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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2화)
1장. 발견(1)


“이여! 우리 문아(文兒), 학당에 가니?”
“아오, 아(兒) 자는 좀 빼 주세요. 나도 이제 다 컸는데.”
언덕 뒤편의 작게 우거진 숲길을 헐레벌떡 달려가던 백문은 동네 아저씨 장구(張口)의 반가워하는 모습에 같이 웃어 주며 답했다.
“다 크긴, 이놈아.”
백문은 머리를 슬슬 쓰다듬는 장구의 손길에 정다움을 느끼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거, 백 처사 어른께 어제 일 감사드린다고 말씀 전해 주려무나.”
“옙!”
손을 흔드는 장구를 뒤로한 채 작은 다리를 놀려 숲 건너 학당으로 뛰어가는 백문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눈을 찌르는 듯 느껴졌다.
탁탁탁탁!
그렇게 한참을 달려갔을까.
백문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것에 순간 당황했다.
“어, 어라?”
자신의 키보다 두 배는 더 높게 떠오른 백문은 이내 기현상의 원인을 깨닫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악(岳) 의숙!”
정확히 눈높이에 맞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무표정한 사내.
마른 체구에 딱 달라붙는 짙은 회색 무복(武服)이 인상적인 키 큰 남자의 눈은 언뜻 살펴보면 매의 그것을 닮았다.
중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색깔이 아닌, 살짝 노란 빛깔을 뿜어내는 동공.
이 사내를 잘 모르는 이가 마주한다면 분명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리고도 남으리라.
악요(岳曜).
매의 눈을 한 남자의 이름이다.
“얼마 만의 방문이십니까?”
백문이 나름 의젓한 척 격식을 차려 물었다.
그 말에 한쪽 입술을 살짝 치켜올린 악요가 백문을 양어깨 위에 태우고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스쳐 가는 바람에 묶어 올린 머리가 흔들거리자 백문이 웃음을 터트렸다.
작은 걸음으로는 최소 이각 이상을 가야 아버지의 학당에 이를 수 있겠지만, 지금 악요의 속도로는 그 절반도 채 안 걸릴 것이다.
어느덧 숲길의 끝이 보였다.
신나게 소리 지르던 백문의 입이 꾹 닫혔다.
사내가 경망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아는 탓에 얌전한 척을 하는 것이었다.
화악!
나뭇잎에 가려졌던 빛살이 순간적으로 눈을 찌르자 코를 찡그리며 눈을 감는 백문.
오늘따라 정말로 저 태양이 얄밉기만 했다.

학당이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겨우 진흙을 이겨 층층이 쌓아올린 후 회칠을 한 두 채의 작은 가옥과 반경이 채 오 장도 되지 않는 공간을 두르고 있는 작은 담장이 전부인 이곳은 아버지가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해 낸 곳이다.
아(亞) 자 형태로 나무를 대 종이를 바른 작은 방문 안쪽에서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저들도 이 고을을 이끌어 갈 동량(棟梁)으로 거듭날 테지.
“넌 안 들어가 볼 테냐?”
묵직한 저음으로 악요가 백문에게 물었다.
“늦었어요.”
힘없이 말하는 백문을 보며 악요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문은 최근 단체 수업에 꽤 많이 지각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기 체조에 흠뻑 빠져 있는 탓이었다.
“뭐든지 적당히 해. 특히 네 나이 때는.”
“헛, 저번에 아버지와 말씀하시기로는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뭘?”
“결사(決死)의 각오. 의숙께서 말씀하셨으면서.”
악요의 눈이 빛났다.
이 어린 아이가 어찌 자신들의 대화를 이해하고 있을까.
“경우에 맞지는 않구나.”
악요는 백문의 등을 툭툭, 치며 방으로 시선을 주었다.
의형(義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눈을 다시 백문에게 돌린 후, 고개를 숙여 작은 귀에 입을 가져다 댄 악요가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때가 오지 않기만을 바란단다. 죽음을 쉬이 입에 올리는 순간도.”
순간, 오싹하는 무언가가 백문의 등줄기를 쓸고 지나갔다.
가끔, 아주 가끔 이 표정 없는 의숙은 주변 공기를 차갑게 식히는 재주가 있었다.
자신과 아버지에게는 무척 잘해 주는 것이 확실하지만, 지금처럼 낮게 깔리는 음성으로 말할 때면 정말로 오줌보가 간질간질해지곤 했다.
“됐고, 따라오너라. 보아하니 지금 들어가기는 틀렸고, 수업도 길어질 듯하구나.”

휙!
학당에서 조금 떨어진 뒷간에 이르자 백문의 귀에 작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몸을 굽히는 백문의 뒷머리로 검은 것이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고!”
“쯧.”
백문의 앓는 소리와 악요의 혀를 차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방금 지나간 검은 것은 분명 악요의 주먹.
백문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누가 굽혀 피하라 했든.”
“말씀도 안 주신 분이 누구신데요?”
악요는 뒤통수를 긁으며 항의하는 백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르고 졸라서 가르쳐 주었더니, 배은망덕(背恩忘德)이로세.”
“아뇨! 그럴 리가요.”
백문이 손을 휘휘 저으며 악요의 말을 부인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악요가 다시금 오른손을 살살 흔들었다.
악요의 손을 보며 긴장한 백문이 다리를 벌려 자세를 잡는 순간, 또다시 검은 그림자가 백문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틱!
살갗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백문의 오른쪽 뺨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헐! 비겁해요!”
오른손을 주시하던 백문은 갑작스레 날아든 왼 주먹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비겁? 오늘 좀 맞아 볼 테냐.”
“헙!”
백문이 펄쩍 뛰어 몸을 뒤로 날리며 엄살을 부렸다.
하지만 백문은 알고 있었다, 악요는 절대 자신을 구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와 함께 백문의 머릿속에는 악요와의 첫 대면이 떠올랐다.

* *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이 차가운 남자 악요는 소리 없이 찾아왔다.
늦은 밤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깬 백문이 몸을 비비며 본 것은 멀리 산등성이에 걸린 찬란한 보름달을 등지고 선, 길고 검은 그림자였다.
흐린 눈에 비친 그림자를 본 백문은 덜덜 떨리는 작은 입에서 신(神)을 찾았다.

무의식적인 공포.
다 자라지 못한 아이의 악몽.

마치 지옥에 떨어진 팔백만 마귀 중 하나의 현신을 본 양 끝없이 떨고 또 떨었다.
검은 마귀는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없이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얼어붙은 백문의 다리가 풀려 쓰러지는 순간,
그 몸을 잡아 준 존재는 아버지였다.
언제 밖으로 나오셨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계셨던 것인지…… 백문의 머릿속은 어떠한 사고도 할 수 없었다.
“밤이 차구나.”
다정한 그 음성을 맞이하자 온몸이 나른해졌다.
동시에 백문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잠들어 버렸다.
방금 전까지 보고 느꼈던 것들이 모두 꿈이기를 기원하며, 그렇게 백문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차분한 숨을 뱉었다.
다음 날, 아침 문안을 드리기 위해 아버지의 방을 찾은 백문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피에 잔뜩 절은 채 여기저기 찢어진 흑색 무복을 걸친 마귀.
꿈이라 여기며 안도했던 전날의 공포가 되살아난 듯 입을 벌린 채 꺽꺽대는 백문 앞에서 아버지와 마주 앉은 마귀의 고개가 서서히 자신을 향했다.
“뭘 그리 놀라나?”
마귀의 입에서 불길처럼 쏟아지는 중저음의 목소리.
덜덜거리는 손가락을 뻗어 마귀를 가리킨 백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허허, 아직 담이 작은 아이라네. 문아, 이리 오너라.”
아버지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른 백문이 그제야 마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직도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흑의(黑衣)는 먼지와 땀, 피가 한데 엉겨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 반쯤 돌린 옆얼굴도 여기저기 상처 난 채 피딱지가 가득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백문을 의식해서일까.
마귀가 슬쩍 움직였다.
그에 백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이 꼬여 넘어졌다.
“담이 작은 게 아니라 아예 없어 보이는군요. 호부(虎父)께서 묘자(猫子)를 두셨습니다그려.”
백문을 비웃으며 마귀가 시선을 돌렸다.
“큼.”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며 따가운 눈길이 느껴졌다.
서둘러 일어나 먼지를 털고 자세를 바로잡는 백문.
혹여나 마귀의 몸에 닿을까 조심스레 아버지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님 면전에서 이 무슨 추태더냐. 어서 몸 정갈히 하고 인사 올려라.”
근엄하게 백문을 꾸짖으며 아버지가 예를 보이라고 명했다.
백문이 마귀를 살짝 흘기며 절을 올리자 아버지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대송(大宋) 군위(軍衛) 연(淵) 장사시다.”
“백문(白文)이라 합니다. 군(軍)의 높으신 연 어른께 인사 올립니다.”
앳된 목소리로 백문이 연 장사에게 예를 보였다.
“아직 충년(沖年)에도 이르지 못했건만, 배움의 깊이가 보통이 아닌 듯하구나.”
연 장사의 눈빛도 진중해졌다.
백문이 어리긴 하지만 문인의 예를 갖추었으니 그에 합당한 모습을 보여야 할 터.
이내 자세를 바로 한 연 장사가 얼굴을 마주해 숙여 보였다.
“귀생의 예를 받소이다. 본관(本官) 악요(岳曜). 어린 영웅께 인사드리오.”
악요? 분명 성이 연(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옛 추억으로부터 받은 이름이외다.”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하는 악요였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한 듯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여 더 이상의 의문을 잘라 버렸다.
“저기…….”
백문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백문을 동시에 바라보는 두 사람.
“의복의 손상이 매우 심해 보입니다. 따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악요도 자신의 몸을 한 번 살펴본 뒤 백문에게 부탁한다는 뜻을 보냈다.
백문은 종종 뒷걸음으로 방을 나서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귀가 아닌 인간임에 깊이 안심하며 아버지의 방에 시선을 던졌다.
대송의 군위라면 무장이다.
아직 군에서 정식 편제를 받지 못하고 지휘관을 보좌하는 자리.
그런 귀한 몸이 어찌 이런 시골에, 그것도 왜 하필 우리 백가에?
조금씩 드는 의문을 뒤로하고 백문은 서둘러 의복을 모아 놓은 윗방으로 몸을 옮겼다.
백문과 악요.
둘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악요는 자신들과 함께 몇 달을 보냈다.
악요가 아버지를 찾아온 이유.
그것을 짐작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이면 아버지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으니.
아버지의 그 아름답던 춤.
악요는 그것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이 틀림없다고 백문은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늘 편안하게 거동하는 아버지와 날렵하지만 어딘가 딱딱한 악요.
아버지에게 춤을 사사(師事)했다면 저런 부자연스러움은 없을 텐데.
그런 작은 부분까지 눈에 들어오는 자신이 오히려 이상하련만, 그것보다는 악요를 관찰하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어느 날, 악요는 소리 없이 사라진 뒤, 몇 달이 지나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번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비교해 무언가 거대한 변화를 겪었음을 백문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함께 보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한 것이 일 년.
백문은 그제야 진정으로 깨달았다.
악요는 아버지에게 춤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님을.
도전.
악요는 아버지에게 도전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악요는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었다.
오로지 순수한 힘으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악요의 모습은 언제나 날카로운 바늘과 같았다.
그리고 새로이 만날 때마다 더욱 다듬어져 끝이 가늘어지는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