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운틴 로드 1권
아르도스의 꿈
마운틴 로드 1권(1화)
Chap. 1 아르도스 영지의 소영주가 된 아이(1)
“영주님, 드디어 카스티느입니다.”
강 건너편에 웅장한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좌우의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 25미터의 회백색 성채는 보는 것만으로 외경심을 갖게 만든다.
두 눈에 가득 차 보이는 거대한 성문.
성을 휘도는 강심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5개의 거대한 교각이 서 있고, 그 위에 놓인 마법 도개교는 그 폭만 20미터가 넘어 보였다.
두껍게 먼지가 묻은 여행자 복장의 사내는 란셋을 향하여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 란셋. 수고 많았네.”
“별말씀을요.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내일 저녁에 시작되는 파티까지는 준비할 수 있겠습니다.”
“하하, 그야말로 딱 적당한 것 아니겠는가? 일단은 여관을 정하고 좀 쉬세. 자네는 어떨지 모르지만, 난 지금 몹시 피곤하네. 필콘 영지를 지난 후론 야숙만 했으니, 이젠 따뜻한 물에 온몸을 좀 담그고 싶어.”
왜 모르겠는가? 자신을 생각해 부리는 엄살이라는 것을.
란셋 역시 미소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일단 여관부터 구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세.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성문에 가까워지자 분주한 성문의 일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성문 왼편에는 병사들의 검문을 받느라 일반인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오른편은 한적했지만 기사 다섯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서 있었다.
보기에도 번쩍이는 은빛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치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네 명의 기사가 세워 든 긴 핼버드(Halberd, 도끼창)가 석양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전투용이라기 보다 의전용에 가까운 모습.
그 뒤에는 헤르시온이 분명한 큐래스(cuirass, 흉갑)를 입은 기사가 버티고 서 있었다.
어느덧 도개교를 건넌 란셋은 말에서 내려 눈앞을 가로막은 웅대한 성문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헤르시온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두 사람을 향했다.
“여기는 대 카스틴 왕국의 왕도, 카스티느입니다. 기사 분은 신분을 밝히시오.”
“나는 아르도스 영지의 리믹스 폰 아르도스 영주님을 수행하고 왕도를 찾은 수석기사 란셋 폰 아란이오. 뒤에 계신 분은 국왕 전하의 마흔 번째 탄신을 축하하고자, 왕도를 찾으신 아르도스의 영주, 리믹스 폰 아르도스 백작님이시오.”
장황한 듯하지만 정중하고 위엄 있는 소개.
하지만 왕도의 기사는 무반응이었다.
“실례입니다만, 귀족 증명을 확인하겠습니다.”
멈칫하던 란셋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백작가의 문장을 내보이고는 묵묵히 성문을 통과했다.
뒤늦게 당황하며 예를 취하는 기사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란셋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고 있었다.
수도의 성문을 통과하는 어떤 귀족도 이런 요구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카스틴 왕국의 영지라고 해 봐야 61개.
61명의 영주밖에 없다는 말이다.
더욱이 4공작, 7후작, 12백작 중의 아르도스 백작이었다.
개국공신으로 9대째 내려온 왕위 서열 27위의 고위 귀족인 아르도스 백작이 왕궁도 아닌 왕도 성문에서 귀족 증명을 확인받아야 한다는 현실은 란셋으로 하여금 차라리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런 것이 인심인 것을.’
란셋은 마음을 다잡으며 말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자신이라도 현직 영주이자 고위 귀족인 백작이 마차나 수행인도 없이 달랑 수행기사 하나만 데리고 왕도를 찾았다면 의구심부터 먼저 가질 것이 분명했다.
“송구할 뿐입니다, 영주님.”
“별말을 다하는군, 란셋. 그나마 방이라도 얻었으니 고맙지.”
왕도 중심의 일급여관들에는 이미 예약 손님으로 차 버렸고, 그나마 겨우 얻은 것이 외곽의 선술집과 함께 있는 여관이었다.
란셋은 안타까웠다.
대부분의 고위 귀족들은 수도에 저택을 두고 있다. 아니, 대부분의 영주들은 수도에 저택이 있고, 영지가 없는 행정처 소속의 귀족들 중에서도 수도에 거처를 가진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9대째 이어 온 세습귀족인 아르도스 가(家)가 수도의 저택을 팔아 치운 것은 벌써 10년도 넘은 전대 가주인 헤더 백작의 대였다.
물론 수도에 저택이 없는 귀족들도 많다. 그런 귀족들은 보통 임대한 주택이나, 혹은 거래하는 여관들이나, 그게 아니면 기사나 집사를 미리 보내 거처를 준비하게 했다.
하지만 리믹스 백작은 수행원들도 없이 오직 수석기사만 데리고 왕도를 찾을 정도로 빈한했다.
만약 영지가 부유했다면 달라졌을까?
단언할 수는 없어도 란셋은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기름진 남부의 영지에서 지금의 영지로 옮겼던 전대 가주 헤더 폰 아르도스 때부터 보여 준 백작가의 내력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왕도에 들어온 이후, 란셋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함을 느껴야 했다. 명색이 국왕의 마흔 번째 탄신일이고, 또 등극한 지 10주년이 되는 왕국 최대의 축일이다. 하례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사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왕도에 오기나 했겠는가?
영지에서 왕도까지 빨리 와도 20일은 걸린다.
이 일 저 일 영지 일을 핑계대면서 미루던 백작은 보름 전에야 겨우 출발했다.
당연히 오는 도중 여관에서 쉴 생각은 접어야 했다.
야숙을 하며 밤낮을 달려온 길이다. 그러다 보니 귀족 파티 전날에야 겨우 도착한 것이다.
당연히 국왕 탄신 선물조차 준비되지 않았다.
축일 전야인 이틀 뒤의 저녁 파티에는 선물을 가져가야 했다. 가능하다면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란셋은 조급했다.
하지만 란셋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며 미소를 띠어야 했다.
허름한 여관이지만, 그래도 미소로 자신과 마주한 주군 앞이기 때문이다.
***
선물을 사기 위해 상가를 돌고 있는 란셋은 죽을 맛이었다.
보통, 귀족들은 이름난 장인이 만든 명품 같은 귀물을 미리 준비하거나 영지의 이름난 특산물들을 선물한다. 하지만 아르도스 영지는 특산물 자체가 없는 곳이었다.
테이블로스 산맥의 서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테이블마운틴. 그 서남부 끝에 붙어 있는 아르도스는 전대 영주인 헤더 백작이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버려진 불모의 땅이었다.
보통의 영지 2개 정도나 되는 넓은 영지였지만, 인구는 고작 5만에 불과한 변방의 초라한 영지 아르도스.
북동 지역 전체를 가린 테이블마운틴의 절벽, 그리고 서쪽으로는 해양 몬스터의 천국인 몬스터 해역의 페리스 해가 펼쳐져 있다.
영지로 개발된 것도 이제 겨우 25년이다.
그 기간 동안 아르도스 백작가는 몬스터 퇴치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거기에 영지 전역이 테이블마운틴과 같은 석질의 암반 지대였으니 무슨 변변한 특산물이 나오겠는가?
식량인 곡물마저 이웃 영지에서 사들여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정도로 토지는 척박했고, 테이블마운틴의 영향인지 대부분의 암반 지대에서는 우물조차 찾을 수 없는 곳이 아르도스 영지였다.
당연히 아르도스는 가난하다.
더욱이 영지의 세금은 겨우 25%.
다른 영지는 기본이 50% 이상인 것에 비교하면 말도 되지 않는 세금이었다. 그럼에도 매년 굶어 죽는 주민들을 만들어 냈다.
그 가난을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영지의 상황이 그러니, 당연히 백작가도 돈이 없다.
돈이 부족하니, 란셋이 아무리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도 선물을 준비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물건은 비쌌고, 금액에 맞추려니 초라했다. 명색이 국왕의 탄신을 축하하고, 10년을 맞은 치정을 송축하는 자리에 올릴 선물이다.
적당한 가격에 어느 정도 인사치레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선물. 그것이 쉽게 발견되겠는가.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란셋의 마음은 갈수록 까맣게 타올랐다. 정오에 시장 입구에서 백작을 만나기로 했다. 서두르며 발품을 팔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어느새, 정오를 알리는 신전의 첫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란셋은 서둘러 시장 입구를 향해 발을 움직여야 했다. 주군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한 미소로 자신을 맞이하는 리믹스 백작이 보였다.
부하를 기다리는 주군, 그가 리믹스 폰 아르도스였다.
“란셋, 이 시장엔 무슨 일인가?”
“그게 저…….”
란셋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선물을 사려 했지만 돈이 부족하다고 말하겠는가?
란셋의 속은 타다 못해 새까만 연기를 피워 올렸다.
백작은 그런 란셋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은 듯 물었다.
“혹, 국왕 전하께 드릴 축하 선물 때문인가?”
“……예.”
“이런! 누가 기사인 자네에게 선물을 걱정하라 했는가?”
“그게……. 오토 집사님께서 20골드를 주시며 신신당부를 하셔서…….”
“20골드나? 하하, 오토 집사가 큰마음을 먹은 모양이군. 20골드나 되는 거금을 내놓다니. 흠……, 영지에 그 정도 거금이 남아 있었나? 얼마 동안 모은 것이지? 그런 돈이 있으면서 지난봄에 왜 내놓지 않았지?”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연달아 반문을 쏟아 놓았다.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것이다.
그런 백작을 보며 란셋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이런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운 것이다.
그때 리믹스 백작의 음성이 들어왔다.
“미리 말해 줄 걸. 선물은 걱정 말게. 이미 준비해 왔네.”
“예?”
란셋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백작님께서 무슨 골드가 있으셔서……?”
“하하, 선물이란 게 별건가? 축하하는 마음만 진실하다면, 그 선물의 질이 무어 그리 대단하겠는가?”
“영주님……!”
“걱정 말게. 이걸 보게. 자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이, 이건…….”
백작이 보여 준 것은 30센티미터 정도의 단검.
로딘, 아르도스 백작가의 마지막 남은 보물인 로딘이었다.
칼집과 손잡이까지 은사로 세이지 문양을 새겨 넣고 특이하게 손잡이와 탱(Tang)의 연결부에 보호구가 붙어 있는 단검. 화려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은 은은한 고색에 세월과 위엄이 느껴지는 단검이었다.
더욱이 로딘에는 3서클 마법인 파이어볼이 인챈트되어 있었다.
하루 세 번이나 딜레이 없이 파이어볼을 날릴 수 있는 단검. 아르도스 백작가의 시조인 로딘 폰 아르도스 백작의 친구였던 대마도사 버핸드 사일루스가 직접 인챈트해서 선물했다는 바로 그 로딘이었다.
정말, 선물다운 선물이다.
아마도 국왕께서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토록 귀한 선물을 내놓는 귀족들도 많지는 않을 것이라 란셋은 생각했다.
하지만 란셋은 다른 의미에서 기겁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안 됩니다, 백작님. 저, 절대 안 됩니다. 이것이 어떤 물건인데…….”
“아, 걱정 말게. 이것을 선물할 것은 아니야.”
“……예?”
란셋은 당황했다.
백작은 그것을 선물로 하지 않겠단다.
그럼 무엇을 선물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리믹스 백작의 말은 더더욱 황당했다.
“이 비싼 물건을 어떻게 그냥 드린다는 말인가? 팔아서 선물을 사고, 남은 금액으로는 밀과 종자를 사 가려 하네.”
“그, 그…….”
란셋은 말을 잊어버렸다.
국왕의 선물로 로딘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팔아 선물을 사고 나머지는 밀과 씨앗을 사겠다는 백작…….
리믹스 폰 아르도스 백작은 그런 영주였다.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자신의 체면이나 개인의 영달보다는 영지민들의 안녕을 구할 사람, 그가 바로 아르도스의 영주였고 란셋의 주군이었다.
“하, 하지만 로딘을 판다는 것은…….”
“왜? 내가 주인인데, 내 마음이지 누가 말려?”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마지막 보물이지 않습니까?”
“하하, 이 사람. 왜, 자네가 물려받으려 했는가?”
“그, 그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자네가 이해하게. 별 수 없지 않은가? 식량이 너무 부족하니…….”
“……!”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
란셋은 말을 잊고 백작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