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신백문 1(23화)
6장. 무진도(無眞島)(6)


둥! 두둥!
북을 치는 자의 근육이 상당했다.
그리고 그가 자리한 위쪽으로 여섯 명의 남녀가 각각 옥좌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도를 수호한다는 여섯 무교장(武敎長).
처음 거인의 방패 외곽에 도착한 자신을 맞아 주었던 무교장 단응계(段膺系)도 가운데에 자리한 것이 보였다.
북투에서 백구십구 명의 전사를 죽이고 넘어온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은 차가웠다.
가느다란 몸에 걸맞지 않게 위로 솟은 눈.
수천을 거느리는 위엄으로 백문을 압박하던 그는 환영의 인사 한마디 없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는 것으로 짧은 만남을 끝냈다.
이어서 수행했던 무교들에게 남투에 관하여 들을 수 있었다.
천한 신분인 채로 북도에서 건너온 백문은 일단 자격을 인정받아야 했다.
일신이 아닌 삼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스스로의 무력을 모든 유력자들 앞에서 증명하여야 하는 것이 두 번째.
하지만 백문은 이러한 과정들이 귀찮기만 했다.
최대한 덜 주목받고 빠르게 마사제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진실한 목적이거늘.

“죽여도 됩니까?”

남투는 대전자 간에 되도록 살생을 자제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백문이 무교 하나에게 물었다.

“맘대로 해라. 신에게 버림받고 남투에서조차 폐기된 자들이니.”

힘을 증명하는 자리에서 맞아 싸울 상대는 생에 대한 배려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무교.
저들이 진실로 신을 섬기는 자들이 맞는가.
주변을 살피던 백문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그리고 멀리 앞쪽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오른팔이 없고 그 자리에 쇠사슬을 끼워 땅에 길게 드리운 봉두난발의 괴인.
얼굴의 절반 정도가 불에 탄 듯 붉고 꺼멓게 녹아내린 왜소한 여인.
그녀의 손에서는 긴 낚싯대가 하늘거리고 있다.
“이 대 일. 처음부터 쉽게 자리를 주지 않겠다는 뜻인가.”
백문은 저도 모르게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 중얼거려 보았다.
남도에 대한 거짓 환상, 거짓된 욕망, 거짓 선지자(先知者), 거짓 신(神).
그런 것들을 심어 주어 저들끼리 경쟁하고, 부수고, 웃고, 울기를 바라는 자들.
북도의 밑바닥 인생들이 언젠가는 자신도 될 수 있다는 희망만을 가진 채 영원히 오지 않을 그날을 기다리며 남도의 부(副)를 유지할 기반으로 죽어가기를 바라는 고약한 마음들.
예전 언뜻 들었던 승조라는 막강한 무인이 최초로 북투를 뚫고 넘어왔을 때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을까?
배척받아야 할 운명인 자신처럼?
터벅터벅.
백문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점점 그 모습을 확실하게 보이며 우두커니 서 있는 두 명의 무인.
하나 그들의 얼굴에는 감정이란 것이 보이지 않았다.
둥!
백문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려는 듯 상대의 이 장 앞에 이르자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순간, 단응계가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자 거대한 투기장 곳곳에서 들리던 소곤거림이 사라졌다.
“만신께 영광을!”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을 곧게 펼친 두 손을 교차해 가슴에 모았다.
“현인신께 우리의 육신을!”
일제히 몸을 숙이며 허공을 향해 예를 표하는 무수한 인간들.
“천신께 세상의 만물을!”
‘미친놈들.’
그들을 바라보며 백문은 속으로 웃음 지었다.
“우리는 오늘 신께서 보내신 축복을 보고 있소. 수십 년 동안 신께서 천한 존재들을 시험하고자 내려주셨던 북투에서 첫 무진의 자녀가 탄생한 것이 엊그제 같건만, 놀라운 은혜로 또 한 명의 자녀가 이곳 남도로 이끌림받았소.”
저런 자들의 특징이 있다.
쉬운 말을 무척이나 어렵게 풀어 간다는 것.
“천신께서 직접 받아 보내신 두 번째 자녀인 문백. 그 영광의 이름을 우린 지금 보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이런 거창한 것들 따위는 없어야 하지 않는가.
“천신과 현인신은 하나이나 생육을 관장하는 현인신께서 따로 그 자격을 보고자 하시는 바! 삼신의 자녀 문백은 그 무한한 복됨을 이 자리에서 증명하여야 할 것이오!”
“하아…….”
백문이 한숨을 쉬었다.
그에 앞에 마주한 두 사람이 살짝 반응을 보였다.
“지금 새로운 우리의 형제 문백의 앞에 배교의 죄를 지은 두 악적이 있소!”
“우우우!”
어디선가 강하게 비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현인신께서는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셨소. 배교의 죄를 씻고 신의 자녀로 돌아올 수 있는 높으신 배려라오!”
그런 것이었나.
저들이 자신을 이기면…….
결국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누가 남도에 남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로군.
“보이라! 그대들의 신심을!”
신에게 예를 행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두 손을 교차해 모으고 무릎을 꿇는 괴인과 여인.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으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잠깐의 예식을 마치고 일어서는 두 사람을 등지며 백문이 중앙으로 걸어갔다.
의외의 모습에 웅성거리는 무리들.
상대할 괴인과 여인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문을 바라보았다.

월무.
아니, 지금은 환한 태양 아래의 덧없는 춤인가.
북도에서부터 한 번도 멈추지 않던 백문만의 의식이 행해졌다.
느리면서도 쉼 없는 아버지의 춤.
일부러 중간을 잘라 내고 작은 부분만 펼치는 백문의 얼굴은 꿈을 꾸는 듯 편안해 보였다.
‘마사제, 혹 이곳에 있습니까? 여기 모인 수많은 인간들 중 당신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래에서 당겨 올리는 손끝이 지나는 자리에 흐린 무언가가 생겼다 사라졌다.
‘보세요. 당신이 저의 꿈속에서 그토록 감탄했던 요사제의 춤입니다. 당신을 부르는 나의 손짓, 간절한 아버지의 마음.’
쉬이잉.
바닥을 길게 쓸어 가는 다리의 궤적을 따라 모래가 흩날리며 먼지를 피워 냈다.
‘이곳에 계시다면, 남도에 존재하신다면, 살아 계시다면! 저의 외침을 외면치 말아 주세요.’
푸우.
이윽고 백문의 춤이 끝났다.
그리고 잠시간 이어지는 묵직한 고요.
눈을 뜬 백문은 일천에 이르는 인간들이 침묵하며 자신을 묘하게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개시!”
단응계의 외침에 괴인과 여인의 눈에서 살기가 떠올랐다.
“당신들 이름은?”
다가와 자세를 잡는 그들에게 백문이 물었다.
순간,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백문을 흘기는 여인.
“누군가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 기회요.”
죽음의 선고인가.
말뜻을 알아들은 괴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르륵!
그의 팔에 연결된 철쇄가 한바탕 요동을 쳤다.
병기에 기운을 넣을 정도의 고수.
핑!
공기를 가르고 무언가가 백문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백문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틀어 베어지는 공간을 회피했다.
여인의 낚싯대 끝에 달린 보이지 않는 줄이다.
이어 백문이 하체 쪽에 서늘한 기운을 느낌과 동시에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마찬가지로 짧게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는 낚싯줄.
시작부터 매서운 공격이었다.
그 순간, 뜨끔한 무언가가 허리를 스쳤다.
끼릭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아든 철쇄.
그에 실린 경력에 오른쪽 옆구리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공중에서 두 바퀴 회전하며 착지하는 백문.
하지만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 자리로 여인의 낚싯대가 날아들었다.
‘쳇!’
백문은 속으로 혀를 차며 땅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뻗어 나간 기운이 잠시간 시간을 벌어 주었다.
휙! 휘익!
여인의 동작에 멈춤이란 없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넓은 공간에 끊임없이 공격을 뿌려댄다.
모든 신경을 쥐어짜 낸 극한의 감각으로 보이지 않는 줄을 피하고 나면 막대한 경력이 실린 사슬이 가슴을 노리고 후벼 왔다.
다년간 호흡을 맞추어 온 솜씨.
촤악!
기어이 어깨 일부가 직선으로 날아온 철쇄에 걸려 뜯어졌다.
확 풍겨 오는 피비린내.
늘 그렇지만, 자신의 핏물에서 풍겨지는 역겨운 냄새는 기분을 우울하게 만든다.
백문의 손이 빠르게 발목으로 옮겨졌다.
그와 동시에 시야를 가로로 길게 갈라 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얼굴의 절반 위쪽이 깨끗하게 잘려 나갈 터.
핑!
촤라락!
잠깐의 시간이 허용되었다.
백문이 뽑아 든 소도.
여인의 낚싯줄은 그 소도를 친친 감은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끝에 붉은 핏물을 머금은 상태로.
백문이 순간적으로 뽑아 낸 소도로 여인의 공격을 막은 것이다.
소도에 감기며 백문의 얼굴을 얇게 베어 버린 줄에서 흐르는 피와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조금 전의 급박했던 상황을 실감케 해 주었다.
‘적어도 이제 감각만으로 피할 필요는 없어졌군.’
자신의 피로 여인의 보이지 않던 무기에 흔적을 새겼다.
하나 그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상대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백문이 소도를 강하게 당겼다.
여인도 힘주어 백문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버텼다.
허공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낚싯줄.
순간, 왼쪽으로 빠르게 날아든 철쇄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치의 힘으로 받아 내기 전에 막아야 했다.
다리에 힘을 주어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른 백문이 왼손 팔뚝으로 철쇄의 중간을 막았다.
착 감겨드는 철쇄.
살이 따끔한 것이, 사슬 하나하나에 뭔가 뾰족한 것을 박아 넣은 듯했다.
다시금 흙모래 바닥에 떨어져 내린 백문.
지금 형세는 백문을 앞에 두고 양쪽에서 두 상대가 길게 잡아당기는 삼각의 모양새였다.
“공손막(公孫莫), 그녀는 한연이(韓蓮二)라 한다.”
“……?”
“네놈을 저승에 보낼 이름이지.”
봉두난발의 괴인이 입을 열어 자신과 여인의 이름을 밝혔다.
“공손(公孫)이라…… 중원에서 이름난 명문가가 아닌가. 한(韓) 역시 여전히 북부에서는 벌족(閥族)의 위치인 줄 알고 있는데.”
백문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헝클어진 긴 머리칼 아래에서 빛나던 공손막의 눈이 커졌다.
“아는 것이 많은 꼬마로군.”
공손막이 사슬을 세게 당겼다.
조금씩 그 방향으로 끌려가는 백문.
그 모습을 보고 한연이가 낚싯대를 당겼다.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힘을 버티는 백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처음 철쇄를 막으면서 왼쪽 팔뚝이 상했다.
정점에 이른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순간적으로 내리꽂히는 힘에 집중된 경력은 살을 관통해 뼈에까지 이른 것이다.
게다가 철쇄 자체에 박혀 있는 뾰족한 가시들이 조금씩 생살을 파고들어 고통을 배가시켰다.
순간, 백문의 눈이 한연이에게로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냉혹한 얼굴.
백문은 부르르 떨리는 소도를 살짝 들어 바닥으로 빠르게 찍었다.
그리고 뒤로 당겼다가 소도를 놓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