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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24화)
9장 희생양(3)
“이런!”
마초가 물이라도 마시려고 했더니 이게 웬걸? 물이 수증기로 변해 눈앞으로 슬슬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이건 완전히 사람 놀리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오른손이 무슨 열양강기를 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냐. 혹시 내가 낀 토룡왕의 허물이 열양의 기운을 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즉시, 마초가 손목에 걸친 허물을 손가락 끝까지 벗기다가 손이 바짝 어는 느낌을 받고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어쩌면 토룡의 허물이 냉기를 제어하는지도 몰랐다.
‘쯧. 할 수 없지. 근데 놈이 나를 놀리려고 여기에 데려다 놓은 건 아닐 테고…….’
마초가 그런 생각에 허물을 다시 손목까지 올려 착용한 다음, 이번엔 왼손으로 이끼 한 움큼을 번개처럼 잡아챘다.
“으흑!”
마초는 손목의 기맥을 타고 엄청난 냉기가 침투하는 것을 느끼고 그만 이끼를 놓칠 뻔했다.
“으드득!”
절로 이빨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마구 떨렸지만, 마초는 이끼를 입안에 넣고 씹었다.
싸아아아!
이끼를 씹자마자 냉기가 뱃속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으적, 으적!
마초가 한 움큼으론 성이 안 차는 듯 손에 닿는 위치의 이끼들을 연속으로 입안에 처넣었다.
이젠 뱃속에서 생난리가 났다. 연속으로 침투하는 냉기를 맞이한 열기가 한군데 뭉쳐 냉기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단전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이 이어지다가 금세 열기가 냉기에 밀려 없어질 것 같은 위기에 처했다.
그때, 마초의 손목에 착용한 허물에서 기이한 열류가 단전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파아아!
단전이 한없이 축소되었다가 가죽 공처럼 팽창하는 일이 수십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마초는 거의 흉신악살 같은 얼굴로 변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이빨로 질끈 문 입술에서는 선홍빛 핏방울이 무리지어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그런 고통스런 시간이 지났을까. 마초의 얼굴에 평안한 미소가 돌았다. 한없이 팽창되던 단전이 조막만한 크기에서 됫박 정도의 크기로 고정되면서 기이한 기류가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아, 냉기와 열기가 하나로 동화되었어.”
마초가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이젠 마음만 먹으면 단전에 고인 냉기와 열기를 따로 빼내어 발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안온한 기분에서 깨어난 마초가 위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평생 살 것이 아니라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보이지 않던 동혈 위의 입구가 동전처럼 눈에 들어왔다.
어림잡아 거의 백여 장 정도의 높이다.
허공답보의 경지에 오른 경공의 절대고수라면 밑에서 솟구치는 바람을 타고 두둥실 떠오를 수 있겠지만, 마초의 능력으론 허무맹랑한 공상일 뿐이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고…….’
그러던 마초가 흘낏 생각난 것처럼 무저갱의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리 눈시울을 가늘게 떠도 위쪽과는 달리 끝이 보이지 않는 태고의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큭. 언젠가는 진짜 무저갱인지 알아보고 싶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마초가 위의 암석에 무심코 손을 찔러 보았다.
퍼썩!
“아, 아니……? 돌이 왜 이리 무른 거야?”
다른 곳을 찔러 봐도 암석이 마치 두부처럼 으깨어진다. 마초가 얼떨떨해져서 자신의 양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석회석이라도 이렇게 재질이 약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단단하기로 유명한 용암이?
‘에라, 나도 모르겠다.’
마초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찝찔한 피맛이 느껴졌지만, 마초는 그걸 무시하고 암벽을 타오르기 시작했다.
퍼억, 퍽!
쌀 포대를 두드리는 것 같은 무척 단조로운 소리가 연이어 반복되었다.
씨이이이!
밑에서는 격렬하게 솟구치는 돌풍이 위태롭게 몸을 흔들었지만, 마초는 묵묵히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몸을 끌어 올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휴유유…….”
동혈을 빠져나와 저장고로 올라간 마초는 그만 털썩 주저앉아 세상이 가라앉을 것 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크어억!”
사진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가 가위에 눌린 꿈을 꾸고 소스라치게 깨어났다. 겁이 바락 난 사진이 황급히 사방을 둘러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의 미명이 옅은 안개처럼 방 안을 떠돌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진은 눈구멍이 째질 듯 뜨고 있다가 이내 장탄식을 발했다.
“허어, 꿈에서 깨어나고도 왜 이렇게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이 든단 말인가.”
그랬다. 별일도 아니었다. 왠지 누군가가 곁에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건 잠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토룡왕의 독기를 몸 한구석에 몰아넣은 후, 이 개월 동안 밖으로 배출하는 노력 끝에 독기의 뿌리만 배출하면 예전처럼 정상으로 회복이 된다.
그런데 악몽이라니! 아무래도 그동안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혔던 독기에서 해방되려니 쓸데없는 마가 낀 모양이었다.
사진은 아직 자신이 일어나려면 시간이 이른 것을 깨닫고 내기를 돌려 독기를 몰아넣은 부위로 집중시켰다.
이 순간이 위험한 때다. 몸속을 휘도는 모든 진기가 한군데 집중되었으니, 갓 태어난 아이처럼 외부의 충격에 대해서 극히 취약하다. 불을 붙인 도화선이 폭약에 달라붙기 직전인 상태였다.
세 살배기 아이가 손가락으로 몸을 쿡 찔러도 몸속의 기맥이 한군데 얽혀 주화입마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이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질 것은 뻔하다.
‘서둘러야 해!’
사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다급해졌다.
“끄으응…….”
막 사진이 독기의 뿌리를 몰아내기 위해 마지막 용을 쓸 때,
탁!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미약한 움직임이 있었다.
“끄으으…….”
사진은 불에 달군 듯 머릿속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누, 누구……?”
이런 상황에서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진은 그 말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곧이어 온몸이 무저갱에 빠지는 것처럼 끝없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때, 혼백을 끄집어내는 듯한 으스스한 음성이 귓속으로 기어들었다.
“광명천하……!”
저장고에서 밖으로 나온 마초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침 해는 동녘에 높이 떠올라 강렬한 빛을 온 누리에 흩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을 줄이야.”
늦어도 한참 늦었다. 석두한의 무섭게 화난 얼굴은 물론이지만, 마초를 기다리다 지친 사미련이 바락바락 악을 쓸 것을 생각하면 토룡소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저장소에서 양식을 담은 꾸러미를 손에 든 마초는 빠르게 토룡소로 뛰어들었다.
“으흑흑…… 아버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비탄에 잠긴 울음소리에 초막에 다가가던 마초의 발길이 뚝 멎었다. 사미련이 밖에 나와 기다리는가 했더니, 의외로 방에서 나오지 않고 구슬프게 울고 있을 줄이야.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벌컥!
마초가 급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니 침대에 머리를 묻고 흐느끼던 사미련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얼굴 위로 긴 고랑을 만들고 있었다.
마초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는 침대로 다가갔다.
반듯하게 누운 사진의 공허하게 치뜬 동공이 허공의 한 점을 의식하듯 굳어 있었다.
마초는 생기가 없는 사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가 죽은 걸 알았다.
입술에 묻어나온 선호색 핏물이 굳은 것을 보면 지난밤에 변을 당한 모양이었다.
마초가 물끄러미 사진의 허옇게 치뜬 눈을 보다 눈꺼풀을 쓰다듬어 눈을 감겼다.
“이, 이걸 받아. 새벽에 방에 들어왔더니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머리맡에 이게 있었어.”
사미련이 한 장짜리 서찰을 건넸다.
“이건 무슨……?”
마초가 의아스런 눈을 하면서 주춤거리자,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버지가 네놈에게 남긴 거야. 빨리 읽어 봐!”
내가 죽으면 몸을 태워 토룡연에 던져 주게. 그리고…… 내 딸 미련이를 부탁하네.
마초가 단 두 줄의 글귀를 읽다가 사미련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어린 것은 기대와 호기심이었다. 당연히 서찰의 내용을 알고 마초의 반응을 보고 싶다는 의미였다.
‘으으음…….’
마초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왜 자신에게 그녀를 맡긴단 말인가…….
“아버지가 네놈의 어디를 예쁘게 봤기에 너한테만 유서를 남겼단 말이야! 흥! 네 생각은 어때?”
“저기, 소, 소저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언제 봐도 흐릿한 눈빛에 더듬거리는 말투. 사미련은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지만 꾹 감정을 참았다. 어쨌든 아버지의 유언이다. 아버지는 한평생 사기꾼 노릇 같은 궂은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죽이고, 어떡하면 가문을 살릴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가 그녀에게 맡긴 반쪽 장보도. 나머지 반쪽을 찾아야 그곳이 어딘지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마초에게는 꼭꼭 숨기다 결정적인 순간에 유인책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그 장보도가 마초를 묶을 수 있는 자신의 생명줄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뭘 어떡해? 흥! 설마 아버지의 유언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
“소, 소생이 어찌……?”
말을 하던 마초는 무심코 사진의 무릎뼈와 발가락을 보았다. 어쩐지 부자연스런 형태였다. 발가락이 자연스럽게 펴진 것이 아니라 누가 뻣뻣해진 사체를 억지로 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초가 유심히 사진의 전신을 새삼 살피자, 사미련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놈이 대답하기가 껄끄러우니 변명거리를 찾는 모습이 아닌가.
‘누군가 이 상황을 조작했어.’
마초는 결론을 내렸다. 사진은 병마가 도져서 죽은 게 아니라 누군가의 암습을 받고 죽었다. 그 흉수의 목적은 무얼까.
‘먼저 사진 아저씨의 서찰에 쓰인 필체의 진위를 가려야겠어.’
마초가 눈을 도끼처럼 치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사미련에게 고개를 돌렸다.
“새끼! 변명할……?”
빽 소리를 내지르던 사미련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한순간 마초의 눈빛이 화염처럼 강렬하게 타오른 느낌을 받은 것이다.
“저, 저기 말이죠. 혹시 아저씨의 필적을 알고 있나요?”
“흥! 유서가 가짜라고 주장하면서 유언을 무시할 생각인 모양이지? 흐흥! 미안하지만 확실히 아버지의 필적이 맞거든?”
마초의 눈이 실망스럽기보다는 오히려 깊어졌다.
필적은 맞다고 해도 평소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사진이었다. 그런 사람이 유서라고 해서 점잖은 어투를 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더욱이 딸을 제외하고 자신에게만 서찰을 남길 이유도 없지 않은가.
‘좋아! 네가 무슨 이유로 흉계를 꾸몄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서찰 내용대로 따라 주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마초가 사진의 몸을 안아 들면서 그의 무릎과 발가락을 만져 보았다.
‘역시! 이건 누군가 일부러 편 게 맞아.’
사진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불시에 암습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음모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초 본인을 겨냥한 것이라는 것도!
‘도대체 흉수의 목적이 무엇이기에 나를?’
당장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곧 흉수가 내게 접근할 것이다.’
마초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사진의 몸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사진의 죽음에 대한 감흥은 별로 없다.
다만, 흉수의 목적이 자신이라면 사진은 개죽음을 한 셈이었다. 마초는 자기 때문에 사진이 죽었으니 어떻게든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흐흐흑…….”
마초의 뒤를 따라 나오던 사미련의 가녀린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면서 애절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의 시신을 따라가자니 새삼 설움이 복받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일까? 퍼뜩 들은 의문에 마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면서 사진의 시신이 재가 되어 공기 속을 떠돌았다. 사진 본인은 자신이 왜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아니, 죽은 다음에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의 혼백이 구천을 정처 없이 떠돌며 하소연하는 느낌에 마초의 마음도 울적해졌다.
‘큭. 쓸데없는 생각.’
마초는 어머니의 죽음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장성하기도 전에 세 번째의 죽음을 자기 손으로 처리해야 했다. 스스로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자위했지만, 힘이 없어 초래되는 무의미한 죽음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힘! 힘을 키워야 해.’
마초는 속으로 다시금 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