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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4화)
2장. 시작되는 비극(1)


쫑긋.
숨소리가 규칙적인 것을 보니 깊게 잠드셨음이 확실했다.
만약 지금 불을 밝힌다면 혹여나 눈치를 채실까?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못난 자식이라도 된 양 모든 행동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백문은 작은 초에 불을 놓고 홍색의 종이로 가려 외부로 빛이 새어 나가는 것을 최대한 차단하며 죽간을 펼친 뒤, 낮에 대충 확인했던 글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하나하나 짚어 보며 흐린 눈을 끔벅거렸다.
‘제(祭) 자 앞에 이거는…… 보자, 가(可)? 아니면 사(司)? 아오!’
흐릿한 글씨에 제 성질을 못 이겨 분통을 터트리려던 찰나,
번쩍!
뇌 전체를 무언가 한 번 훑고 지나가는 듯한 짜릿함이 느껴졌다.
치밀어 오르는 희열감에 저도 모르게 가슴까지 떨렸다.

사제(司祭).

신의 대리자인 교사(敎師)를 보필하며, 내려 받은 지혜와 무한한 능력으로 신을 찬양한다는 다섯 명의 자녀.
신교에서는 교사가 신의 부름을 받게 되면 그 자리를 이어 나갈 후계자를 일컬어 사제라 했다.
‘왜 사제라는 단어가 이 오래된 죽간에 적혀 있을까? 혹시 우리 신교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 같은 건가?’
슬슬 죽간들의 정체에 대해 가닥이 잡힌다.
일종의 역사책.
따지고 보면 교에 있어서 정말 귀중한 사료가 분명할 것이다.
이제 죽간은 중원에서 사용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니.
특히 눈앞의 것처럼 기원이 오래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여겨질 근거가 있다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찌 한낱 교인에 불과한 아버지가 보관하고 있었을까?
새삼 아버지에 대해 자신이 너무 모르는 게 많음을 깨닫는 백문이었다.
사제라…….
백문이 알기로 현재 총단에는 흑(黑), 천(天), 홍(紅), 십(十), 이렇게 네 명의 사제가 교사를 보필하고 있다.
신의 이면(裏面)이라 불리는 마(魔)사제는 오래전 벌어진 모종의 일로 인해 지금은 행방불명 상태.
끙끙거리며 죽간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파악하고자 노력하던 백문은 시간이 꽤나 흐르자 생각보다 많은 글자들을 나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
백문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늘 새로운 학문과 교감할 때는 조급함을 버리고 만 리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지금은 일단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일의 일과를 위해 수면에 들어야 할 때였다.
백문은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주섬주섬 죽간을 접어 방 안에 정돈되어 쌓인 서책들 뒤쪽으로 숨겼다.
그런 뒤, 잠깐 아버지의 거처 방향을 응시하던 백문이 이내 등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네.’
혼자만의 비밀을 발견한 소년의 두근거림과 함께 고요 속으로 빠져드는 밤이었다.

* * *

꿈일까.
은은한 묵향이 코를 간질이고 차갑지만 불쾌하지 않은 바람이 잠시 방 안을 채웠다.
나른한 몸이 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묵을 지키며 작은 소년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무언가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갈히 다듬어 주었다.
그 정다운 손길에 기분이 좋아지는 백문.
속삭이듯 스며드는 누군가의 음성은 동굴 속 물방울이 떨어져 퍼지는 진동과도 같이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분명하게 의식을 자극하는 본능은 그 음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에 저장하고 있다.
‘문아, 내 사랑하는 문아.’
‘나를 용서해 다오. 네 어미를 용서해 다오. 세상을 용서해 다오.’
‘교(敎)를 용서해 다오.’

‘신(神)을 용서해 다오…….’

아버지?
나의 꿈에 어찌 아버지께서…….
용서라니요. 아버지를, 어머니를, 세상을 용서하라니요.
신? 이 세상의 주관자시며 유일한 절대적 존재인 신을 어찌 미물에 불과한 제가 용서하란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아버지이! 어디 가세요!
저를 버리고, 이 불쌍한 아들을 두시고 어디를 홀로 가십니까?

아버지!

“헉!”
백문은 눈꺼풀을 찌르는 강한 햇살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창을 통해 방 안으로 쏘아 들어오는 태양의 긴 줄기.
그 각으로 보아 지금은 중천(中天)이 틀림없다.
“아아악! 미쳤어, 미쳤어!”
늦잠을 자 버렸다.
매일 아침, 달이 채 사라지기 전에 깨어나 신에게 기도하고 몸을 깨끗이 닦은 후 아버지께 문안을 드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거늘, 백문은 학문을 닦는 신의 자녀로서 큰 실수를 범했다.
“어제 그렇게 혼났으면서! 아오!”
우당탕, 백문은 난리법석을 떨면서 방을 뛰쳐나갔다.
역시나 아버지는 거처에 계시지 않았다.
이미 학당으로 가셔서 꼬물꼬물한 아이들에게 옛 어른들의 말씀을 강의하시겠지.
문인 가문의 자손답지 않게 무척이나 경망스럽게 뛰어다니던 백문이 대충 의복을 걸치고 학당이 있는 숲 너머로 후다닥 달려갔다.
송골송골 맺히던 땀방울은 어느새 줄줄 흘러 달려가는 뒤편으로 낙숫물처럼 흩어져 나갔다.
“헉! 헉!”
두어 번 넘어지고 일어나 정신 빠지게 뛰어가던 백문.
그 눈에 멀리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장구, 동표(童票),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몇 명의 사내들과 십여 명의 관병들.
의아한 생각이 잠시 머릿속에서 일었지만 지금 그것까지 고민할 겨를은 없었다.
탁탁탁탁!
가까이 다가온 무리들 앞에 선 장구와 동표를 향해 크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지나치려 했다.
한데 그때, 백문의 귀에 장구의 음성이 들렸다.
“문아, 잠시만.”
“예?”
급해 죽을 지경이건만 어른의 부름을 소홀히 할 수 없어 달림을 멈췄다.
“헥…… 헥…….”
가슴을 퉁퉁, 치며 숨을 몰아쉬는 백문의 주변으로 관병들이 넓게 퍼졌다.
그러나 백문은 그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지 말을 건 장구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딜 그리 급하게 뛰어가누? 작은 발에 불나겠다.”
뭐야? 지금 내 모양새를 보고서도 저런 말이 나오나. 딱 보면 척이지.
“아아, 장 아저씨. 저 빨리 학당에 가 봐야 해요. 급하신 일 아니면 가 볼게요.”
“잠깐만. 아직 이 어른께서 볼일을 마치지 못했는데 어린 것이!”
장구는 평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 생경한 모습에 백문은 일순 당황하여 얼어 버렸다.
턱!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백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놀라 돌아본 눈에 들어온 이는 동표.
그는 집안이 어려워 늘 백가에서 쌀을 빌어다 먹고 노동으로 대신 갚아 오던 이였다.
“동, 동표 형.”
“시끄럽다, 어린 마귀 놈아!”
마귀? 뜬금없이 왜?
“헤헤, 찰장(察將) 어르신. 이 꼬맹이입니다요.”
장구의 얼굴이 요상하게 일그러지며 비굴한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보냈다.
벌어진 입에서 꺽꺽 소리만 내던 백문의 시선이 그제야 관병들 앞에 서 있는 평복의 사내에게 닿았다.
“틀림이 없는가?”
“그렇습니다요. 요 어린것이 마귀 두목 놈의 아들이 맞습니다요.”
“잠깐만요! 장구 아저씨, 마귀 두목이라니요?”
서둘러 소리치는 백문.
다 크지 않은 머리로는 지금의 사태가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찰장이라 불린 사내가 천천히 다가와 백문의 앞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백문과 얼굴을 마주했다.
“백문(白文). 오래전 황궁위리(皇宮委吏)였던 백무(白舞)의 아들. 맞나?”
가까이서 본 찰장의 인상은 강인했다.
위로 솟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빛 앞에서는 다 자란 어른이라도 사실을 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맞는…… 데요.”
마지못한 백문의 대답에 찰장이 몸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 옆에 있던 두 명의 사내가 양쪽에서 백문을 강하게 붙잡았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끌고 가.”
짧은 말을 남긴 채 찰장과 관병의 일부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백문은 기가 막혀 말조차 제대로 못했다.
그의 눈에 멀어지는 찰장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헤헤거리는 장구와 동표의 모습이 들어왔다.
“장구 아저씨! 지금 이거 다 장난치시는 거죠? 에이, 재미없어요.”
“미친!”
퍽!
장구가 침을 뱉으며 백문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켁!”
불시에 충격을 받은 백문은 쓰디쓴 위액을 게워냈다.
“아직도 순진 떨고 자빠졌네. 이놈아, 다 털렸어.”
“커윽…… 무, 무슨 말씀이세요?”
“네놈이랑 애비, 더러운 마종들. 그동안 고을 사람들 몰래 얼마나 못된 짓거리를 했는지 다 들통 났다고.”
쿵!
“마종이라뇨? 이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아버지와 제가 어찌…….”
스윽.
백문은 서늘한 무언가가 목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확 돋았다.
“말이 많다. 가자.”
자신을 붙잡고 있는 사내 중 한 명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의 행동에 장구와 동표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너희 둘은 이곳까지 안내해 준 상을 따로 내릴 터이니 현청에 가서 대기하도록.”
“아이코, 별말씀을.”
장구의 눈가에 주름이 가득 생겼다.
저런 모습, 정말로 처음 보았다.
정말로 어제까지 자신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보이던 그 사람이 맞는가.
그 옆에서 흐르는 침을 스윽 닦으며 헤헤거리는 동표.
백문은 알 수 없는 역겨움에 구역질이 절로 났다.
관병이 쥔 창극에 반사되는 햇빛이 머리를 어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