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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20화)
6장. 무진도(無眞島)(3)


벌써 한 시진이 훨씬 지났다.
툭탁거리며 끊임없는 대결을 펼치는 백문과 목골대.
서로 합쳐 백 회 이상의 공격이 들어갔으나 어느 것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대부분이 목골대의 공격이었고, 그 사이사이 백문이 날카로운 한 수를 날리곤 했다.
“아, 진짜 뭐하는 거냐! 몽골 촌놈아!”
언뜻 살펴보면 압도적으로 백문을 압박하는 듯 보이지만 중반에 맞은 몇 방을 제외하고는 싸움의 흐름을 바꿀 만한 공격을 하지 못한 목골대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관중들도 슬슬 짜증이 나는지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헉! 헉!”
‘지쳐 가는군.’
입을 크게 벌린 채 숨을 몰아쉬는 목골대는 확실히 시합 초반과는 달랐다.
줄줄 흐르는 땀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스으읍! 차아!”
목골대는 몇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내력을 조절했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초원의 야수는 될 수 없었다.
툭툭, 치며 들어갔던 백문의 공격 하나하나가 사실은 치명적인 것이었으니.
인간의 몸에는 기맥이 교차하는 부위가 있다.
대부분의 고수들은 장기간의 수련을 통해 개미 눈물만큼 좁은 기맥의 교차점을 넓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기맥이 막히는 불상사를 막고자 애쓴다.
물론 그것은 저 날렵한 곰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한 번에 큰 타격으로 목골대의 기맥을 손상시키려 했다면 놈은 분명 백문의 의도를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신중히 몸을 보호하는 데 힘을 썼을 것이고, 지금처럼 저렇게 지친 모습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약한 공격이 목골대의 다섯 교차점에 꾸준히 들어갔다.
이제 곧 목골대는 마치 앵속(罌粟)을 흡입한 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호흡 곤란, 어지러움, 가려움, 그리고 환상…….
“훅! 후욱!”
과연 자신의 몸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가.
목골대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숨을 크게 들이켜기 위해 노력했다.
“너!”
크게 외치고 싶겠으나 그것조차 힘들 것이다.
가슴을 누르는 통증에 구토가 올라오고 있을 테니.
“독?”
“아니.”
“그럼 뭐냐?”
“너의 오만.”
자신보다 무척이나 덩치가 작은 백문을 깔본 것에 대한 대가였다.
목골대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이토록 작은 백문이 백구십구 회에 이르는 생사결에서 살아남아 이 자리에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목골대의 패착이었다.
“말해 봐.”
“뭘 말이냐?”
뜬금없는 백문의 물음에 목골대가 성을 내며 답했다.
“왜 너의 사부를 해하였나?”
“…….”
“은혜를 모르는 짐승으로 죽지 않을 마지막 기회다.”
“죽어? 내가? 미친!”
세 마디를 외치며 목골대가 허공으로 도약했다.
거대한 날다람쥐처럼 몸을 쭉 늘인 채 그대로 백문에게 날아드는 목골대.
순간, 백문의 눈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아니, 그 흐름은 정상이겠지만 적어도 백문이 느끼는 바로는 그러했다.
아버지의 춤을 펼친 이후 뱃속에서 맴돌던 뜨거운 무언가가 빠르게 몸 전체로 퍼졌다.
지금 자신은 천지를 쪼개먹을 봉황(鳳凰)이요, 기린(麒麟)이요, 청룡(靑龍)이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아주 잠깐이지만 정지한 시간 속에서 극염의 고통을 주었던 그 청년의 음성을 느꼈다.
꽉 쥔 오른쪽 주먹에 힘이 실렸다.
마치 번개가 팔을 타고 흐르듯 하얗고 각진 기운이 번쩍거리며 주먹을 감싼 뒤 사라졌다.
천천히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목골대.
느려진 백문의 세상에서 그는 무엇을 본 것일까.
부릅뜬 그의 두 눈에는 절망이 맺혀 있었다.
콰아앙!
크게 솟아오른 흙과 먼지가 투기장 전체를 가렸다.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결과를 보고자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잠시 후, 먼지가 내려앉은 자리 위로 목골대의 큼직한 몸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백문을 꽉 껴안고 있는 형상.
그 모습이 마치 작은 짐승을 뜯어먹고 있는 한 마리 곰과도 같았다.
“어떻게 된 겨?”
“저 몽골 촌놈이 이긴 거 같은데?”
소곤소곤 들리는 관중들의 말소리.
다들 무척이나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모양이, 아직 정확한 결과를 보지 못해서인 듯했다.
꿈틀.
그 순간, 목골대의 몸이 한 번 들썩거렸다.
“저것 봐! 목가 놈이 움직였다!”
“크하하하하! 이겼네, 이겼어!”
“드디어 저 살귀 놈이 뒈졌구나. 속이 다 시원하다!”
“내 도오오온!”
여기저기서 기쁨에 찬 함성과, 또 누군가의 절망 섞인 신음이 함께 울렸다.
“목 용사! 거, 뭐하시오? 당장 그 살귀 놈의 목을 따지 않고서!”
“아니야! 그냥 마른 오적어마냥 주욱 찢어서 널어놓아야지!”
투기장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벌써부터 신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인간도 있었다.
서생이 슬슬 눈치를 보며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꿈틀거리며 목골대가 또 움직였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제야 무언가를 느꼈는가.
서생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려 관중들을 침묵시켰다.
“왜?”
“뭐하는 거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생을 보다 다시 목골대와 백문이 있는 자리를 바라보는 인간들.

“힘을 감추고 있었냐?”
“가야 할 길이 머니까.”
자신의 귀에 아주 작게 속삭이는 목골대에게 백문이 마찬가지로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답했다.
“주먹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았어.”
“가문의 비전이야.”
“문씨 가문에 용이 나셨군.”
“사실대로 말하자면 문백이 아닌 백문. 그게 내 이름이다.”
목골대의 입술이 부들거리며 호선을 그렸다.
저승에 가기 전 자신을 죽인 자로부터 이름을 듣는 것.
아마 저들에게는 최고의 예우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부 말이야…….”
“…….”
“내 동생을 범했어.”
죽을 이유가 충분했군.
“적어도 최후의 상대에게 짐승으로 기억되기는 싫다.”
목골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명치에 틀어박힌 백문의 주먹에서 흘러나간 뇌(雷)의 힘에 내장이 까맣게 타 버려 더 이상 생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빠르게 끊어 줘. 수없는 사람을 해친 나지만 그래도 죽음의 고통은 두렵다.”
백문이 손을 뻗어 발목에 친친 묶어 둔 소도(小刀)를 뽑았다.
지금껏 이 투기장에서 마주했던 모든 상대의 목을 잘라 낸 소도.
“으어어어!”
“저, 저거!”
관중들이 백문의 움직임에 놀라 소리쳤다.
목골대가 이겼으리라 착각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황당함을 넘어 분노의 기색까지 비쳤다.
츄아악!
짧고 빠르게 목골대의 울대를 긋고 지나간 소도의 궤적을 따라 핏줄기가 길게 뻗어 나왔다.
생기를 잃어 가던 목골대의 얼굴이 백문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뿜어지는 피 안개와 함께 머리통이 뒤쪽으로 넘어가 버렸다.
쿵!
뒤로 넘어간 머리와는 반대로 남은 몸뚱이가 앞으로 엎어졌다.
힘겹게 그것을 치우며 일어나는 백문.
비틀거리며, 또 절뚝거리는 모양이 상당한 타격을 입은 작은 원숭이를 연상케 했다.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서생도, 관중들도.
“선언 안 합니까?”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끔벅거리는 서생을 향해 백문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 알았소.”
그제야 서생이 크게 헛기침을 한 후 사방을 한 번씩 빙 둘러본다.
“다들 들으시오! 이번 승부는 살귀 문백의 승리요!”

* * *

“에구, 문씨 청년, 고생 많았어.”
쉰 목소리가 터덜터덜 들어온 백문을 맞이했다.
“아휴, 오늘은 어찌나 해님이 화를 부리시든지, 이 노인네는 그늘에 있어도 쪄 죽는 줄 알았지 뭐야.”
“보셨어요?”
투기장에 입장하기 전과는 또 다른 장소로 들어간 백문.
어둠 속에서도 용케 등(燈)을 찾아내 탁자에 내려놓는다.
“보긴 뭘. 어차피 네가 이길 텐데.”
백문은 탁자 위에 있던 부싯돌을 들어 틱틱, 마찰시켜 불꽃을 일으키려 애를 썼다.
하지만 빠져 버린 어깨 탓인지 얇은 종이에 쉬이 불이 옮겨 붙지 않았다.
“어이쿠, 오늘은 그래도 살가죽은 멀쩡하구먼. 상대가 꽤 센 놈이라 팔 하나는 떨어져 올 줄 알았어.”
수다스럽게 입을 놀리는 늙은 음성의 주인이 휙 백문의 앞에 등장했다.
어지간한 백문도 놀랐는가.
그의 모습을 눈앞에서 마주하자 몸을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수백 번도 더 보았던 얼굴이건만.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잔뜩 썩어 뭉개진 안면.
오른쪽 눈 부위는 녹아내린 머리 가죽이 완전히 뒤덮어 눈썹과 함께 광대뼈 부근까지 처져 있고, 왼쪽 부분은 눈을 중심으로 부풀어 오른 거대한 혹에 물고기의 눈알 같은 것이 붙어 좌우로 움직였다.
치아가 거의 다 빠져 오그라든 입은 쉴 새 없어 꼬물거리고 있어 그 노인이 사람임을 겨우 알려 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 놀랐잖아요.”
백문이 저도 모르게 싫은 소리를 했다.
“잉? 거, 젊은 친구가 비위가 약해서리. 이 년이면 적응할 때가 충분히 된 것 같구먼.”
노인은 백문의 손에서 부싯돌을 넘겨받은 후 손쉽게 불을 일으켰다.
그리고 등으로 옮겨진 불꽃은 곧 활활 타오르며 작은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한동에서 온 문백. 보자……. 오늘은 얼마나 박살이 나서 왔는고.”
노인은 붕어의 눈알을 굴리며 다시 백문을 훑어보았다.
“어이쿠! 이런 상태로 숨은 제대로 쉴 수 있는가? 갈비가 허파를 꾹 누르고 있구먼. 어라? 옆구리에 이건 또 뭐야? 아주 골병이 들었네, 골병이. 쯧쯧, 우선 누워 봐. 뼈부터 붙이자.”
“부탁드립니다.”
백문이 탁자 위에 올라 바른 자세로 누웠다.
잠시 후, 흉측한 노인이 백문의 코에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그에 타고 있는 풀냄새가 진하게 느껴지며 백문은 서서히 정신을 잃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