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마운틴 로드 1권(2화)
Chap. 1 아르도스 영지의 소영주가 된 아이(2)


“너무하셨습니다.”
“하하, 란셋,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그래도 탄신 선물인데…….”
“허, 또 그 소린가? 내가 아니더라도 귀한 선물을 준비한 사람은 즐비할 걸세. 나 정도야 그러려니 하실걸? 하하하.”
티 없이 맑은 웃음, 저 나이에 저렇게 맑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시장 한 켠의 낡은 주점에 털썩 주저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입가에 거품을 묻히며 흑맥주를 들이키는 이가 백작이라니?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핫하, 먹음직스러운 양고기 스튜군. 자, 어서 먹고 서둘러 종자를 알아보세. 그래도 저녁 파티에는 얼굴이라도 비쳐야지.”
“예. 드시지요.”
향기로운 냄새와 함께 모락모락 수증기를 올리는 스튜 접시와 윗부분이 살짝 탄 검은 고동색의 보리빵이 먹음직스럽게 식탁에 올려져 있었다.
흑맥주를 들어 벌컥 들이킨 리믹스 백작과 란셋은 짧은 식사 기도와 함께 나무 스푼을 들어 스튜를 떠 올렸다.
먹음직스런 향기가 코끝을 감돌고, 허기진 미각을 자극한다.
찰나였다.
쿠당탕!
“헉!”
“엥!”
작은 아이 하나가 백작의 발 앞으로 굴러 넘어졌다.
무의식적으로 백작은 아이를 부축하려 오른손을 뻗었다. 백작의 갑작스런 행동으로 식탁이 밀리면서 반대편의 란셋이 황급히 일어섰고, 그 바람에 다시 식탁이 기울어져 스튜가 담긴 접시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따당땅! 텅! 텅!
시끄럽고 번잡한 소리들.
바닥은 쏟아진 스튜와 건더기로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이놈! 이 도둑고양이 같은 놈!”
“멈추게!”
쿠탕!
어느새, 프라이팬을 휘두르며 주방에서 뛰어나온 주방장.
란셋이 손목을 쳐올리자, 프라이팬은 낮은 천정의 나무 기둥에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음을 냈다.
“나, 나리…….”
주방장은 손을 부여잡고, 난감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비록 남루해 보였지만 상대는 기사가 분명했다. 손을 쳐 내는 솜씨나 분위기는 결코 용병 나부랭이는 아님을 보여 주었다.
기사면 최하위지만 귀족이다. 귀족이 기분이 상해 평민의 목을 잘라도 대륙의 법은 용납하고 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을 잘못 잡은 모양이다.
백작의 품에서 오들오들 떨며 두 눈을 감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주방장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쳐 죽일 놈의 거지새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주방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 이쪽을 주시하던 작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주방장은 답답한 마음에 카운터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인은 벌겋게 붉힌 얼굴로 고개를 외로 돌렸다. 주변을 둘러보자,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늦은 시간이라 셋밖에 없는 손님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도 주방장의 눈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마침 아이를 품에 안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 어린아이니 너무 책하지 말게. 스튜 가격은 치를 것이니 다른 요리를 내놓게. 사실 자네의 스튜에서 풍기는 냄새에 군침이 돌았거든.”
“아! 예, 예.”
어떤 말인데 거절하겠는가?
황급히 허리를 숙일 때, 그것을 막는 외마디 비명.
“악!”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자 백작은 아이를 내려 주었다.
문득, 바닥에 쏟아진 스튜를 핥고 있는 고양이와 그 고양이를 잡으려는 아이가 눈에 띄자, 주방장은 기겁을 했다.
“이런! 도둑고양이 새끼!”
“야옹!”
발길질에 놀란 고양이는 스튜의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쏜살같이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야옹아!”
아이 역시 고양이를 따라 주방으로 사라졌다.
주방장은 땀을 흘리며 기사와 일행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를 안았던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 앉았고, 기사는 품에서 1실버를 꺼내 던졌다.
“음식 값을 제하고 나머지는 자네에게 주는 봉사료일세.”
“아! 예……? 예. 가, 감사합니다.”
1실버는 100쿠퍼다. 스튜 한 접시에 7쿠퍼이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주방장은 한껏 허리를 숙여 굽실거리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주방어귀에서 돌아선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척박한 아르도스의 대지에 적합한 종자는 거의 없었다. 아르도스는 산지는 아니지만 테이블마운틴의 바닥 부분으로 영지 대부분이 암반 지대였다. 그나마 양호한 곳조차 토양이 거의 없는 자갈밭이었다.
그러니, 그런 토양에 적합한 종자를 찾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카스틴 제일의 상단인 모트모스 상단의 도움으로 리믹스 백작은 콩이라는 작물을 구할 수 있었다. 콩을 처음 재배하려면 먼저 재배했던 곳의 농토를 필요로 한다는데, 모트모스 상단의 상주는 기꺼이 토양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오토 집사가 보낸 20골드와 여행 경비를 제외한 남은 골드를 모두 투자해 밀을 구입한 리믹스 백작과 란셋은 기쁜 마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서둘러야 저녁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시장을 벗어나 바쁘게 걸어가던 란셋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잠시 전에 지나친 오른쪽 골목을 돌아보았다.
“……!”
“왜 그러나, 란셋?”
“아, 아닙니다, 영주님. 가시지요.”
“잠깐만! 란셋.”
지나치려고 결심한 란셋의 발을 백작이 붙잡았다.
돌아선 백작의 눈에도 보인 모양이다.
“영주님, 왕도의 골목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냥 버려두고 가시지요. 지금도 시간이 넉넉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부랑아 같습니다.”
란셋의 만류에도 골목으로 들어선 백작은 좁은 골목의 쓰레기통 사이에 쓰러져 있던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니야.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의 그 아이일세.”
“네? 아, 그렇군요. 아니 이 녀석……?”
“어허! 누가 이렇게 어린아이를……?”
“죽은 건가요?”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리는 백작으로부터 아이를 받아 들던 란셋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아이를 살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네. 자네가 먼저 가서 여관으로 의사를 데려와야겠네.”
“예, 알겠습니다. 영주님.”
약간은 당황한 모습으로 란셋은 뛰어갔다.
바스타드 소드를 철컥거리며 뛰어가는 란셋을 보며 골목을 나오던 백작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결코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닌, 마지막으로 골목을 돌아보던 눈에 띈 것이다.
얼룩무늬의 작은 짐승. 고양이였다.
죽어 있는 고양이 주변에는 이물질과 핏물이 뒤섞인 토사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문득, 백작의 머리로 번뜩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란셋!”

“어서 오십시오, 저 안쪽에 자리가…….”
“주방장을 나오라 하게.”
“그, 그것이…….”
백작과 란셋을 알아본 사환은 당황하며, 카운터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으, 허억!”
슬며시 주방으로 향하던 주인은 란셋에 의해 목덜미를 부여 잡히며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 중에 눈에 익은 몇몇이 테이블 위로 뛰어오르며 대거를 뽑아 들었다.
챙! 챙!
우당탕!
한통속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신속하게 반응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연히 이때는 결코 망설여서는 안 된다.
란셋은 테이블 하나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우당탕!
허공에 떠오른 테이블이 사내들이 있는 테이블에 떨어졌다.
움찔한 사내들이 다른 테이블로 뛰어 물러서려 할 때, 떨어지는 테이블의 뒤를 따라 란셋의 신형이 파고들었다.
퍽! 퍽!
아르도스 백작가의 수석기사 란셋 폰 아란. 백작가가 남부에 있다면 현직 기사단장이었을 존재였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을 오래전 넘어서 상급에 다다른 란셋의 움직임을 따를 자는 왕국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곳에는 없었다.
더욱이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른 리믹스 백작까지 가세한 상황에서 암살자 길드도 아니고 도둑 길드, 게다가 조직원 정도가 감당할 수준은 애당초 아닌 것이다.
식당 뒷문으로 도망치던 주방장까지 잡혀 오고, 도둑 길드의 지부가 온통 뒤집어지고, 지부장이 참혹한 얼굴로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사건의 정황이 드러났다.

로딘을 판 자금으로 선물을 찾아 헤매던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장물을 취급하는 도둑 길드의 상점이었다.
그곳에서 나름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발견한 두 사람은 허기가 졌기에 맞은편에 보이는 식당으로 가자고 이야기한다.
선물 대금을 치루기 위해 꺼낸 주머니를 보았던 상점의 주인은 도둑 길드의 지역 간부.
맞은편의 식당도 상점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하던 너구리굴 역할의 아지트였다.
족히 200골드는 너끈할 주머니를 확인한 간부는 선물을 포장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번 후, 식당의 조직원들에게 전언한다.
기회였다. 두 사람의 복장은 여행객 차림. 그렇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면 그만인 것이다.
과연, 둘은 처음의 말대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에는 맞은편 상점의 주변을 감시하던 조직원들이 여차하면 대거를 찔러 넣을 준비를 갖춘 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방 뒷문으로 들어간 간부는 독버섯에서 추출한 독과 함께 강력한 수면제를 주방장에게 건넸다.
비프스튜였다.
소고기를 버무릴 때 독버섯의 독을 버무렸고, 스튜 국물에는 수면제가 향신료처럼 녹아들었다. 더불어 보리 빵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화덕에서 나왔다.
준비 완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사환이 여유롭게 접시를 배달했고, 두 여행객은 나무 스푼을 들어 국물을 떠 올렸다.
많은 시간도 필요 없을 것이다.
10분 정도?
식사를 마치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지면서 피를 토할 것이 분명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꼬마일까?
주방장인 필이 식당 뒷골목에 있던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에게 남은 음식을 몇 번 주었는데, 그 뒤로 주방의 쓰레기들을 치워 주곤 해서 내버려 두었던 아이.
이 녀석이 주방 구석에 있다가 간부가 하던 말을 들은 모양이다.

그 뒤의 일은 모두가 경험한 바였다.
도둑 길드 지역 담당 지부장은 거래를 요청했다.
이 사건은 도둑 길드와 연관 짓지 않고, 간부와 주방장만 구속시키는 대신에 뺏으려 했던 200골드를 제시했다.
엄청난 금액.
란셋은 불가를 외쳤지만 백작은 웃으며 받아 들였다.
200골드.
1골드는 10실버고, 1천 쿠퍼로, 6인 가족이 3개월은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이다.
수확기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시세가 떨어진 지금 밀의 가격은 10킬로그램에 28쿠퍼 정도.
200골드면 못해도 칠팔십 톤의 밀가루를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다.
물론 배송비가 더 추가되겠지만 모트모스 상단이라면…….
리믹스 백작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신전에 들러 10골드나 헌금하고 아이를 찾았다.
여관에 도착하니 멀리서 들리는 신전의 종소리가 11시를 알려 주었다.
안타까운 란셋의 표정을 바라보던 백작이 빙긋이 웃는다.
“란셋, 비록 파티에는 참석 못하지만 어린 생명을 구했지 않은가? 더구나 이 아이는 우리의 생명을 구한 아이야.”
“하지만 오랜만에 왕도에 오셔서…….”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국왕 전하의 전언만 없었다면, 결코 왕도에 올라오진 않았을 걸세. 앞으로도 마찬가지네. 아버님께서 영지를 옮기셨을 때부터……. 아니, 오딘 왕국과의 화약을 맺은 그 순간부터 우리 아르도스는 귀족들과의 인연이 끊어진 것일세. 다만 선대로부터 내려온 약속만이 우리에게 남았을 뿐…….”
순간적으로 비감한 표정으로 변했던 란셋은 화급히 마음을 다잡고 화제를 돌렸다.
“영주님, 이 아이는 어떻게 하지요? 도둑 길드에서도 이 아이가 누군지, 어디서 사는지를 모른다고 하니……. 그렇다고 계속 데리고 있을 수도 없고 말입니다.”
“도둑 길드에서 알아보고 연락을 준다 했으니 당분간은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겠지. 더욱이 아직은 어린아이이니 이왕이면 우리가 왕도에 있는 동안은 데리고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
“혹시라도 연고자가 없을 것이 염려스러워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식당 뒷골목에서 지내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생각한 것일까? 말과는 달리 란셋의 얼굴엔 왠지 모를 연민이 흘렀다.
전대 영주인 헤더 백작은 고아였던 자신을 거두어, 그 아들들과 같이 가문의 마나연공법과 검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왕국 기사아카데미까지 보내 주었던 것이다.
백작은 그런 란셋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데려가세.”
“예?”
놀라는 란셋을 보며 리믹스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무얼 그리 놀라나? 내게 자녀가 있는가, 다른 형제가 있는가? 아니면 자네에게 자식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면 우리에게 친척이라도 있는가? 다른 이들 이야기는 하지도 말게. 어차피 내가 죽으면 가느롱 공작은 우리 영지를 찢어 자기 가신들에게 주려고 할 걸. 안 그렇겠나?”
“여, 영주님…….”
“이 사람아, 자네가 지금이라도 혼인하여 자식을 보겠다면, 아르도스 영지를 그 아이에게 맡기겠네. 어떤가?”
“영주님!”
란셋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란셋의 반응을 일절 외면하고, 백작은 말을 이었다.
“자네도 참 답답하네. 왜 그리 고집을 부리나? 아카데미 시절부터 자네가 좋다는 레이디들이 한두 명이었나? 왜 그리 마음을 못 잡는가?”
“마담 르엔느께서 분명 아기씨를 잉태하실 것입니다.”
“하하하, 그러면 좋지. 하지만 내 나이가 벌써 50이 가깝네.”
“신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아기씨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고맙네, 란셋. 하지만 나는 자네가 예쁜 레이디를 만나 자네를 닮은 아이를 가지는 것이 더 기쁠 것 같네.”
“여, 영주님…….”
“하하, 말 나온 김에 왕도에서 자네의 신붓감을 구해 볼까?”
“영주님,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보게, 란셋. 잊을 것은 잊게!”
“…….”
한동안 란셋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란셋을 바라보는 백작의 얼굴도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후우…….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는 내게 있어 죽은 누구보다 더 소중한 가족일세.”
“감당치 못합니다. 제가 어찌…….”
“아버님이 자네를 데려오던 날부터 우리 남매에게 자네는 형제요, 한 가족이었네. 자네가 그 아이를 잊지 못하는 만큼 나도 잊을 수가 없네. 이젠 나도 놓을 것은 놓고 싶다는 것을 알아주게.”
“영주님…….”
“그래. 말이 길어지면 더 괴롭겠지. 어찌되었든 이 아이를 당분간 우리가 데리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보다는 나을 것 아닌가. 우리가 없는 동안은 여관 주인에게 맡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