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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22화)
6장. 무진도(無眞島)(5)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낮은 야산.
그리 크지 않은 형체를 가진 그림자가 달빛 아래에서 느리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손길이 지나는 공간마다 뿌연 안개가 서리듯 공간의 갈라짐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물 먹은 흙이 메말라 내지르는 비명과도 같은 연기가 솟는다.
보고 계십니까, 아버지.
그리고…… 마사제.
당신을 위해 준비한 나만의 의식.
당신을 부르기 위한 고귀한 무(舞).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오직 당신이 보아주기만을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행했던 요사제의 춤.
어찌 답이 없으십니까.
마의 이름, 신의 이면.
검은 태양 아래 유일해야만 하는 악의 징벌자.
마사제여.

‘그만!’

청년의 외마디 호통과 동시에 영원히 멈추지 않고 뻗을 것만 같던 부드러운 움직임이 멈추며 세상은 암흑에 잠겼다.

“썅!”
백문이 욕을 뱉으며 침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또, 또오!”
대상이 없는 허공을 향해 절규하는 백문.
“왜 방해하는 거냐! 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늘 끝은 동일했다.
의식 깊은 곳에서 자신을 불러 기억조차 희미했던 아버지의 월무(月舞)를 재현하게 하던 기이한 끌림.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능력을 폭발적으로 상승케 하던 그 춤은 항상 이렇게 끝이 났다.
멸망의 정화.
자신이 더 살아가야 할 삶의 이유를 주었던 청년의 목소리.
조금만 더 넘어가면 잠들어 있던 기억 속에서 월무의 나머지 부분을 잡아낼 수 있으련만, 그 목소리는 의지의 걸림돌이 되어 이처럼 자신을 농락하고는 했다.
“악몽을…….”
누군가가 옆에서 백문에게 말을 걸었다.
잠이 덜 깬 듯 끝을 흐리는 여인의 음성.
“……어.”
백문이 음성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서옥(徐玉).
상당히 미인이다.
대당(大唐) 제국을 멸망케 했다는 양옥환의 풍만함과 서시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춘 절색.
총총하고 길게 난 속눈썹과 그 아래에서 강아지의 그것처럼 빛나는 눈망울이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긴장돼?”
“…….”
서옥이 하얀 천을 들어 백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걱정 따위가 아니다.”
내일에 대한 고민으로 악몽에 이른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르고 있는 심연 속의 비밀.
“뭐 좀 마실래?”
몸을 일으킨 서옥이 얇은 천으로 가슴과 둔부만을 가린 채 방을 나서려 했다.
“됐어.”
그러나 이어진 백문의 말에 장막 앞에 선 서옥이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왜?”
“이제 가면…… 다신 못 보겠지?”
“……아마도.”
밤사이 차갑게 식은 태양이 수평선 위로 몸을 들어 올려 그 이글거리는 열기를 뿜어 낼 시각이 되면 그들이 올 것이다.
남도의 무교들.
그리고 이제 이곳 북도와는 영원한 이별이겠지.
서옥이 휙 몸을 돌리며 백문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가라앉은 음성과는 달리 한결 밝아진 표정이었다.
“그동안 고생했어.”

약 일 년 전, 새벽의 달무리 아래에서 월무에 취해 있던 백문은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자신의 춤이, 혹 북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마사제에게 보내는 요사제의 월무가 방해받았다는 것에 은근히 짜증이 났다.
그런 탓에 거칠게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은근히 자신을 감시하던 무리들이 아닌, 서옥이 있었다.
어떤 기이한 감동에 젖은 두 눈을 빛내며.
“누구냐?”
“난, 서옥.”
“왜 날 지켜봤지? 누가 시켰어.”
그리 강하지 않은 힘으로 목을 잡고 위협하는 백문을 향해 서옥이 살짝 웃었다.
“지나는 길이었어. 춤 멋지더라. 널 알아, 살귀.”
당연히 모를 리가 있나.
일반인들이라면 치를 떠는 북투의 살인자인 자신을.
백문이 뇌령을 불러 그녀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미약한 기운이지만 그것을 직접 받은 서옥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녀에게서 위협적인 기운은 없었다.
그냥 북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보유하고 있을 정도의 가벼운 호신술을 익힌 듯했다.
“혼자 나다니다니 겁도 없군. 이 야밤에.”
“지금이니까 가능한 거야. 악당들도 잠은 자야 하니까.”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서옥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잠깐 차나 마시고 가라며 백문을 끌고 간 곳은 서옥이 머무는 거처였다.
일명 청루(靑樓).
술과 웃음, 그리고 몸을 파는 곳.
루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초라한 곳이었지만, 이곳 북도에서 몇 없는 창가(娼家)였다.
“쉬운 남자였네.”
순순히 따라온 백문에게 장난처럼 건넨 말.
“농담이니까 봐주는 거다.”
자신보다 어리지만 그 처절하고도 잔혹한 무력을 가진 백문에게 끌린 것일까?
차를 마시며 의미 없는 질문을 반복하던 그녀가 백문에게 안겼다.
그날 이후, 백문은 그녀의 거처에 머물렀다.
육 노인 조손에게 주는 절반을 제외하고 나머지의 대부분의 상금을 그녀에게 주었다.
웃음을 팔되 몸은 팔지 말라는 뜻.
백문의 뜻대로 그녀는 오로지 백문에게만 몸을 허락했다.
그러한 생활이 벌써 일 년째.
이제 백문은 떠난다.
남도.
북도에서는 찾을 수 없던, 아마도 마사제가 있을 그곳으로.

서옥이 풍만한 몸을 이끌고 백문이 누워 있는 침상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가락으로 백문의 상처를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이제야 물어보는 건데,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땠어? 북무진도.”
“정신이 죽어 있더군. 모든 이들이.”
어마어마한 높이의 절벽만 보이는, 남도 옆에 비슷한 크기로 존재하는 북도.
선착장에 검은 배가 도착하고 하선자들에 섞여 상륙한 백문이 처음 본 인간들에 대한 평가는 더없이 냉정했다.
생기 없는 눈.
내일의 희망 따위는 한 점 존재하지 않는 눈을 마주하노라니 몸의 활기가 쏙 빠지는 것만 같았다.
“첫날부터 살인을 했다지?”
“살아야 했으니까.”
흙과 나무, 풀로 대충 지은 집들을 지나는 길에 누군가가 백문을 습격했다.
아마도 어려 보이는 외모를 보고 우습게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처음 발을 들인 외지인이라는 점도 한몫했을 테고.
가벼운 상처를 입은 뒤 소도를 들어 빠르게 상대의 목을 끊어 버리자 날아가는 놈의 대가리 옆으로 떨어진 나무 목걸이.
북투(北鬪)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그것을 주워 목에 걸은 것이 오늘의 살귀를 있게 했다.
“나두 자기 따라 남쪽에 가고 싶다.”
“내가 준 은자들 꽤 될 텐데? 설마 다 썼나?”
“아니, 그대로 있어. 조금만 더 모으면 되지 싶네.”
싱긋 웃으며 침상 아래를 응시하는 서옥이었다.
적지 않은 금액.
아니, 사실 충분히 넘치고도 남았다.
신에게 바쳐 남도에 거주할 자격을 얻을 정도는.
“조심해. 나 가고 나면 노리고 올 인간들이 있을 거야.”
“태어날 때부터 이곳 사람이었어. 쉽게 당하진 않아.”
“…….”
서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무법지대에도 어느 정도의 질서라는 것이 나름 존재하니.
현재 보호자를 자처하는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암묵적인 규율이 있기에 그녀는 주인과 그의 수하들에게 보호받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을까? 자기의 월무(月舞).”
달의 광휘와 너무나도 어울린다며 좋아하던 서옥에게 요사제의 춤을 ‘월무’라는 이름으로 알려 주었다.
백문이 침상에서 일어났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흘러내리며 온몸을 뱀처럼 휘감고 있는 상처들이 드러났다.
열일곱 청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몸.
지난번 목골대와의 결전에서 입은 멍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 더욱 소름 끼치는 매력을 발산했다.
멀리 수평선 위에 높이 떠 있는 만월.
아버지의 몸짓을 보았던 그날도 저런 모양이었지.
달을 잡아먹는 거대한 괴물은 이제 보이지 않는가.
스윽, 부드럽게 움직이는 백문.
눈을 감자 마치 어디선가 구슬픈 당적(唐笛)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가상의 음률에 맞추어 손이 올라가고 무릎이 들어 올려졌다.
허리를 감아 오는 따뜻한 느낌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저절로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손가락 끝에서 발산되는 뜨거움은 안개로 변해 백문의 주변을 감싸고, 그 안개를 헤집고 뻗어 가는 다리를 따라 수천 개의 잔영이 공간을 채운다.
누군가의 방해만 없다면 영원히 끊이지 않고 이어 갈 천상의 몸짓이련만…….

* * *

“그대는 신을 믿는가?”
어둠 속에서 백문에게 질문하는 음성이 있었다.
벽을 타고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
지옥 심판관의 그것이 저럴까.
“예. 하늘의 천신, 땅의 현인신, 그리고 세상 모든 것에 존재하는 만신을 믿습니다.”
차분히 대답하는 백문의 음성에도 울림이 서려 있었다.
“삼신의 도를 따르는 그대, 살귀여. 현인신께서 내리신 축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다짐이 그대에게 속해 있는가?”
무진의 주인.
이곳 무진도에서 현인신으로 받들어지는 자.
“예, 모든 것은 현인신의 뜻대로…….”
그그긍!
백문이 말을 마치자 앞쪽에서 강한 진동을 동반한 소음이 울렸다.
어둠을 직선으로 길게 가르고 들어오는 강한 빛줄기.
그와 함께 먼지를 피워올리며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증명하라. 그대의 강함과 신앙을. 남도의 무진교도로서 현인신의 아들이 될 자격을.”
공간을 울리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둥!
어느새 완전히 개방된 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신 듯 백문의 미간이 좁아졌다.
밖에서 들리는 북소리가 빨리 자신을 보고 싶다며 부르는 것만 같았다.
삼신? 무진교도?
다 헛소리!
일신교라는 신앙을 부인하는 자신이건만, 그 이단 종파인 삼신을 말하는 것에 역겨운 감정이 생겨났다.
어차피 이 모든 것들도 다 가면일 뿐.
터벅거리며 걸어 나간 밝은 세상.
눈이 빛에 적응하자 곧 전경이 들어왔다.
넓었다.
북도의 투기장과는 비교조차 불허할 정도로 거대한 공간.
두껍게 쌓아올린 돌벽의 높이는 북투의 두 배에 이르고, 그 위로 깨알같이 많은 인간들이 좌정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