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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23화)
9장 희생양(2)
“엉? 너희들 아는 사이냐?”
석두한이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짝하고 손뼉을 쳤다.
“아하! 그렇구나. 너희들 춘양루에서 같이 일했지?”
마초가 씨익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더니 조비에게 말을 걸었다.
“조 형, 잘해 봐요.”
“아아. 뭐, 그야…….”
조비가 떨떠름하게 말을 하자, 석두한은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를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애들 일인데 굳이 아는 척할 것도 없다.
“자, 너는 밖으로 나가라.”
움메에…….
금방 죽을 것을 아는 것처럼 소의 울음은 구슬펐다.
석두한이 조비로부터 고삐를 넘겨받자, 그제야 오늘의 희생양이 될 소가 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비쩍 마른데다 희끄무레한 털도 듬성듬성 빠져 있는 볼품없는 소였다. 덩치도 겨우 송아지를 벗어난 것처럼 왜소해 보였다. 일부러 값이 안 나가는 소를 고른 게 분명했다.
“에게…… 이걸 잡으려고요?”
“새끼! 우습게 보지 마. 놈이 비록 병들었다지만 강짜가 있는 놈이야. 겉으로 보고 얕보는 것은 소인배나 어린애가 하는 짓이다.”
“예, 예…….”
“이 녀석이 불쌍해 보이면 더욱 빨리 보내 줘야 하지 않겠냐? 네가 이놈을 한 방에 해치우면 오늘 이놈의 고기를 가지고 잔치를 벌이는 거다.”
석두한이 도끼의 사용 요령과 소의 머리통 급소를 설명해 주는 가운데도, 소는 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 저 소는 장주의 기세에 눌려 꼼짝도 못하는 거야. 만약 장주가 손을 떼고 물러나면 길길이 날뛸 것이 뻔해.’
마초는 소의 다 죽어 가는 태도를 보고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야, 인마! 너도 한번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냐?”
석두한이 고개를 돌려 말하자, 조비가 입술을 꼭 깨물더니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켜만 주시면 저 자식보다는 잘할 수 있어요.”
“낄낄. 정말 재미있어. 요즘 애들은 도축하는 걸 우습게 여긴단 말이야. 자자, 그럼 네가 먼저 해 봐라.”
조비가 다시 방책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조심해. 도끼에는 인정이 없거든.”
석두한이 세 자 길이에 어른 얼굴 크기의 대부(大斧)를 건네자, 멋도 모르고 받던 조비가 비틀하다가 도끼를 발 위에 떨어뜨릴 뻔했다.
“으헤헤헤! 조심하라니깐. 괜히 도전했다는 생각이 들면 포기해도 좋아. 뭐, 사람은 포기할 때를 알아야 준걸이라는 말도 있고…….”
“아녀요. 해 보겠어요!”
조비가 자신이 너무 허술하게 도끼를 대했다는 생각에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도끼의 무게는 대략 오십 근은 넘을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해. 저 바보한테 질 수는 없어.’
조비가 온 힘을 다해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 올리자, 석두한이 얼른 고삐를 놓고 물러났다.
그와 동시 고개를 푹 숙이고 메메거리며 떨던 소의 눈동자가 노랗게 빛을 냈다.
“이까짓 병든 놈쯤이야!”
조비가 일부러 큰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내리쳤다. 하지만 그건 조비의 생각일 뿐.
빠각!
어느새 소의 날카로운 뿔이 둔탁하게 조비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크아아악!”
가슴에 시뻘건 피를 토하면서 조비의 신형이 한 길은 넘게 곤두박질쳤다.
우두두두!
소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조비를 박은 여세를 몰아 대여섯 발자국 뒤의 방책에 기댄 마초에게 거의 일직선으로 돌전했다. 소가 아니라 발광한 멧돼지가 날뛰는 것 같았다.
푸훗, 푸우.
소가 가까워질수록 소의 아가리에서 게거품이 밥솥에 끌어 오르는 뜨거운 물거품처럼 얼굴에 끼쳐 왔다.
“새끼! 피해!”
조비가 소뿔에 받힐 때만 해도 여유롭던 석두한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대체 저런 미친놈이 어디 있을까. 냉큼 목책을 넘어 피할 줄 알았더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다니!
석두한이 반대편의 목책을 뛰어넘어 들어올 때도 마초는 고민하고 있었다. 괜히 내공을 쓰게 되면 붉고 파란 기운이 발출될 것이다.
마초가 언뜻 조비가 놓친 도끼가 발밑에 떨어져 팽그르르 도는 것을 보았다.
“저, 저, 멍청한…… 아이구…….”
석두한은 진짜 속에서 열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조금이라도 옆으로 피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손으로 도끼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빠악!
석두한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저 소리는 분명 머리통이 깨지면서 나는 소리가 아니던가.
겨우 한 걸음 차이다. 그 한걸음 차이로 마초가 죽거나 병신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석두한의 가슴이 빠개진 듯 아팠다.
“우와아아!”
석두한은 처음 저게 무슨 소린가 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박수 소리가 요란하지 않는가.
“씨발. 대체 어느 새끼가?”
눈을 바락 뜨고 소리를 지르던 석두한의 뱁새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그 자리에 선 마초가 겸연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고 있는 것이다.
“소, 그 미친 소는……?”
석두한은 쉽게 소를 볼 수 없었다. 인부들이 웅성거리면서 황소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거다.
“야, 씨벌 놈들아! 나도 좀 보자!”
석두한이 성큼 걸어 십여 명의 인부가 몰린 곳으로 다가가자, 그들이 양쪽으로 쭉 갈라져 길을 터 줬다.
앞으로 고꾸라진 황소의 이마 쪽에 시선을 던진 석두한이 눈을 째질 듯 부릅떴다.
황소의 정수리에는 도끼날 길이의 자상이 나 있었는데, 겨우 약간의 핏물만 흐른 흔적이 나 있을 뿐이었다.
“이럴 수가?”
이걸 대체 우연이라고 봐야 한단 말인가. 흐리멍덩한 얼굴로 배시시 미소만 흘리고 있는 아이. 자신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미처 의식을 못하는 듯 도끼를 든 채 꾸부정하게 서 있었다.
“야, 인마! 너 정말 대단해.”
석두한이 가만있을 수 없어 마초의 어깨를 툭 치다, 얼른 손을 떼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화롯불에 손을 쑤셔 넣은 듯 태울 듯한 열기가 손바닥으로 끼쳐 오는 것이다.
‘이건 자연스러운 기운이 아니다!’
석두한의 눈빛이 묘하게 번쩍였다.
‘이 새끼, 진짜 주목할 필요가 있는 놈인 걸?’
왕수의 말이 아니라도 석두한은 새삼 그런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이놈이야말로 진짜 잠룡일지도 몰라. 흐흐. 그런데 그 잠룡으로 끝내야 할 거야. 크흐흐. 널 본 천의 희생양으로 낙점하지.’
석두한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기가 맴돌았다. 확실히 무공 면에서는 쓸 만한 재질을 갖고 있을지 몰라. 하나 저 흐리멍덩한 눈빛을 보면 결코 머리가 비상한 놈은 아니다.
‘백 년! 백 년 세월을 쥐죽은 듯 지내 왔어. 이젠 그 고단한 세월을 저놈을 내세워 끝낸다. 광명천하의 도래를 위하여!’
속으로 광명천의 구호를 외치며 마초를 보는 그의 눈빛이 무저갱처럼 깊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개월이 지난 새해 첫날 새벽, 토룡소의 밤은 더욱 짧아져서 희뿌연 여명이 서둘러 어둠의 장막을 몰아내고 있었다.
마초는 나이 한 살 더 먹었다는 감상보다는 최근 몸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후우…… 왜 이리 몸속이 펄펄 끓는 거지?”
마초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헛간에서 토룡소로 나갔다.
토룡소의 물살은 더욱 급해지고, 이제는 워낙 많이 봐서 정겹기만 한 깊은 호수의 괴어(怪魚)들이 눈에 불을 켜고 먹이를 찾고 있었다.
꼭 놈들의 화등잔 같은 눈빛에 의지하지 않아도 깊은 물속의 사물들이 뚜렷이 보인다. 마초는 그 현상이 거의 일 년 가까이 물속을 수시로 드나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부분 길이가 한 자가량인 놈들 중에는 가끔 삼사 척이나 되는 커다란 녀석들도 눈에 띈다.
놈들의 먹이는 덩치가 작은 버들치나 산천어, 열목어 등이었지만, 때때로 바닥에 깔려 있는 민물조개나 민물 게 등을 사냥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놈들의 움직임이 왠지 부산스러웠다.
거의 수십 마리의 화어(火魚)들이 뜨거운 물방울이 뽀글뽀글 솟아오르는 바닥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도 그 주변을 뱅글뱅글 도는 것을 보니 호기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얼마 후, 부글부글 솟아오르던 물줄기가 점점 거세지면서 물 끓는 소리가 제방을 무너뜨리는 파도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호수의 찬물에 익숙한 화어들이라 뜨거운 물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급히 물러났을 때,
푸파파!
물구덩이에서 튀어나오는 한 뼘 길이의 회초리 같은 놈이 있었다.
푸닥닥!
놈이 구멍에서 뛰어오르면서 졸지에 물속이 난리가 났다. 지렁이 같은 놈에게 수십 마리의 화어들이 마구 뜯겨 물속은 삽시에 뻘건 핏물로 화해 버렸다.
“저, 저놈은?”
몸 앞으로 밀려드는 수십 마리의 화어들로 주위가 아수라장이 되었고, 마초는 황급히 뒤로 헤엄치다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토룡왕! 바로 그놈이다. 어찌된 건지 몸 크기나 길이가 전에 비해 거의 절반으로 줄어 버렸다. 그런데 놈이 화어의 몸뚱이를 뜯어먹을수록 회초리 같은 몸뚱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제 주변은 화어의 시뻘건 핏물과 엉망진창으로 뜯겨 나간 시체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주위에 화어가 모두 사라지자, 물속이 갑자기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마치 산봉우리에 우뚝 선 산봉의 제왕처럼 대가리를 곧추세우고 있던 토룡왕의 눈길이 마초를 향했다.
반짝!
놈의 눈동자에서 발산된 것은 다름 아닌 이채였다.
끼리, 끼리리.
놈이 돌고래처럼 괴상한 소리를 발하면서 마초를 향해 천천히 접근해 왔다.
‘그 새끼, 진짜 괴상한 놈인걸?’
마초는 놈이 유유히 다가올수록 어쩐지 오른 손가락이 당겼다. 그러고 보니 오른손엔 놈이 뒤집어쓰고 있던 허물을 착용하고 있지 않은가. 놈의 시선이 마초의 얼굴에서 오른손으로 옮기는 것도 확연했다.
‘크으읍.’
마초는 더 이상 숨을 참지 못하고 물 위로 몸을 떠올렸다. 일각 정도는 물속에서 견딜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마초가 물 위로 떠올라 심호흡을 하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갑자기 다리가 착 감기는 느낌과 함께 몸이 물속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토룡왕이 꼬리로 다리를 휘감고 끌어대는 것이 분명하다.
“어, 어어?”
마초는 경악에 찬 소리만 내뱉을 뿐 고스란히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다리를 휘어감은 놈의 힘은 무서웠다.
‘이, 이런 놈이 왜?’
몸이 물속으로 깊이 끌려가자 마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만약 몸을 휘어감은 놈의 꼬리를 풀지 못한다면 고스란히 수장될 것은 뻔했다.
마초가 물속에서 놈이 빠져나온 구멍으로 끌려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마초가 단전에서 내기를 끌어 올려 양손으로 집중시키다 멈칫하고 말았다.
어느새 몸이 갑자기 위로 솟구치면서 몸이 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마초는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뾰족한 석주에 부딪히자 그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끄으으…… 그놈은 어디 가고?”
마초의 눈길이 급히 토룡왕의 종적을 살폈지만, 놈의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후우…… 근데 왜 이리 춥지?”
몸이 바짝 언 마초가 서둘러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겨우 일 장 너비의 용암 동굴 옆 한쪽에 시커먼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거기서 지독한 한기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찬 기운에 몸이 얼음덩이로 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마초는 몸이 허하기만 할 뿐 점점 시원하다는 느낌에 의아스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몸에서 들끓던 열기가 구멍 속에서 나오는 냉기에 식어 버린 모양이었다.
마초가 컴컴한 어둠 속을 내려다보다 구덩이 속에서 솟구치는 냉기가 어딘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하! 혹시 여긴 그 무저갱?”
마초가 저장소에서 보던 구덩이를 떠올리다가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어디 먹을 게 없을까?’
마초는 둘러볼 것도 없이 입만 다셨다. 용암 동굴이라 그런지 이끼 한 포기도 없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아, 아냐…… 이끼라면……?”
혼잣말로 중얼대던 마초가 몸을 길게 엎드려 눈으로 동혈 속을 더듬었다.
‘맞아. 동혈 벽에 다닥다닥 붙은 게 보이더니…….’
마초가 꿀꺽 침을 삼키면서 이끼를 오른손으로 더듬었다.
‘햐아, 그거 융단처럼 보들보들하네?’
이끼는 매서운 찬바람을 받으며 자라온지라 뻣뻣하리란 예상을 깨고 부드러운데다 습기마저 많아 보였다.
실은 이 이끼의 이름은 만년빙의(萬年氷衣)라 하여 만년빙원에서 나오는 냉기를 받아 자라난 것으로, 한공을 연마한 무인이 꿈에도 그리는 영초였다.
그런 걸 알 리가 없던 마초가 슬쩍 이끼를 뜯어 입안에 가져가다가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이끼가 입김에 닿아서 그런지, 갑자기 녹아들더니 줄줄 물로 화해 떨어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