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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25화)
외전. 백무(2)


“흠, 향이 일품입니다.”
“군산은침(君山銀針)이라 한다.”
최근 아들 백문에게 다례를 가르치면서 쏠쏠한 재미를 느끼던 백무다.
어린것이 어찌 차 맛을 아는지 매일 자신의 옆에서 군산은침을 찾는 것을 보노라면 절로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다시 묻겠다. 넌 누구냐?”
“에구, 아직 쓴맛 뒤의 흥취를 채 보듬지도 못했습니다.”
“인내를 시험하는 것인가?”
드드드드드드!
딱 청년이 위치한 공간만큼만 진동이 생긴다.
원하는 곳에만 기를 집중해 공간을 왜곡시킬 수 있을 정도의 무력.
“허거거! 네! 네! 말씀 올리겠습니다.”
청년이 짐짓 엄살을 부리며 찻잔을 내려놓는다.
“소인 위진(衛陳), 낮은 곳에서 세상을 지키는 사제 중 한 분이신 요사제 백무 님께 인사 올립니다.”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극공의 예를 바친다.
“위진, 네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다.”
정체를 밝히라는 백무의 말.
위진이 고개를 들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백무가 위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뚜렷한 이목구비, 얇지만 은은한 분홍색 입술, 큰 눈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빛나는 물기를 머금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 있는 검고도 혼탁한 기운은 백무의 심장을 은근히 죄어 온다.
“어둠의 총아(寵兒)라고 말씀드리면 아시겠습니까?”
어둠의 총아!
백무는 척추를 타고 정수리까지 오르는 소름에 작게나마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흑…… 사제(黑司祭).”
“예, 맞습니다.”
“총단에 있어야 할 그대가 어찌 나를 찾았는가.”
백무의 말투가 바뀐다.
백무는 이 순간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흑사제, 그가 누구이던가.
대대로 인정되어 내려오던 흑, 천, 마사제와 특성에 따라 이름 짓는 다른 두 사제를 포함한 오사제는 웬만해서는 총단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중 흑사제는 더 특별하다.
신의 대리자인 교사를 보필하는 역할이 아닌, 적어도 그에 맞먹는 지위를 가진 자.
함부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아니 될 이가 바로 흑사제다.
게다가 청년이라니.
이번 대 흑사제는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음이 틀림없다.
한데 그가 왜?
대체 무엇을 꾸미고자 세상에 나온 것인가.
“그냥 답답해서 나왔다고 하면 안 믿으실 테고, 우연히 지나다 들렀다는 것은 말이 안 맞겠지요?”
“…….”
눈을 부릅뜨고 위진을 노려보는 백무.
위진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낀다.
“흠, 뭐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가겠습니다.”
“시간이 없다?”
“낮에 들으셨을 텐데요. 조정에서 하고자 하는 일들을. 벌써 관청에 병력이 모이고 있는 것, 모르셨습니까? 아마도 내일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장년의 새 황제는 혈기 넘치고 단호하지요.”
그런가.
“그럼 서둘러 말씀하시게. 본인 또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 있으니.”
“힘을 실어 주십시오.”
“힘? 그대가 나의 도움을 원하는가?”
“예. 그것도 아주 큰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늘의 신을 제외하고 인세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자가 흑사제다.
교리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자리이거늘.
“어찌하여 그런가. 그대라면 교사의 명을 제외하고는 무소불위일 텐데.”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지금의 신교는요?”
그건 또 무슨 소리.
“더럽지요?”
“…….”
“신은 무얼 하고 있습니까? 혹시 요사제께서는 아십니까?”
“지금 얼마나 위험한 발언을 하는지 그대, 흑사제는 아는가.”
확실히 위진의 말은 위험하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가는 그대로 배교의 죄가 성립된다.
그럴 경우, 자신은 위진을 척살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타인의 뜻을 읽는군.”
무력이 아닌 또 다른 능력.
어쩌면 위진이라는 사내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래……. 무슨 힘을 필요로 하지?”
“정화를 위한 멸망.”
“멸망? 신교의 해체를 꿈꾼다는 뜻?”
“그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무도요.”
“그렇다면…….”
“혼탁한 인세를 청소해야죠.”
쿵!
무섭다.
저 위진이라는 괴물이.
“지금 나더러 교를 배반하고 신이 만드신 이 세상을 멸망케 하고자 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뜻이로군.”
“신이 있음을 믿습니까? 정말로요?”
“아무래도 흑사제 자네,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해서는 아니 될 위인이로고.”
백무가 몸을 일으키려 한다.
다시 발동되는 기운이 야의를 펄럭거리게 만들며.
“요사제님의 아드님 말입니다.”
“뭣?”
차분한 표정으로 백무에게 백문을 언급하는 위진.
“때가 타지 않은 순수함, 그리고 착한 심성. 과연 요사제의 핏줄답습니다.”
“문아를 건드린다면 네놈의 뼈까지 씹어 삼키리라!”
분노가 형상화되어 백무의 입을 뚫고 나올 듯하다.
“저는 그럴 의도도, 힘도 없습니다. 흑사제의 숙명은 스스로 어느 것도 행하지 않음이니까요.”
“궤변이로다! 지금 네가 하고자 하는 행동은 네 의지가 아니더냐?”
“저는 길을 제시할 뿐입니다. 의지는 있지만 할 수 없는 저로서는.”
위진이 입술을 올리며 웃음 짓는 것이 패 죽이고 싶도록 얄밉다.
“후생을 위해, 신이 버린 이 세상을 위해, 사랑하는 핏줄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저에게 힘을 빌려 주시죠.”
“너를 돕는 것이 어떻게 세상을 위하는 길이더냐!”
“멸망의 끝에 올 정화는 오로지 인간을 위한, 평등을 위한 세상이니까요.”
“그것을 네 무슨 수로 장담하지? 나의 아들을 걸고넘어진다 하여 너의 궤변이 통하리라 여기지 마라.”
위진이 백무를 보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아드님이 물려받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평화롭고 아름다울 겁니다. 거부하신다면 인세의 고통은 온전히 아드님께 이어질 거고요. 숨은 사제의 비애를 정녕 물려주고자 하심입니까?”
휘청!
일어섰던 백무의 몸이 흔들렸다.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는 그것.
아들에게만은, 백문에게만은 이 길고 힘겨운 사제의 자리를 주고 싶지 않건만…….
“당신 대에서 끝내는 겁니다. 숨은 사제들 중, 이제는 인세에 없는 광사제를 제외하고는 으뜸이라는 요사제께서 저와 함께하신다면 충분히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달콤함 유혹.
마음이 그쪽으로 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다.
털썩!
백무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인상을 잔뜩 쓰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양이 정신적인 고통을 극심하게 느끼는 듯하다.
“답해 주시죠. 말씀드린 것과 같이 시간이 부족합니다. 당장 내일이면…….”
“불가(不可).”
짧지만 힘 있는 백무의 한마디.
“비록 신에게서 멀어진 나지만 근본은 교의 아들. 허황된 망상을 품을 정도로 신을 원망하지는 않노라.”
“당신은 물론이거니와, 아드님에게도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세상이 될 겁니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조금 전과는 달리 백무는 떨림 없는 자세로 위진을 대한다.
“그런가요?”
보통의 경우 크게 실망해야 할 것이지만, 위진의 얼굴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기색만이 감돈다.
그를 차갑게 바라보는 백무.
“뭐, 일단 대화는 나누어 보았으니 속은 후련하네요.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제 내 집에서 나가 주시게.”
위진에게 반공대로 말하는 백무의 얼굴에도 어떤 후회나 아쉬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혹, 인연을 믿으십니까?”
“인연이라…… 그 역시 신의 뜻이 아니던가.”
“예전에 교사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인연에 대해.”
교사가?
그 입으로는 신만을 찬양해야 할 인간이?
“전 믿고 싶군요. 신의 뜻을 벗어난 인연이란 것.”
위진의 몸이 서서히 흐려진다.
놀라운 능력.
과연 그와 겨룬다면 승산이 있을까?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언젠가는 또 뵙게 되겠지요.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면.”
형체가 사라지고 공기의 떨림만이 남은 그 자리.
방금 전까지 있던 일이 꿈일까도 싶다.
“마지막 순간이 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제가 말한 인연…… 당신의 아들과 저의 인연.”
내 아들과 너의 인연이라고?
헛소리!
“아,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요.”
“꺼져라.”
“이번 한동 지역의 대대적인 색출. 총단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뭐라? 신교에서도 이미 알고 있다고?
한데 왜 지단을 통해 미리 피하라 권고하지 않았나.

“축하드립니다. 버림받으셨어요.”

위진이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백무.
왠지 모르게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누르는 것만 같다.
흑사제는, 위진은 그냥 헛소리만 지껄이고 간 것이 아님을 자신은 안다.
문득 꽤 오래전 마사제 육록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했던 말들이 기억을 스친다.
그것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는 백무.
앞으로 상상하기 힘든 거대한 운명들이 서로의 생을 걸고 격돌하게 될 처절한 전장.
지금이야 젊어 온전치 못한 능력만 있다고 하나 위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원하는 모든 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그는 누군가를 앞세워 멸망을 향한 진군을 시작할 것임이 틀림없을 터.
인세의 혼란을 걱정하기에 자신은 너무나도 이기적으로 변했다.
오로지 자신과 아들의 안위만을 꾀하는.
그리고 당장 조정에서 교를 탄압하기 위해 준비를 마쳤다고 하지 않았나.
위진의 말대로 오후가 되기 전 행동을 개시할 확률이 높다.
그전에 백문과 함께 이곳을 떠나야 할 것인가.

신이여! 이것은 시험입니까, 아니면 고약한 시련입니까.
당신을 마음에서 버린 죄로 이런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하는 것입니까.

고개를 돌려 백문의 방 쪽을 바라보는 백무의 눈에 작은 이슬이 맺힌다.

* * *

터벅터벅.
달이 동산에 반쯤 걸려 있다.
몇 시진이 지나면 동이 틀 것이고, 자신과 아들은 또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겠지.
삐익.
백문이 잠들어 있는 방의 문이 열린다.
혹여나 아들이 깰까 조심스럽게 자리 잡는 백무.
잠든 아들의 고운 숨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표정을 짓던 백무는 문득 옷으로 대충 가린 방구석에 시선을 준다.
‘결국은 보았구나.’
죽간.
알려지지 않은 교의 역사와 사제들의 일대기를 기록해 온 요사제들의 유산.
아들에게 이 숙명이 이어지지 않길 기원했건만, 결국 신은 백문을 선택했다.
“……용서해 다오.”
자신의 말을 들었는가.
백문이 눈을 반쯤 뜨고 몸을 뒤척인다.
아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조용히 흐느끼는 백무.
“교를 용서해 다오. 신을 용서해 다오.”
백문이 인상을 쓰며 코를 슥슥 닦다 다시 몸을 돌린다.
그 모습을 너무나도 사랑스럽게만 바라보던 백무.
백문을 들어 가슴에 꼭 품어 본다.

백문의 방을 나서는 백무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어떤 결심이 어려 있다.
백문의 몸에 불어넣어 준 무한한 힘.
백문의 기억 저 아래에 선명하게 새겨 놓은 요사제의 춤.
그리고…… 마사제와 있던 그날의 기억들.

위진이 말한 멸망과 정화의 과정도 결국 신의 뜻이라면…….
자신이 설 곳은 없다.
위진의 인연은 자신이 아니기에.
백문. 소중한 아들.

때가 되면 깨닫게 될 것이다.
신도, 인연도, 아비의 사랑도, 멸망도, 정화도…….
그것 그대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