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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
크림슨 티어즈 1권(1화)
프롤로그(1)
아버지는 얼굴에 상처가 많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이 싫었다.
함께 다니면 그 험상궂은 얼굴이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내가 그런 기색을 보일 때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거친 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헝클곤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할 뿐이다.
7살 때의 일이다.
항상 싱글싱글 웃고 계시던 아버지는 그날만큼은 인자한 얼굴로 내 손에 검 한 자루를 쥐어 주셨다.
“이 검은 네 의지로 휘둘러선 안 된단다.”
쥐어진 검은 작은 나의 손에는 너무도 무겁고 컸다.
아직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9살 겨울.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조금 무서운 아이였다.
깔보는 것 같은 눈빛과 새빨간 눈동자가 섬뜩했다.
그녀의 곁에는 귀부인도 있었다.
“인사드려라.”
나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를 밟혀 봤다.
그래도 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다음 해 봄.
지금까지는 장난이라는 듯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웠다.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더 환장할 것은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넌 그분을 모셔야 한다.”
내 머리를 질근질근 밟아 주던 그분을 모셔야 한단다.
대체 왜?
문무겸비.
아버지는 머리가 썩 좋지 않은 내게 그것을 원하셨다.
그리고 나는 우리 집안이 ‘미스린토’라는 가문의 봉신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을 봉신가의 ‘검’ 이라 부른다는 것도…….
아무래도 난 지난 몇 년간 학식을 쌓거나 검을 수련하며 인격적으로 많이 성숙해진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고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속도 모르고 흐뭇하게 웃으셨다.
늘 함께해 주는 웨리 누나도 예쁘게 웃으면서 새우가 잔뜩 들어간 해물 스튜를 만들어 줬다.
정말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날 먹었던 해물 스튜는 최고로 맛있더라.
어느새 나는 약관이 되어 있었다.
검을 놓친 아버지는 기쁜 얼굴을 하셨다.
“이젠 정말 웬만큼 용을 써도 힘들구나. 장하다! 멋지게 성장해 주었다, 내 아들! 우리 가문의 첫 영광이다.”
미스린토로 갈 때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13년 동안 품에서 벗어난 적 없는 검 한 자루를 꼭 쥐고 마중 나온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창 너머로 보이는 두 분의 얼굴을 끝까지 보고 있기가 괴로워서 일찍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시 뵐 수는 있는 걸까?
1. 미스린토의 네 자매(1)
체셔를 페라넨 공작령의 위스빌에서 미스린토 본가가 있는 웰건으로 안내할 마차는 쉬지 않고 보도를 달리고 있었다.
여러 봉신가 중에서 가장 먼 곳에 있었던 클라인 가이니만큼, 예정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체셔 도련님.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출발했어야 했는데…….”
체셔와 마주 앉아 있는 시종의 안색은 시종일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마저 긴장으로 바싹 말라 있었지만 그는 침을 바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종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일년전쟁’이라는 것을 자세하게 몰랐던 그는 체셔를 위해서 여유롭게 행동했을 뿐이었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체셔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니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체셔가 창문을 열었다.
마차가 일으킨 흙먼지가 날아들어 왔다.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면서 감춰져 있던 섬뜩한 검상이 드러났다.
그것을 발견한 시종이 숨을 삼켰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상처와 함께 얼굴이 전부 드러나니 마냥 학자 같았던 분위기가 싹 사라졌기 때문이다.
“일년전쟁도 깨끗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군요.”
말을 탄 무리가 마차를 쫓아오고 있었다.
“아……!”
시종은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불과 반 시간도 되지 않았다.
보도를 막아서고 있던 용병들을 피하느라 먼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행히 따돌렸나 싶었는데, 어느새 말을 타고 쫓아오고 있다.
역시 제시간에 도착하긴 힘든 걸까?
이제 어떤 처벌을 받게 될까?
너그러이 용서받을 일이 아니다.
‘일년전쟁’이라는 큰 행사의 선포식에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봉신가의 ‘검’을 지각하게 만들다니…….
“으아아!”
마부석에 있던 마부도 놀란 비명을 질렀다.
그다지 부유한 용병들은 아니었는지 석궁 같이 위협적인 무기는 없었지만, 조잡하게 만들어진 투창(Javelin)을 담은 통을 하나씩 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죽이기 위함이리라.
“워워! 워!”
말이 죽으면 꼼짝없이 발이 묶이는 상황이다.
마부는 어떻게든 말만은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고삐 줄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마차의 스토퍼(Stopper)도 있는 힘껏 눌렀다.
비스듬히 꽂혀 있던 튼튼한 쇠막대들이 땅을 갈며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런데 체셔가 마부석으로 뚫려 있는 창을 통해 마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계속 달리세요.”
마부는 스토퍼를 놓으며 다시 말에 채찍을 가했다.
따라오던 용병들도 속도를 줄이려다가 혀를 차고는 투창을 준비했다.
“뭐, 뭐하십니까?!”
그때 체셔가 마차 문을 여는 것을 본 시종이 경악했다.
“곧 따라가겠습니다.”
“으아악!”
마부는 지척까지 다가와서 투창을 내던지려는 용병을 보면서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에 비치는 용병은 살인에 미친 정신병자처럼 보였다. 세상의 어떤 인간이 사람을 죽일 상황에서 광소를 짓고 있겠는가?
하지만 마부가 다시 그 용병을 돌아봤을 때는 그런 살인마의 광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 머리통이 몸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 용병은 조금 더 따라오다가 몸에서 힘이 풀린 듯 고삐를 놓치며 말안장에서 나가떨어졌다.
그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던 용병 또한 얼굴에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무, 무언가가…… 날!’
결코 생각하기 싫은 두려운 감각, 통증이 죽음을 속삭였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체셔 클라인’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멍청한 놈이라고 비웃었지만,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목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고삐 줄을 놓고 머리를 꽉 붙잡았다.
지금 코앞에서 목이 떨어져 나간 동료처럼 자신도 머리통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어이없는 착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가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잘렸던 목이 다시 붙는 기사(奇事)는 일어날 수 없었다.
주르르…….
목에서 핏물이 벌컥벌컥 쏟아져 나와서 몸을 적시는 느낌이 드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잘려 나간 머리를 두 손에 든 괴기스런 모습으로 한참을 달려가다가 결국 머리를 든 손을 놓치며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쫓아오던 용병들이 멈춰 섰다.
아니, 마차를 쫓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습격 대상인 체셔 클라인이 고맙게도 마차에서 내려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곱게 내리지 않고 동료 두 명을 골로 보내 버린 것이 고맙지만도 않았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갑자기 저놈들 목이 떨어져?’
아무리 흙먼지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실루엣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셔는 마차에서 뛰어내렸을 뿐이다.
한데, 앞서 쫓아가던 두 명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됐다. 심지어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던 한 용병은 ‘사람 머리가 원래 탈착형이었던가?’라는 얼빠진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용병들은 체셔를 보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의뢰를 받아들였을 때 미스린토 봉신가의 ‘검’이라서 내심 걱정을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얼굴도 그렇고 분위기가 희멀건 책벌레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 그 일은 이 ‘검’이 뭔가 비겁한 술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검을 들고 있는 자세를 보라!
어딜 봐도 빈틈투성이지 않은가!
“왜 가만히 있어? 거, 겁이라도 집어 드셨나?”
하지만 본능은 솔직한 법.
초식동물이 아무리 허세를 부려 봤자 포식자 앞에서는 결국 도망치는 신세다.
겉으론 당당했지만 눈동자는 자신도 모르게 떨렸고, 마음은 이미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하다는 군중심리와 다들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함정 같은 동조심리는 밑도 끝도 없는 허세만 부리게 만들었다.
“만약 목숨을 구걸하겠다면…….”
딸칵.
그때 체셔가 차고 있던 칼집에서 검이 갈무리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체셔가 입을 열었다.
“‘누가 보낸 것이냐?’라는 식상한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아봐야 소용도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말하신다고 살려 드릴 생각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차피 주군의 적이 될 것이잖습니까?”
“뭐?”
용병들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용병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체셔 클라인은 완벽한 발검(拔劍) 자세에서 검을 갈무리하고는 빈틈투성이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순간, 체셔와 눈을 마주친 용병은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죽었다.’
용병 생활을 하는 동안 수없이 자신을 구해 줬던 믿음직한 파트너인 ‘위험에 대한 직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쉴 때가 되었다며 위로하듯 속삭였다.
그리고 하나둘씩 침묵하기 시작했다.
일부 감이 좋은 용병은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후에 그걸 느껴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어?”
세상이 기울어졌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다가 ‘퍽!’하는 충격과 함께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
고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