩!”
마초가 말을 꺼내자마자 주걸이 즉시 대답하는데, 한 가지도 틀린 게 없다.
“우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마초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감탄하자, 주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으허허허! 하다 보면 늘게 되는 게 세상사의 이치란다. 집중력 싸움이지. 원래 도박이란 상대의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이 아니라 눈동자를 봐야 한다. 눈은 거짓말을 못해. 알겠냐? 크크. 과거엔 돈 벌어 흥청망청 실컷 쓰다가 돈 떨어지면 말이다. 투전으로다…….”
“아아, 할아버지도 도박을 하셨군요?”
‘으잉? 말이 헛나왔구나.’
신나게 설을 풀던 주걸은 그만 아차 했다. 구름 속의 신룡인 자신이 도박판에서 투전을 했다고 하면 품위가 팍팍 떨어지는 짓거리다.
“어헛헛. 사람 사는 곳에는 언제나 도박이 성행하지 않더냐. 그러다 보면 도박꾼의 사기에 걸려 가산을 탕진하는 불쌍한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내 어찌 그걸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느냐. 그렇다고 그 천지!”
“종횡!”
주걸의 말을 아이가 대충 굵어진 목소리로 받자, 주걸이 호탕하게 대소를 터뜨렸다.
“바로 그거다! 아무리 도박판이라고 해도 어찌 함부로 칼부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럼, 그럼요!”
“으으허허허!”
“으아하하하!”
이어 노소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무너뜨릴 것처럼 울려 퍼졌다.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도록 웃어젖힌 주걸의 눈에는 황금장의 금빛 현판과 겹쳐 무서운 살기를 내뿜는 눈알이 들어와 박혔다.
‘크으……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니까. 그 사진이라는 귀신같은 놈에게 쫓겨 황금루의 담을 넘다가 허리가 삐끗했잖아?’
주걸은 놈에게 쫓기던 아찔한 기억에 그만 몸서리를 쳤다.
그러면서도 주걸은 어쩐 일인지 한마디 더하고 싶어 목이 근질거렸다. 아이가 돈 벌러 나간다니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어흐흠. 세상에 나가거든 항상 자신의 삼 할은 숨겨야 해. 알겠냐?”
“넷!”
마초의 우렁찬 대답에 주걸의 눈에 엷은 물막이 어렸다.
‘어허. 늙으면 죽어야지, 무슨 눈물이 이렇게 흔해졌냐?’

다음 날 일찍 부엌에서 장독의 쌀을 푸던 마초는 멍청히 바가지를 내려다보았다. 겨우 조롱박으로 반 바가지. 이 정도면 두 사람이 한 끼나 먹을 양이다.
이 밥을 먹고 나면 주걸은 점심 끼니를 굶어야 한다.
‘아냐. 그럴 수야 없어.’
대충 하면 눈치가 엄청 빠른 주걸을 속여 넘기긴 힘들 것이다.
얼른 솥에 밥을 안친 마초가 아궁이에 불을 지핀 다음 접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스럭!
일부러 소리를 낸 마초가 약간 놀라는 소리를 냈다.
“아니, 서구 아저씨가 웬일이세요?”
이어 마초가 얄팍한 서구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조심조심 말하는 시늉을 했다.
“나 오늘 집을 떠나기로 했어. 그래서 말인데 쌀을 짊어지고 가기는 큰 짐이 될 것 같아 떡을 했거든. 한 접시 가져왔으니…… 어헉!”
쨍그랑!
말을 하던 서구가 질겁한 소리를 하면서 접시 깨지는 소리가 났다.
“어허, 이런. 흙이 묻어서 형편없구나.”
“그래도 조금 먹을 게 있네요.”
“바로 떠날 참이라 다시 가져올 시간은 없고…….”
“아닙니다. 그저 생각해 주신 것만으로 고맙습니다. 그럼…….”
투, 툭.
떡 위에 묻었을 흙을 터는 시늉을 하면서 아앙, 쩝 하고 떡 먹는 시늉을 하고 난 마초가 부엌으로 돌아가 밥상을 차렸다.
겨우 밥 한 그릇에 장국, 그리고 두세 가지의 푸성귀가 전부인 조촐한 밥상이다.
“아니, 왜 네 밥은 없냐?”
주걸의 말에 마초가 씨익 미소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서구 아저씨가 떡을 해 오셨더라고요. 그걸 한입에 다 처넣었더니 배가 불러 죽겠어요.”
“아아,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리더니…….”
주걸이 이해를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바짝 숙이고 밥알을 입에 물었다.
보통 이럴 때면 네 입만 입이냐고 한소리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작은 눈물방울이 반짝이고 있었던 거다.
‘허허…… 나 주걸이 이젠 죽을 때가 된 모양이구나. 주책없이 눈물만 나오니…….’
서구는 원소 외에 다른 사람이 없으면 마초를 삼공자로 부르면서 공대를 한다. 그런데 목소리는 진짜 흡사했지만, 그 서구가 마초에게 반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마초의 기분이 우울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떡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주걸이 아무런 호통도 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은 별일 중에 별일인 것이다.

“진짜 지천에 먹을 것이 널렸구나.”
마초는 지나가다 우물에서 물배를 채우긴 했지만, 막상 마가장을 나와 신목원으로 들어서니 더욱 배가 고팠다.
마초가 향한 곳은 어물, 과일, 양식 등을 파는 상가였다. 중앙로에서 갈라진 소로의 양쪽에 좌판들이 줄지어 있고, 노점상들이 과일들을 잔뜩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보통 운반하기 좋게 수레 위에 올려놓은 좌판에 과일들이 그득 쌓여 있었는데, 흔히 나오는 살구나 사과, 호두는 물론 신목원의 대표적인 과일인 합밀(哈密)을 따로 파는 노점도 있었다.
그 과일의 새콤하고 달콤한 맛을 생각하니, 뱃속에서 천둥치는 소리도 들린다.
슬쩍 지나치는 척하다가 한 개라도 훔치고 싶었다.
‘에이, 참자, 참어. 괜히 과일 훔치다 들키면 일자리 구하는 건 물 건너가는 거잖아?’

“음식을 훔치는 건 부끄러운 짓이 아니다. 봐라! 중원의 개방 거지들은 빌어먹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른단다. 먹을 것이 없으면 훔치기도 하지만, 들켜도 뻔뻔하거든. 그건 바로 세상이란 있는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물질로 채워 주면, 반대로 정신이 풍족해지기 때문이란다.”

주걸은 틈만 나면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것은 마초가 마가장에서 음식을 얻어먹는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었지만, 가끔 생각하면 주걸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마초가 길 양쪽의 노점들을 기웃거리고 있다가 와르르 소리가 나며 갑자기 눈앞으로 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엇?’
속으로 놀라던 마초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과일을 손을 내밀어 붙잡을 때,
“도, 도둑이야!”
마초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노점상이 다급히 소리를 내질렀다.
잡다한 과일들이 여러 개의 좌판에서 와그르르 굴러 내리는 혼란을 틈 타 자그마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저, 저 새끼 잡아!”
이미 좌판에서 굴러떨어진 과일은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여기 노점상들이 악다구니를 쓰면서 손가락으로 자그마한 인영을 가리키며 쫓아 나왔다.
잠시 자신의 손에 들린 합밀과를 흘끔 쳐다보던 마초는 이리저리 몸을 피해 도망치던 그 도둑놈이 하필이면 자신의 앞으로 달려오는 것을 알았다.
후다다닥!
언뜻 봐서 열서넛쯤 되어 보이는 추레하게 생긴 아이였다.
“비, 비켜!”
아이가 길 중간을 막아선 마초를 냅다 밀치면서 나가려고 할 때, 턱! 마초가 슬쩍 녀석의 발목을 걸었다.
우당탕!
발에 걸린 녀석의 몸이 옆에 있는 좌판을 들이받으면서 과일들이 와르륵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은 수레 밑으로 들어간 아이를 잡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노점상들이 수레를 빙 둘러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초는 녀석이 수레 옆의 골목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놈의 눈이 마초의 눈과 거의 정면으로 부딪쳤다.
얼굴을 반쯤 가린 길고 덥수룩한 머리칼 속의 눈은 의외로 크고 맑았다.
‘큭. 자식이 쥐새끼처럼 잽싸군.’
마초는 이내 녀석에 대해 생각을 지웠다. 세상에 좀도둑은 많은데, 굳이 놈을 기억할 일이 뭐가 있을까. 그보다는 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먹고살 것이 아니겠는가.
마초가 사람들의 옆으로 비켜서서 손에 들고 있던 합밀과를 덥석 베어 물었다. 달착지근한 과즙이 입속을 통해 순식간에 식도를 시원하게 적셨다.
‘쩝. 한 개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가겠어.’
마초가 아쉬운 마음에 둘러보았지만, 떨어진 과일로 난장판이 되었던 주변은 어느새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쯧. 으깨진 과일 하나마저 다 치워 버렸어.’
마초는 과일 맛을 본 식도가 아우성을 치는 것을 느끼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응? 춘양루?’
상가로가 끝나는 곳, 간판처럼 햇빛이 잘 비치는 곳에 삼층 누각이 와락 눈동자에 뛰어들었다.
‘그래, 주루에 취직하면 먹을 걱정은 필요가 없잖아?’
급료는 없어도 좋았다. 손님이 남긴 음식만 싸들고 가면 할아버지를 굶기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