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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24화)
6장. 무진도(無眞島)(7)
핑!
한연이를 향해 빠르게 날아가는 소도.
그녀가 당기는 힘과 백문이 잡아 뺐던 힘이 더해져 직선으로 그 흉악한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백문이 공손막에게 몸을 날렸다.
엄청난 속도.
조금은 득의양양하던 공손막이 의외의 사태에 잠시 당황한 듯했다.
펑!
모래와 자잘한 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공손막이 몸을 뒤로 빼면서 함께 딸려 간 사슬의 힘으로 인해 백문의 신형은 더욱 빠르게 쏘아졌다.
그러고는 오른손에 힘을 모아 그대로 찍었다.
‘피했나.’
단단한 바닥을 찍고 난 후, 백문은 어느새 풀어져 사라진 철쇄의 행방을 찾았다.
슈아앗!
그 순간, 먼지를 뚫고 살아 있는 뱀처럼 아래에서 위로 뻗어 들어오는 사슬.
길게 이어진 끝을 향해 백문이 다시 몸을 들어 날았다.
쾅! 쾅! 퍽!
두 번의 공격은 철쇄의 중간에 걸렸으나 마지막은 확실히 느낌이 있었다.
부드러운 인간의 감촉.
“크윽!”
공손막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백문의 머리를 향해 세차게 쏘아져 들어왔다.
공중에 뜬 상태로 그것을 피해 회전하던 백문이 손을 뻗었다.
턱, 소리와 함께 잡힌 자신의 소도.
처음 한연이에게 날아갔던 소도를 다시 백문을 향해 던진 것이다.
잠시 후,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고 낭패한 표정의 공손막이 보였다.
“하수들만 잡아 죽이고 올라왔다기에 범상한 놈으로 생각했거늘, 이제 보니 발톱을 감춘 고양이 새끼였구나.”
묘자(猫子)라…….
문득 호부 아래에 묘자를 두었다며 자신을 놀리던 악요가 떠올랐다.
“북투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아. 기회를 놓친 강자들도 여럿 존재하니까.”
시큰거리는 팔뚝과 살이 떨어져 피가 흐르는 어깨에서 전해 오는 고통을 느끼던 백문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에 공손막이 쇠사슬이 박힌 팔을 위로 들어 돌리기 시작했다.
웅웅 소리를 내며 빠르게 회전하는 철쇄.
그에 맞추어 조금씩 걸음을 옮기는 공손막이었다.
한연이 역시 낚싯대를 백문에게 향한 채 공손막의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백문을 가운데 두고 합공을 하려는 모양새였다.
둘을 번갈아 흘겨보던 백문이 소도를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려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했다.
손바닥에 닿는 자루의 감촉이 무척이나 부드러운 작은 칼.
고 노인이 붙여 준 이름, 곤(鯤).
지금껏 수많은 싸움에서 자신을 지켜 주고도 날이 한 번도 상하지 않은 절세의 보도(寶刀)였다.
고 노인에게 자신을 맡기고 떠나가던 악요가 옛 추억으로부터 받았던 증표라며 소중히 다루라고 했던 이별의 선물이기도.
한연이의 날카롭기 그지없는 낚싯줄에도 그 빛이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놀아 주마, 꼬마야.”
공손막이 이를 갈며 더욱 세차게 사슬을 회전시켰다.
한연이는 여전히 말이 없고.
백문은 두 무인의 공격에 대비하면서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
세상을 넓게 비추어 어둠을 몰아내고 낮은 곳까지 그 찬란함을 드리운다는 태양.
백문은 저 태양이 너무 싫었다.
마음의 고통과 눈물만이 남았던 그날도 저 태양은 자신의 외침을 외면했다.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 딴짓거리를 하지는 마라.”
친절하게도 백문에게 경고성 조언을 주는 공손막.
고개를 내려 그를 바라보는 백문의 눈에 조금씩 살기가 감돌았다.
“그런 것 따위는 없어.”
지지직.
곤을 들고 있는 반대편, 왼손 끝에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뇌령(雷靈).
고 노인이 심어 준 거칠고 고집 센 친구.
한연이를 한 번 흘깃 바라본 백문의 시선이 높은 단에 앉아 있는 여섯 무교장에게로 향했다.
어떤 이는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고, 어떤 이는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다.
단응계만이 무표정하게 투기장을 응시할 뿐.
“이 자리에 당신이 없다면…….”
“……?”
“끝까지 살아남아 당신을 기다리지요.”
여전히 대답 없는 마사제.
“간다, 꼬마야.”
저런 모양을 하고 있지만 역시 명문은 명문인가.
공손막의 배려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 했다.
비웃음이.
하지만 백문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여 공손막의 의도에 답을 해 주었다.
그리고…….
신명나게 울리던 수백 개의 탄금이 동시에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공간이 수십 개로 갈라지며 어둠에 잠겼다.
<『마신백문』 제2권에서 계속>
외전. 백무(1)
삐그덕.
풀벌레조차 잠이 든 깊은 새벽.
아(亞) 자 형태로 무늬를 댄 작은 문이 열렸다.
동시에 열린 문을 통해 차가운 밤공기가 스멀스멀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평소 즐겨 입던 청색 학창의 대신 순백의 야의를 걸치고 방을 나선 이의 입에서 긴 한숨과 함께 하얀 숨결이 뿜어져 나와 허공으로 사라진다.
무엇이 저리도 답답할까.
항상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살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미간 사이에 천(川) 자가 뚜렷하다.
“휴우…….”
서늘한 바람을 크게 들이켠 덕분일까?
사내, 백무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낮에 다녀간 의제(義弟) 악요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관(官)이 행동을 시작했다는 말.
잠잠하던 중원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말.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실 꽤 오랫동안 조정이 신교를 내버려 둔 감도 있다.
혼란(魂亂)이라 불린 중원대란 이후 딱 한 번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고, 그때 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주기적으로 어림잡아 반 백 년마다 돌아오는 지독한 처사라지만 지금은 너무 빠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백무가 아들이 잠들어 있는 방에 시선을 준다.
소중한 백문.
신이 내린 마지막 축복.
신이라…….
백무는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요즘 들어 부쩍 회의감이 인다.
아들과 다른 교인들에게는 누구보다 신실한 신의 종자로서 사랑과 믿음을 강조하는 자신이었지만, 아내의 죽음 이후 그 신심이 많이 희석되었다.
특히, 멀리 떨어진 총단에서 벌어진 혈사와 무사제의 중원 진격은 신의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차라리 떠날까?
모든 껍질을 벗어던진 채 오로지 백문만을 데리고 하늘의 신과 땅의 황제가 지배하는 이 어지러운 중원을 등지는 것이 옳을까?
거란을 지나 옛 발해 땅, 또는 자신과 같은 사제(司祭)들의 이상향 고려(高麗)로 길을 잡는 것이 더 나을까?
다시금 답답해지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백무는 그저 긴 한숨에 시름을 날리고자 한다.
이럴 때면 동산에 올라 한바탕 춤이라고 추고 싶어진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전해 온 춤.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그것은 아버지 백초(白楚)에게서 내려 받은 요사제의 위를 이어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원한 기쁨이다.
그러나 백무는 처음부터 원치 않았다.
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으나 무(舞)의 기쁨은 곧 굴레.
먼 훗날 아들 백문에게도 이어져야 할 운명은 수만 근의 돌이 되어 가슴을 짓누른다.
쉬잉!
한 줄기 가느다란 바람이 백무의 뺨을 스친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백무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마치 일생의 적을 만난 어느 강호 무사의 그것처럼.
“뉘시오?”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 것인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향해 백무가 입을 열었다.
“헛, 이런!”
조금은 경박하게 들리는 젊은 음성.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집이외다.”
밤이슬을 즐기는 도둑은 아닐 터.
하지만 백무는 모른 척 말을 꺼낸다.
잠시 후, 백무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허공이라 생각했던 어둠이 조금씩 형체를 갖추더니 이윽고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손님께선 어인 일로 이곳을 찾으셨소?”
“배운 재주가 부족하여 웃어른께 못난 꼴을 보였군요.”
백무의 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드러난 불청객의 얼굴은 무척이나 젊다.
이제 겨우 약년(弱年)을 넘겼을까.
길쭉한 신장에 호리호리한 몸매, 딱 봐도 부족해 보이는 근육은 그가 무인의 재목은 아님을 드러내 준다.
“손께서도 논무(論武)를 원하오?”
어찌 알고 왔을까.
불현듯 예전에 의제가 자신을 처음 찾아왔을 때가 떠올라 싱긋 웃음이 나오려 한다.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감히.”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청년.
일단 승부를 겨루고자 하는 의도는 아닌 듯 보이나 왠지 교활해 보이는 눈이 심히 거슬린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이었다면 그냥 떠났으면 하오. 불의(不義)한 객을 잡을 만큼 넉넉한 성품이 아니라서 말이오.”
대놓고 나가라 말하는 백무다.
그러나 청년은 이러한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천하제일 요사제께서 길 잃은 객을 내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안다면 분명 손가락질을 할 테지요.”
화악!
백무의 야의가 넓게 퍼졌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살심에 절로 반응한 기운이 피부를 뚫고 외부로 향한다.
“누구냐?”
심연에서 올라오는 듯한 나직하고도 차가운 백무의 음성.
“밤이 추운데 이대로 세워 두실 겁니까?”
능글맞게 웃으며 백무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괴청년.
그를 잠시 바라보던 백무가 기운을 조절해 휘몰아치던 바람을 잠재운다.
“따라오라.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그 결과는 장담 못한다.”
휙 돌아서며 청년을 방으로 이끄는 백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