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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3화)
1장. 발견(2)


백문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가 가진 능력이 보통이 아님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밤을 보내고 돌아온 악요는 한결같았다.
피, 그리고 상처.
영락없는 패배자의 형상.
그를 통해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춤사위가 자신만의 환상이 아님을 인식하는 백문이었다.
아버지는 강자(强者)다.
누구에게도 쉬이 어깨를 허락하지 않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무궁한 기쁨이 백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다.
그리고 동시에 밀려드는 의문.
아버지는 저러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왜 이런 외진 곳에서 문(文)에 힘쓰고 계신 걸까.
자신의 이름, 문(文).
혹,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이름 그대로 힘을 버리고 문인의 길을 걷고자 하심일까?
책으로만 보던 무림의 기인이사가 아버지가 아닐까?
자신만의 작은 비밀을 간직한 아이처럼 백문은 하루하루 아버지와 악요를 보며 이 기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함께한 시간이 길면 그 마음이 피를 나눈 것보다 더 가까워진다고 했던가.
어느새 악요는 아버지와 형제지의(兄弟之義)를 맺었고, 종국에는 신(神)을 받아들여 신교의 형제가 되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기뻐하고 신난 것은 바로 자신, 백문이었다.
어머니를 먼저 신께 보내드리고 가족이라고는 아버지와 자신밖에 없던 세월을 지나 이제 든든한 숙부가 생겼으니.
항상 굳어 있지만 자신을 바라볼 때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백문은 알고 있었다.
그 후 악요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속한 가문이 종군의 명을 받아 북방에서 거란을 막았다고 한다.

* * *

“힘드냐?”
엎드려 뻗은 자세로 열심히 팔을 굽혔다 펴고 있는 백문에게 악요가 물었다.
“끙! 아뇨!”
“그럼 백 회 더.”
“컥!”
백문의 가슴과 배가 턱,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쳤다.
“아, 의숙! 저 아직 어리다니까요.”
“내가 네 나이 때는 쉬지도 않고 만 회 정도는 거뜬히 넘겼다. 한데 겨우 여기서 포기하겠다고?”
은근슬쩍 일어나 흙먼지를 털어 내는 백문을 본 악요가 혀를 끌끌거렸다.
“제가 알기로 무림인들은 내공이란 것을 이용해 신체를 단련한다는데, 굳이 이렇게 힘들게 할 필요가 있어요?”
“…….”
말이 없는 악요의 모습에 백문은 슬슬 불안해진 듯 신나게 놀리던 입을 다물었다.
“내 생각이 짧았나…….”
“예?”
“아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돌아서 버리는 악요.
자신이 뭔가 크게 잘못했음을 짐작한 백문은 그저 땅을 바라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함께 학당의 문이 열렸다.
수업이 끝나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밝기만 했다.
“자네 왔는가.”
늘 그대로인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수업에 늦어 혼날 것을 떠올린 백문이 허겁지겁 학당 쪽으로 발길을 놀렸다.
“놈!”
갑자기 백문을 향해 호통을 치는 아버지.
대호를 마주한 쥐처럼 백문이 훅 움츠러들었다.
“형님, 문이가 늦은 건 저 때문입니다.”
악요가 얼굴을 살짝 돌려 눈을 찡긋했다.
역시 의숙은 언제나 내 편이라니까…….

“그래, 이번 종군은 편안하셨는가?”
고아한 서책들의 향이 물씬 풍기는 방에서 악요와 마주 앉은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여셨다.
“오래 있지는 못할 겁니다. 벌써부터 다음 종군에 연 어른을 또 거론하고 있다지요? 이번에는 총지휘관으로 직책을 받을 듯합니다.”
“고생이 많으이.”
아버지가 악요를 유심히 관찰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혹, 어떤 상처라도 입었을까 염려하는 듯.
“그나저나 형님.”
“말씀하시게.”
“요즘 관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
악요가 옆에 앉은 백문을 돌아보았다.
자리를 비워 달라는 뜻이었다.
무언의 강요에 불만 섞인 표정을 짓던 백문이 결국 한숨을 쉬며 방을 나섰다.
‘꼭 이럴 때면 두 분이서만 얘기하신다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른들의 세계에 아이가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심심해진 백문의 눈에 창고로 쓰는 작은 토옥이 들어온다.
‘독서나 해야겠다.’
삐그덕.
문이 열리고 조금 전 아버지의 방에서 느낀 서향보다 훨씬 강한 책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문인이라면 늘 책을 곁에 두고 성현들의 말씀을 줄줄 암송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아버지다.
그런 영향으로 백문도 지금처럼 시간이 남을 때는 독서에 빠져드는 습관 아닌 습관이 생겼다.
백문은 오늘은 어느 분의 말씀을 읽을까 하는 얼굴로 토옥을 가득 채운 책 사이를 누볐다.
“옳지.”
백문의 손에 잡힌 책은 대당(大唐)의 학자 손사막(孫思邈)이 집필한 천금방(千金方)이라는 의서(醫書)였다.
평소 의술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백문이지만 오늘따라 조금 흥미가 동한 것이었다.
‘뭐, 성현의 말씀은 아니지만 한 번 정도는 읽어 봐도 괜찮겠지.’
백문은 역시나 손이 가지 않아 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의서를 입으로 후후 불고 손으로 털었다.
그리고 천금방을 들고 자신의 개인 공부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그러던 중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의서가 있던 자리로 눈을 돌렸다.
기분이 묘했다.
무언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 요상한 느낌.
백문은 발가락 끝에 힘을 주어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누렇게 바래 본래의 색을 살피기 힘든 죽간(竹簡) 뭉치 몇 개가 보였다.
‘처음 보는 건데…….’
아무리 관심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곳을 출입한 지 벌써 오 년이 넘었다.
한데 처음 보는 죽간이라…….
그 자체도 처음 보거니와, 옛 죽간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아버지에게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 따위는 없을 텐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수가 꽤 많았다.
의서와 다른 잡서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자리 뒤편으로 대충 보아도 열이 넘었다.
‘혹시나 이걸 손대면 아버지께 꾸중을 들을까? 에이, 뭐, 따로 말씀이 없으셨으니.’
살짝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무언가에 끌려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 기분.
마치 죽간들이 어서 세상의 빛을 보여 달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에라!”
결심을 굳힌 백문이 먼지를 끌며 죽간 하나를 빼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지만 누가 볼세라 서둘러 품 안으로 죽간을 숨기고, 서둘러 토옥을 빠져나온 백문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잠시 숨을 돌리며 땀을 훔쳤다.
“후우…….”
옆방에서 두 사람이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심각한 내용이리라.
백문은 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죽간을 묶은 천을 조심스레 풀었다.
빠직.
곧게 자른 죽간의 일부가 백문의 작은 힘에 눌려 길게 쪼개졌다.
“흡.”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백문.
“젠장.”
만약에 아버지께 걸리면 단단히 혼날 것이 눈에 선했다.
이대로 다시 묶어 제자리에 두어야 하는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고, 또 죽간에 쓰인 내용을 확인하고 싶다는 유혹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이번에는 정말, 정말로 조심해서 죽간을 펼쳤다.
오래되어 삭아 버린 작은 끈들이 상할까 봐 바닥에 천천히 하나씩 늘어놓았다.
전서체(篆書體). 그것도 진시황 이전에 쓰였던 대전(大篆)이다.
하나 전서 정도야 다양한 학문을 갈고닦은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을 강하게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만 같은 친근감.
그리고 고대의 감추어진 비밀을 마주했다는 기쁨.
백문은 눈을 좁혀 아주 작게 쓰인 글자들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아니면 보관 방법의 문제 때문인지 명확하게 보이는 글자들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이래서야 어디 읽기라도 하겠어?’
“비(秘)…… 제(祭)…… 양(梁)…… 백(白)…….”
중간 중간 희미한 글자들을 넘기고 그나마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글자들만 읽으며 백문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고! 못해 먹겠다. 흡!”
백문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치다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작게 들리던 아버지와 악요의 대화가 멈춘 것이다.
놀란 토끼처럼 얼어붙은 백문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옷을 벗어 펼쳐 놓은 죽간을 덮었다.
잠시 후, 아버지 거처의 방문이 열렸다.
후다닥 악요를 배웅하기 위해 방을 나서는 백문.
그런 백문의 귀로 아버지와 백요가 나누는 인사가 들려왔다.
“길게 머물다 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되었네. 신께서 우리를 늘 안고 계시니 자네가 어디에 있든 모두 한 이불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네.”
“보중하십시오. 그리고 제가 드린 말씀을 잊지 마시길.”
아버지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악요는 또 떠나려는가.
이번 재회는 무척이나 짧았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 주기라도 하듯 정이 담긴 악요의 음성이 이어졌다.
“문이는 다음에 볼 때까지 만 회. 그 아래로는 인정 안 한다.”
“칫, 멋없어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리는 악요.
저물어 가는 태양을 마주한 채 긴 그림자를 자신에게 드리우는 저 강인한 거인의 모습에 백문은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문아.”
“예, 아버지.”
“수업을 걸렀으니 합당한 벌을 받자꾸나.”
벌써부터 종아리가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백 처사(處士)라 칭했다.
벼슬길에 올랐으나 스스로 낙향하여
이 작은 고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생의 사명인 양
당신께서는 부귀를 물리치고 낮은 자리를 택하셨다.
학당이 없어 멀리 있는 큰 고을까지 나가야 했던 사람들 모두는 그러한 아버지의 선택에 환호를 보내며
고을에서 제일 좋은 땅에 집을 지어 주었다고 했다.
아버지께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인재를 키워 세상에 내놓으셨고,
그들이 또 여러 지역에서,
때로는 관(官)에서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나는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