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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



마신백문 1(1화)
서장 1


암흑의 공간.
끝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부터 길게 내려온 가느다란 빛줄기.
오직 그것만이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밝혀 주고 있다.
난, 나는 울고 있는가.
어찌하여 저리도 슬프고 서럽게 오열하고 있는가.
다가가 저 작은 나를 위로해 주고 싶건만, 나의 몸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작은 백문아, 아버지의 죽음이 그리도 고통스럽더냐.
한때는 저런 모습이었을 자신을 떠올리니, 그 서러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울보.’
응? 누구지? 누가 말을…….
‘사내놈이 눈물을 그리 쉽게 보여서야 쓰나.’
이 공간에 나 외에 누군가가 있다.
명백하게 비웃는 듯한 청년의 음성.
‘이봐, 이봐. 울지만 말고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누구…… 십니까?’
작은 백문이 형체 없는 음성을 향해 반응한다.
‘그게 중요해? 내 생각에는 별로일 것 같은데.’
‘방해하지 마세요. 저 죽을 거니까.’
‘스스로 생을 버리는 자는 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교에서 그리 가르치지 않든?’
신교가 가르치는 교리를 알고 있다, 저 목소리는.
‘뭔 상관이래요. 처음부터 신은 없는 것을.’
‘호오, 대단한데? 누군가는 여러 생(生)을 살고 또 살아서 간신히 깨친 진리를 고작 열 살에 불과한 네가 터득하다니.’
‘…….’
‘왜? 칭찬이라도 해 줄까?’
‘당신은 누구이기에 제 길에 서 계십니까?’
순간, 음성의 주인이 작게 웃는 것을 작은 백문은 분명히 느꼈다.
‘그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못마땅한 사람이라고 해 두지.’
‘그럼 그냥 갈 길 가세요. 저 방해하지 마시고.’
‘어쩐다? 나의 길과 네 길이 같은데.’
순간, 작은 백문의 얼굴이 짜증으로 물드는 것이 보인다.
‘그만 놀리고 가시라니까요. 제 공간에서.’
‘여기가 네 공간이라 누가 그랬지? 너를 초대한 것이 나인데.’
그 말에 작은 백문은 몸을 떨었다.
흡사 귀신을 본 양 잔뜩 공포에 질린 채.
‘아버지의 일은 나도 유감이다.’
‘아버지를 아세요?’
‘알다마다. 그분과의 마지막 대화는 내게 큰 기쁨이었단다.’
‘흑!’
작은 백문이 또다시 눈물을 쏟는다.
‘정말 못 말리는 울보로군. 천하의 요사제가 이런 약골을 낳았다니.’
‘크윽! 무시하지 마세요! 전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아들은 아비의 죽음이 슬퍼 스스로 생을 닫으려 하고 있지.’
작은 백문이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린다.
그에 아랑곳없이 예의 음성이 이어졌다.
‘왜? 무엇이 부족해서 스스로를 죽이려 하지?’
‘살아온 것들 모두가 의미가 없으니까요.’

‘만들어 줄까? 그 의미.’



서장 2


“아이야, 물었지 않느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청년이 늙은 음성에 감았던 눈을 떴다.
들릴 듯 말 듯 미약하기 그지없지만, 여지없이 귀를 파고드는 음성.
“너는 누구이기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느냐?”
청년은 그제야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음성의 주인은 오십대를 살짝 넘겼을 것이라 짐작되는 노인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장포에 황금색 불꽃 문양이 수놓아진 사이로 선명하게 새겨진 일신(一神)이라는 글자.
전설의 미남자이자 재사였던 송옥(宋玉)이 늙는다면 저런 모습일까.
고우면서도 총기 넘치는 풍모가 예사롭지 않았다.
노인의 뒤편으로 빽빽하게 늘어선 자들은 흰색과 붉은색이 섞인 복색으로 통일해 나름 엄격한 질서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백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호기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노오옴! 천하 백만 교도의 아버지이신 교사(敎師)께서 묻고 계신다!”
검은 장포의 노인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이 청년을 향해 호통을 쳤다.
그에 청년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누군가의 피와 살덩어리들로 범벅이 된 안면.
드러난 상체는 예리한 병장기에 베이고 단단한 무언가에 맞아 멍든 상처들로 가득했다.
청년은 슬쩍 오른손을 들어 광대뼈에 붙어 덜렁거리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손가락을 떼어 냈다.
그 바람에 손가락에 말라붙은 머리카락 몇 올이 함께 뽑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퍽!
검붉은 액체로 가득한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
청년의 주변은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피의 바다였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인간의 팔과 다리, 복부가 터져 조금씩 삐져나오는 창자, 뽑혀진 혀를 바라보다 생기를 잃은 눈알,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 탓에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끔찍한 얼굴들.
이미 사람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수십, 수백의 시체가 주위를 메우고 있었다.
이곳은…… 형용하기가 힘들 정도로 구역질이 나는 공간.
철퍼덕!
청년이 거칠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 거대한 광장에 펼쳐진 대학살을 본 저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스민 듯, 무리들이 움찔하며 각자의 병장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교사라 불린 노인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자 이내 차분한 자세로 돌아갔다.
이러한 소란에도 무관심한 듯, 청년은 천천히 노인을 향해 몸을 옮겼다.
길게 찢어진 등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오는 선혈이 생을 위협함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
이미 혈해가 되어 버린 바닥을 철퍽거리며 내딛는 청년의 발 옆으로 보글보글 올라오는 누군가의 마지막 호흡의 흔적이 보였다.
청년은 피의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유영하는 분홍빛 내장을 툭툭 걷어내며 조금씩 노인에게 접근해 갔다.
어느새 고요히 불던 바람이 사라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적막함이 감도는 공간.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척!
이윽고 청년이 노인의 일 장 앞에 멈춰 섰다.
노인의 옆에 있던 중년인이 또다시 무례를 탓하며 호통을 치려는 순간,
“정화(淨化).”
나직하게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청년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흐릿하게 비쳐 보이는 얇은 자줏빛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노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그녀를 의식한 청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여인의 존재감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는 것처럼.
“아직도 이 늙은이의 물음에 침묵으로 일관할 것이더냐?”
아까와는 달리 거듭 묻는 노인의 음성에는 알 수 없는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청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노인의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극공(極恭)의 예(禮).
청년은 고개를 조아린 채 축 늘어져 있던 왼손을 들어 올렸다.
“우오오…….”
중년인이 저도 모르게 묵직한 신음을 뱉었다.
청년이 높이 들어 올린 왼손에는 피범벅이 된 모가지가 들려 있었다.
반쯤 잘라 낸 후 거칠게 잡아 뜯은 듯, 척추에 이어졌을 신경과 근육이 흔들거리고 찢어진 경동맥에서는 여전히 붉은 핏물이 떨어지는 비참한 수급(首級).
“……의 주인.”
또다시 울리는 여인의 음성.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신비롭고 아름답기까지 한 목소리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희고 붉은 무리들이 숨을 몰아쉬었다.
묘한 흥분과 감동, 격렬한 전투 본능과 눈앞의 청년에 대한 경외감에 빠진 듯 잘게 몸을 떠는 것이었다.
“신의 대리자이시며 백만 형제자매의 아버지이신 교사시여. 저는 한동백가의 자손, 백무(白舞)의 아들…….”
청년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노인과 정확히 마주한 시선에는 기이한 의지가 들어 있었다.
“백문(白文)이라 합니다.”
“백문…… 백문.”
누군가가 그 이름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듯 여러 번 되뇌었다.
“또한…….”
청년의 이어지는 말에 웅성거리던 모두가 입을 닫았다.
“신을 섬기고 영생의 구원을 만방에 떨칠 오사제(五司祭)의 일인이자, 어둠의 수호자이며 신의 이면에서 영원한 암흑으로 스스로를 불태울 마(魔)의 계승자.”
“꿀꺽!”
“육록(陸綠)을 이어 당대 위(位)로 신의 부름을 받은…….”
찰나, 시큼한 냄새가 살짝 풍겼다.
누군가 공간 전체를 침묵하게 하는 전율에 오줌이라도 지린 것일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일이었지만, 그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사제(魔司祭) 백문. 신과 대리자께 깊은 존경을 바치며, 신의 이름으로 배덕의 죄를 지은 반도를 벌하였음을 아뢰옵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던 때
나는 물었다.
‘아버지, 신은 어디에 계신가요?’라고.
잘게 부서진 칼날처럼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을 등지고
서책을 읽으시던 아버지.
나의 물음에 잔잔한 웃음만을 머금고
가까이 오라 손짓하시던 그 모습.
그리고 그 옆에서 슬쩍 드러난 치아를 가리시며
고개를 돌리던 어머니.
나는 작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또 물었다.
‘저기요?’라고…….
나를 조용히 안아 무릎에 올려놓은 아버지께서는
가늘고 주름진 손으로 나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신은 여기에 계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