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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25화)
9장 희생양(4)
부친을 허망하게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사미련이 무의식중에 마초를 돌아보다 둔기로 머리통을 후려치는 충격을 받았다.
평소의 흐릿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번갯불 같은 안광이 뇌리를 관통한 것이다.
“그, 그……?”
사미련이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마초의 눈을 가리켰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마초의 눈이 예의 흐리멍덩한 빛으로 되돌아왔다.
“갑시다!”
“네, 네…….”
뇌리를 지지는 듯한 무서운 환영에 그녀는 겁먹은 얼굴로 마초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마초가 고창 도축장에 도착한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때였다.
평소 묘시(오전 5시~7시) 사이에 출근을 해야 하는데, 시간은 이미 오정에 가까웠으니 한참 늦은 것이다.
“이 새끼! 너 왜 이리 늦었어!”
마초가 도축장을 둥그렇게 싸고 있는 축사 옆의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석두한이 빽 소리를 질렀다.
“저, 그게…….”
마초가 뒷머리를 긁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작은 보퉁이를 든 사미련이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엉? 너 자식, 이제 보니 네 처를 데려왔구나.”
석두한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소리쳤다.
“예? 아, 아니, 내 처라니……?”
마초는 내 처가 아니라는 소리를 꺼낼 수도 없었다. 사미련이 불쑥 끼어들어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네. 전 사미련이라고 해요. 낭군께서 같이 직장에 가 보자는 말을 해서요.”
처음 수줍던 자태와 달리 말씨가 또렷하다.
‘이런! 앙큼한 년. 네가 무슨 마초의 처야?’
그런 생각과는 달리 석두한이 송구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아, 예에. 하나 도축장이란 것이 여자가 보기엔 워낙 무서운지라 구경시킬 곳이 아닌데…….”
“아녀요. 뭐,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소녀의 낭군께서 일하는 곳이라면 제 직장이나 마찬가지예요. 절대 마음 쓰지 마세요.”
“어엉? 왓핫핫! 부인(婦人)의 마음씀씀이를 보니 정말 감탄스럽기 그지없소. 마초는 능력이 뛰어나 우리 도축장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오. 역시 부창부수라! 그 남편에 그 부인이로군.”
석두한이 머리를 끄덕이며 극찬을 하자, 얼굴이 발그레해진 사미련이 거듭 고맙다고 치사를 했다.
‘꿀꺽! 진짜 사람 환장하게 예쁘구나. 다른 일만 아니라면 당장 저 계집애를 품고 싶다니깐? 쩝. 목구멍으로 꿀꺽 삼켜도 비린내도 안 날 것 같은데 말이야.’
석두한은 못내 아쉬웠지만 광명천의 백 년 염원! 그것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감상이나 감정은 모두 버려야 한다.
‘혹시 이자가 흉수인지도 모른다.’
마초는 갑작스런 생각에 석두한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마초가 사미련을 데려오는 것을 미리 아는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석두한이 떼굴떼굴 뱁새눈알을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좋아. 어디 두고 보자.’
마초가 속마음을 숨기고 겸연쩍게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지금 저희들은 마땅히 숙식할 데가 없어요. 어떻게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초도 커다란 봇짐을 등에 메고 있고, 사미련은 작은 보퉁이를 들고 있으니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뭐어? 그럼 안 되지. 흐음…….”
손가락으로 턱의 무성한 수염을 잡아당기던 석두한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삼십 대의 장한에게 손짓을 했다.
“어이, 양 총관! 혹시 두 사람이 머물 데가 있을까?”
석두한의 말에 역삼각형의 얼굴에 눈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왜소한 사내가 긴 목을 조금 비틀면서 대답했다. 도축장을 관리하는 양기수(羊基手)였다.
“두 사람이 부부이니 따로 독채를 주어야 하지만, 여기는 인부 숙소밖에 없어서…….”
“그렇긴 하지. 음, 좋아. 마침 내 집에 빈 방이 있으니 그걸 주도록 하지.”
마초와 사미련이 기거할 집은 이렇듯 싱겁게 결정되었다. 미리 약조를 해 놓은 것처럼 말이다.
“단지, 두 사람이 아무리 부부라지만 방을 같이 쓸 수는 없거든. 나도 독신인데 남 보기에도 안 좋고.”
그의 말에 사미련이 대뜸 잘되었다는 듯 대답했다.
“아뇨. 고마워요. 사실 정혼한 사이긴 하지만, 정식으로 결혼을 한 것도 아니니 그건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훗. 다행이야. 일이 잘되려니까 이렇게도 풀리는구나.’
자신을 마초에게서 떼어 놓지 못하도록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사미련은 마초와 한 방을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크흥. 고 계집애, 애는 쓴다만 어차피 부처 손의 손오공이야.’
“어? 그거 잘되었군. 자, 말 나온 김에 내 집으로 가지.”
석두한의 발길이 향한 곳은 성벽이 반쯤 무너져 내린 고창성의 내성이었다.
과거의 언젠가 누렸던 성세의 잔재처럼 말라비틀어진 대추나무 숲과 꽃이 듬성듬성한 화원 사이로 빛바랜 청석로가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마초가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으려는 듯 두리번거리자, 석두한의 날카로운 눈이 잠깐 마초의 얼굴에 머물다 사라졌다.
‘뭔가 상당히 경계를 하는 눈초리야.’
마초는 석두한이 무의식중에 드러내는 의심스런 태도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렇게 삼사 리 정도의 단조로운 풍경이 이어진 후, 석두한이 발을 멈춘 곳은 기단의 모서리가 뭉툭하게 마모된 커다란 삼층 목탑이었다. 지름이 족히 삼사 장에, 높이가 칠팔 장은 되어 보였다.
그 뒤로는 원래 석조로 지어진 건물들이 왕창 무너진 채 앙상한 골조만 남아 있었다.
“히야, 진짜 거대한 목탑이네요?”
마초가 혀를 내두르면서 소리를 지르자, 석두한의 눈에 약간 짜증 섞인 기색이 스쳐 지났다.
감탄할 걸 감탄해야지 맞장구라도 쳐 줄 텐데, 저 정도의 목탑은 너무 흔해서 언급할 건더기도 없는 것이다.
“저, 여기서 살아야 하나요?”
아담한 정원이 딸린 번듯한 건물을 기대하던 사미련의 실망스런 물음이었다.
“겉으론 저래 보여도 안으로 들어가면 영 딴판이요.”
그러면서 더 이상의 의심은 하지 말라는 듯 서둘러 탑문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거북한 소리와 함께 마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시커먼 돌층계였다.
빛이 탑 속으로 스며들어도 흡수만 하고 반사하지 않는 검은 돌층계는 그것만으로 이목을 끌기에 족했다.
‘저걸 묵철석(墨鐵石)이라고 하던가?’
마초는 어디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을 떠올렸다. 묵철석은 지하의 용암이 수만 년을 굳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돌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묵철석으로 연장을 만든다면 수천 년을 써도 닳지 않고, 병기로 만들어 쓰면 굳이 갈지 않아도 날이 무뎌지는 일은 없다고 했다. 그처럼 귀한 묵철석으로 계단을 만들다니.
십여 개의 묵철석 계단을 내려가니, 바로 지하 통로가 나타났다. 두 사람이 엇갈려서만 지날 수 있는 듯한 지하 통로의 양쪽에 몇 개의 방이 있었다.
사미련에게 배당된 것은 복도의 안쪽 끝에 있는 방이었다.
마초에게는 석두한의 맞은편 방이 배정되었다.
“방안의 구조는 다 똑같소. 침대와 의자는 물론이고 욕실도 있으니 지내는 데 불편은 없을 거요.”
석두한이 사미련에게 말을 건네자, 그녀가 고개를 까딱하면서 대답했다.
“고마워요, 장주님. 소녀는 그냥 경내나 돌아볼 테니 일 보세요.”
“알겠소. 하지만 내성을 벗어나는 일은 가능하면 삼가해 주시요. 가끔 이상한 일이…… 그, 그렇지. 말하자면…… 요, 요귀가 출현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납치하는 일이 드물지 않소.”
“네에? 요, 요귀요?”
그녀가 경악하자, 석두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뿐만이 아니요. 수시로 소가 죽어 가는데, 놀라운 건 죽은 소의 간이 없어진다는 거요.”
“소, 소의 간이 없어져요? 누가 그랬는지 밝혀내지 못한 건가요?”
“그렇소. 처음 그런 일이 발생한 건 일 년 전이었소. 항상 정해 놓은 것처럼 자시 중(밤 12시)에 발생해서 나뿐 아니라 인부들이 교대로 지켰는데…… 휴우.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요.”
석두한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을 그쳤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초는 그의 태도에 이상함을 느꼈다. 요괴라는 말을 할 때 석두한이 말을 떠듬거리면서 얼굴에 왠지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언뜻 스친 것이다. 마치 천자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한 충성스런 신하의 표정이랄까.
‘두고 보면 알겠지.’
마초는 앞장을 선 석두한의 뒤를 따르면서 잠시 의문을 접어 두었다.
“우와아아!”
도축장이 무너질 듯한 환성이 터졌다.
이미 몇 마리의 소를 간단하게 해치운 마초가 이번엔 보기만 해도 겁이 더럭 나는 미친 소와 마주한 것이다.
첫눈에 봐도 미친놈의 티가 역력한 우람한 덩치의 황소였다. 아가리에서는 게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오르고, 눈에서는 누런 흉광을 내뿜는 황소가 목책 밖에 둘러선 구경꾼들을 노려보다가 앞에 있는 마초에게 눈을 돌렸다.
투툭.
놈이 양쪽 앞다리로 단단한 흙바닥을 몇 번 거칠게 긁어 댔다.
‘한 방이야. 단 한 방에 놈의 정수리를 찍어야 해.’
커다란 도끼를 잡은 마초의 손아귀에서 진득한 땀이 솟아오르고, 이마에서 번지르르한 진땀이 뚝뚝 눈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공을 써서 놈을 상대하면 쉬울지 몰라도 보는 눈이 많은 상태라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순전히 마초의 순수한 근력과 빠르기, 정확성으로 놈의 정수리를 쪼개야 하는 것이다.
‘크흐흐. 이번엔 어떻게 상대하나 보자.’
석두한은 점점 흥미진진해졌다. 일부러 소에게 광분제를 먹여서 내보낸 걸 어찌 알랴.
놈은 도축장의 축사에서 기르는 황소 중에서도 거대한 덩치와 엄청난 힘을 가진 종우(種牛)였다.
암소와 교접을 시켜서 우량 송아지 생산에 훌륭한 역할을 하는 비싼 황소였으니, 이렇게 도축하기에는 아까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마초의 능력을 측정하려면 그만큼 적당한 놈도 없다.
파파, 파파팍.
바닥을 긁는 황소의 동작이 더욱 빨라지고 거칠어졌다.
폭풍전야의 고요랄까.
수십 명의 구경꾼도, 석두한도 손에 땀을 쥐고 대치하고 있는 마초와 황소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놈의 요동치는 근육의 움직임이 점점 확대되고, 힘줄은 벌레가 꿈틀대는 것처럼 두드러졌다.
장내에는 한껏 늘어난 고무줄이 재까닥 끊길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푸루룩, 푸푸!
황소가 콧김을 내뿜는 소리가 짧고 급박해졌다.
드디어 놈이 공격을 개시하는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겨우 일 장밖에 안 되는 거리. 놈이 내뿜는 뜨거운 콧김이 얼굴에 훅 끼쳐 왔다.
크헝!
산악이 덮친다는 표현이 이럴 때 가능한 것일까. 바닥을 박찬 황소가 긴 그림자를 들씌우면서 마초를 덮쳤다.
아아악!
구경꾼들이 비단천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마초의 자세가 잠깐 허물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황소가 덮치는 동시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마초가 물러난 속도의 배나 빠른 동작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빠악!
몽둥이가 돌벽을 치는 소리였다.
황소의 정수리에서 피 화살이 솟구치는 순간, 쿠당탕! 놈의 거대한 체구가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목책을 부수고 뚫고 나갔다.
“으아아악!”
구경꾼들이 우왕좌왕하는 장면이 눈동자에 투영되었을 때, 마초는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 방! 단 한 방에 놈의 명줄을 끊은 것이다.
중천에 타오르던 햇살이 어스름 땅거미를 등에 업고 붉은 빛 무리를 토할 때, 마초는 혼자서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 갑자기 주문이 집중된 것인지 수십 마리의 황소를 도살해야 했다.
빗물에 흠뻑 젖은 빨래처럼 심신이 축 처져 버린 마초가 해가 지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황혼의 붉은 햇살이 얼굴에 부어지면서 마초의 얼굴도 기괴한 모양으로 변했다.
“후우. 황혼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슬퍼.”
마초가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 급촉한 발소리와 함께 마초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마초! 자네 정혼녀가 없어졌어!”
<『토룡쟁천』 제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