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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21화)
6장. 무진도(無眞島)(4)
삼 년 전, 백문은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았다.
말 그대로 갈 곳을 잃은 방황.
여기저기로 뻗은 관도를 따라 낮에는 걸었고, 밤에는 인적을 피해 가까운 산속이나 그것마저 없다면 숲을 찾아 잠을 청했다.
그렇게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가끔 재수 없게 불의한 도적을 만나기도 했으나 그들 누구도 백문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백문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으나 그는 이미 웬만한 성인의 무력을 뛰어넘고 있었으니.
살인에 대한 거부감?
백문에게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이미 오래전 장구의 피부를 직접 도려내고 그 미간에 칼을 꽂아 죽이지 않았던가.
열 살이었던 그 당시에도 얼굴에 튄 핏물을 닦아내던 아이의 표정은 차가웠고, 반쯤 감은 눈은 어떠한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중원을 떠돌던 중 우연히, 아주 우연히도 탈영병으로 보이는 병졸들의 손에서 죽어가는 일가족을 구하게 되었다.
신을, 아니, 신들을 섬기는 또 다른 형제자매들을.
그 가족은 삼신종(三神宗)이었다.
유일무이하신 신을 인정치 않고 현인신(現人神)이라는 다른 형태의 신을 기다리는 이단의 무리들.
지금이야 교사 헌원청이 이들을 포용하여 함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내부적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학살극을 끊임없이 벌여 왔다고 했다.
무엇보다 삼신을 따르는 이들의 교리는 순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 역사의 기본이 끝없는 박해와 탄압을 현세에서 구원받고자 했던 바람의 산물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스스로 관병의 마교 색출을 피해 이동하던 중이었다고 했다.
그 순간, 백문은 이상하게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다른 형태의 신, 그리고 이단의 무리.
조부 백초가 물계자의 흔적을 언급하며 짧게 기록한 부분이 이들 삼신종과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은가.
이들과의 대화에서 뭔가 강한 끌림을 느낀 백문은 재차 물었다.
그들이 가고자 했던 곳을.
중원에 존재하는 삼신종의 성지는 세 곳이 있다고 했다.
삼신종을 처음 일으킨 옛 천사제(天司祭)가 당시 교사에게 피살당해 산산이 분해되었다 전해지는 무이산(武夷山).
일신과 삼신 모두의 성지, 성도부 총단.
그리고…….
배덕의 섬, 무진도(無眞島).
진실이 아닌 이단의 땅.
* * *
눈을 뜨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일어났어?”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일다경.”
너무도 빨랐다.
백문, 자신의 상처를 겨우 차 한 잔 들이켤 시간 만에 손보았다 말하는 노인의 솜씨, 그리고 그에 맞추어 깨어난 자신의 강건함도.
“걸어도 될까요?”
“해 봐. 부목을 대었으니 꺾여서 부러지진 않을 거야.”
백문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상처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이미 내장 기관의 고통은 사라진 뒤였다.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는 노인만의 특효약이라나.
“길어야 삼 일이면 부목 없이도 달리는 것 정도는 거뜬하지 싶어. 우리 문씨 청년, 꽤 튼튼하니까. 안 그런가?”
“충분할 겁니다.”
콰당!
그 순간,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넘어지듯 실내로 들어왔다.
“아이코!”
“뭐여!”
그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머리를 긁적였다.
흉측한 얼굴의 노인과 비슷한 복장.
마포(麻布)를 대충 기워 만든 하층민 차림의 인영이었다.
“아우, 피 냄새야. 이 할애비가 좀 씻으라고 했지?”
“헤헤, 죄송요.”
노인의 손녀, 육영(陸英)이었다.
“목골대의 시신은?”
백문이 육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른 아저씨들이랑 같이 죽죽 잘게 토막을 낸 다음, 내장은 흘려보냈고 머리랑 껍질은 용사의 묘에 안장했어. 뚝하면 딱! 딱하면 척!”
“수고했다.”
“히히.”
백문보다 두 살 어린 여자아이였다.
한데 승부에서 패해 죽은 자의 시신을 조각내는 일을 했다며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게 아닌가.
하지 말라고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며 항상 시체들을 처리하는 잡일을 거들었기에 육 노인은 이 철없는 손녀에 대해 걱정이 꽤나 많았다.
백문은 이들 조손을 처음 북투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았다.
첫 싸움에서 크게 다쳐 홀로 신음하고 있는 백문에게 먼저 다가왔던 사람이 이 흉측한 노인이었다.
그 옆에서 엄지를 빨고 있던 여자아이가 육영이었고.
승리 수당의 절반을 준다면 앞으로도 계속 다친 몸을 치료해 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투기장에는 부상당한 자들을 따로 치료해 주는 의원 같은 존재가 없다.
그러니 스스로 치료하거나 돈을 들여 북무진도에 몇 명 없는 의원들을 찾아야만 했다.
끔찍한 외모에 믿음이 가지 않던 백문은 쥐 한 마리를 패대기쳐서 다 죽여 놓은 후 다시 살려내는 기막힌 솜씨를 보고 나서야 노인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후 싸움에서 다쳐 돌아올 때마다 노인이 백문을 치료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되었다.
물론 그 오물거리는 입으로 끝없는 수다를 떨면서.
그리고 노인의 손녀, 육영.
언뜻 보면 남자아이 같아 보이는 투박한 외모에 잘 씻지 않아 얼굴에는 항상 땟국물이 덕지덕지 굳어 있다.
머리가 약간은 모자란 탓에 노인과 더불어 놀림거리가 되거나 심지어 이유 없이 얻어맞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섬세하고 빠른 칼질은 성인들의 실력을 능가했다.
그리고 백문을 따라 투기장에 출입하다 우연히 시신을 처리하는 곳에서 스스로의 실력을 자랑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쭉 그 일을 해 왔다.
“오빠, 오빠.”
“왜?”
얼굴은 검고 지저분해도 저 또랑또랑한 눈은 언제나 맑았다.
“이제 밑으로 내려가는 거야?”
남투가 있는 남무진도.
그곳으로 떠나는 것이냐 묻는 것이었다.
“그래.”
“나두?”
백문이 노인을 돌아보았다.
추악한 노인의 얼굴은 언제 봐도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에 데리러 오마.”
“키키, 알았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는 백문을 보며 육영은 해맑게 웃었다.
무진도라는 섬은 북도와 남도로 이루어졌다.
아득한 옛날, 교를 떠나온 일단의 무리들은 북무진도에 상륙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남무진도로 완전히 넘어가 정착했다고 했다.
왜 처음부터 남쪽에 자리를 잡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방어벽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바다에서 남무진도를 바라보면 높이 솟은 거대한 성벽이라 착각할 만큼 높은 천연의 절벽이 섬 전체를 빙 두르고 있고, 그 안쪽으로 낮게 분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도민들이 거인의 방패라고 부르는 그것.
그로 인해 외부와의 완전한 단절을 가능케 해 주는 절대의 요새와도 같았다.
그와 반대로 북무진도는 해안과 내부가 개방되어 있는 여느 평범한 섬과 다르지 않았다.
남도로 가지 못했거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 이후 유입된 수많은 사람들이 남무진도에 있다는 무진의 주인에게 지배당했다.
그들의 소망은 단 하나.
언젠가 자격을 얻어 남도로 들어가는 것.
이곳 북무진도와는 전혀 다른 별세계라 알려진 남무진도는 이곳 도민들에게는 이상향과도 같았다.
가끔 외부인이나 북도민들이 겁 없이 바다를 통하거나 다리를 넘어 남무진도로 가려 하였지만, 누구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 목 없는 시신이 되어 바다에 버려졌다.
백문은 섬에 들어온 외부인.
그러니 남도로 가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북투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남투로 갈 자격을 얻는 것.
그것을 신의 선택이라 한다지?
“이제 속 좀 시원허냐?”
육영이 흥얼거리며 방을 나서고 잠시 후 노인이 백문에게 말을 걸어왔다.
“늘 그렇죠.”
노인의 치료를 돌려서 칭찬하는 백문.
“그거 말구. 남쪽으로 가게 돼서 좋냐, 그 말이야.”
“…….”
“많이 힘들 거야.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말투는 걱정스럽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노인이었다.
“그렇겠죠. 뭐, 그래도 이백 번이나 죽다 살아난 몸인걸요. 앞으로 천 번은 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백문은 씨익 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럴 테지. 우리 문씨 청년을 이 년이나 돌보다 보니 내도 잘 알겠더만.”
노인의 말이 맞다.
자신을 치료해 오면서 감추어 왔던 능력 정도는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했을 테니.
“알지? 이제 내가 이 방을 나가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거.”
얼마 전, 남도에서 무교들이 찾아왔다.
몇 번의 대전에서 계속 살아남는다면 곧 신의 부름이 있을 것이라며.
그리고 그들은 노인과의 계약 해지를 요구한 뒤 다시 남도로 사라졌다.
백문의 느낌으로는 오늘이 마지막 싸움.
아마 육 노인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서운하네요.”
절반은 진심이었다.
타인을 더 이상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한 백문조차도 이들 조손에게는 어느 정도 정을 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는 제가 없어도 생활하기 불편한 점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이 년간 꽤 모으셨잖아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네가 준 돈, 거의 남은 게 없어.”
“헐, 어르신도 내기로 다 날리셨어요?”
황당한 마음에 백문이 물었다.
적지 않은 금액일 텐데.
“아니. 날 뭐로 보고! 그냥 다 나눠 줬어. 봐서 알겠지만 이 북도에 불쌍한 인간들이 어디 한둘인가?”
가진 것 없는 노인이지만 베푸는 삶을 잘 안다.
게다가 이곳 도민들의 습성까지도.
만약 자신이 떠나고 나면 노인의 재산을 노리고 찾아올 이들이 꽤 많을 테니 미리 뿌려 두어 청빈함을 알리는 것도 훌륭한 지혜라 할 수 있었다.
“가는 마당이니 내 그동안 궁금했던 것 좀 묻자.”
“예.”
“니가 이 무진도라는 더러운 곳에 왜 왔는지, 왜 남도로 가기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는지 그건 네 일이니 별로 관심은 없다.”
노인이 말한 것을 물을 줄 알고 거짓 대답을 준비했던 백문은 오히려 어안이 벙벙해졌다.
“너의 그 춤.”
백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매일 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끝없이 추고 또 추는 춤. 대결이 시작되기 전 네가 추던 춤의 십 중 일도 채 보여 주지 않는 춤.”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을 물어오는 노인의 얼굴을 백문은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지금 백문의 눈을 누군가가 본다면 바로 살인이 일어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궁금하셨습니까?”
나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에도 노인은 두려움 없이 튀어나온 눈알을 굴릴 뿐이었다.
“이 사람아, 안 궁금한 게 더 이상한 게야.”
똥그란 노인의 눈이 살짝 반달 모양으로 찌그러지며 오물거리던 작은 입끝이 올라갔다.
누가 보아도 웃는 모양새.
뭔가를 알고 자신에게 묻는 것이 아님을 짐작한 백문의 얼굴도 그제야 풀어졌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겁니다. 제가 워낙에 선친을 따랐던지라 밤마다 그 생각에 잠을 쉬이 잘 수 없더군요. 투전에 앞서 선친께 저의 무운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고요.”
“돌아가신 아버지라…….”
왠지 모르게 침울해지는 음성을 이상하게 여기려는 찰나, 노인은 예의 그 활발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효자구먼, 효자야. 아버지를 늘 잊지 않기 위해 배움을 실천하니 이보다 더 큰 효심이 어디 있을꼬. 아버지는 멋진 춤꾼이셨구먼그래.”
천연덕스러운 노인을 보니 그저 신기한 춤에 호기심을 품었을 뿐임이 틀림없다.
그제야 작게 한숨을 쉬는 백문이었다.
“껄껄, 그동안 네 덕분에 재미있게 지냈다. 우리 걱정일랑 하지 말고 남쪽에 가서도 훌륭한 무인으로 살아남기를 내 신께 기도드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