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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2화)
1. 미스린토의 네 자매(2)
찌익!
머리를 잃은 목에서 두 개의 핏줄기가 기세 좋게 솟아올랐다.
체셔의 바로 앞에 있던 용병의 머리가 굴러떨어진 것이다.
‘무슨……?’
다른 용병들도 슬슬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찌릿한 통증이 육신을 죽음이라는 늪으로 한 발, 한 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스르르.
“어, 어어어?”
바로 앞에 있던 동료가 왼쪽 어깨부터 반대편 골반까지 대각선으로 나뉘고 있었다. 그는 몸이 나뉘고 있는 도중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허어어어, 커르륵!”
그것을 본 용병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목구멍을 타고 핏물이 왈칵 솟구쳐 나왔기 때문이다.
“커걱!”
“크르르.”
십여 명의 용병들은 차례차례 죽음의 꽃을 피웠다.
체셔는 이미 그 자리에서 몸을 돌리고 있었다.
이제 그 꽃을 보게 될 것은 굶주린 들짐승밖에 없으리라…….
“이런.”
체셔는 돌아오고 있는 마차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금방 따라갈 생각이었는데 너무 지체했던 걸까?
“체셔 도련님! 무, 무사하십…… 헉?!”
마차에서 내린 시종이 허겁지겁 달려오다가 숨을 삼켰다.
체셔의 뒤에 늘어져 있는 ‘고깃덩어리’들 때문이었다.
잘려 나간 머리, 나뉘어 버린 몸뚱이.
하지만 그것들 모두는 부릅뜬 눈으로 공포와 절망에 물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에 그들이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다, 당신! 무, 무슨 짓을……?!”
시종은 너무 놀라서 상대가 봉신가의 ‘검’이라는 것조차 잊고 해선 안 될 소리를 했다.
하지만 체셔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온화했다.
“왜 그러십니까?”
“무, 무슨 수를 쓴 겁니까? 맙소사! 마, 말도 안 돼. 이런 단시간에 어떻게 하면 사람이 저렇게 되는 겁니까?!”
체셔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봉신가의 ‘검’이라는 자. 이 정도도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대답하고 있는 체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아! 당신이 말하는 ‘이 정도’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아무리 이 상황을 납득하려고 노력해 봐도 소용없었기에 그 후, 시종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
마차가 멈춰 선 곳은 동화에나 나올 법한 장미의 정원이었다.
황홀하게 흐드러진 장미는 아름다웠지만 저택의 그림자에 뒤덮여 있어서 스산한 귀기를 풍겼다.
“체셔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마차의 문을 열어 주는 시종의 목소리에 감격과 안도가 교차했다.
정말 한때는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체셔 덕분에 빠듯하긴 했지만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체셔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는 아무리 봐도 고생 모르고 자란 귀공자 같아 보였다.
시종은 아직도 이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벌였는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믿지 못했을 것 같기도 했지만…….
바람이 달콤한 장미향을 품고 불어왔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바람이니만큼 더운 기도 제법 어려 있었다.
시종은 다시 한 번 체셔의 상처를 볼 수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섬뜩한 검상.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그리고 처음에는 몰랐지만 허리에 메어져 있는 낡은 검 한 자루도 예사로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웃는 얼굴의 또 다른 모습인가…….’
그의 신위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가끔 보이는 그의 검상을 떠올려 보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체셔 클라인을 제시간에 미스린토 본가로 데려왔으니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
이제는 푹 쉬고 싶었다.
“으리으리하군요.”
장미의 정원과 저택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체셔에게 집사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집사 호르문드라 합니다. 긴 여정으로 힘드시겠지만 곧 선포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체셔는 호르문드를 따라가면서도 저택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미의 정원에 둘러싸인 저택은 밤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유령선 같았다.
그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볼수록 빠져드는 신비로운 매력이 느껴졌다.
미스린토 가문이 세간에서 신비롭고도 공포적인 이미지를 굳히고 있는 것이 이러한 분위기 때문은 아닐까?
체셔는 앞서 걷고 있는 호르문드에게 물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오신 겁니까?”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택의 내부는 스산한 겉모습과 달리 화사했다.
현관부터 시작된 융단은 반원형으로 이어진 2층 계단까지 펼쳐져 있고, 그 길의 벽 쪽에는 명성 있는 예술가들의 예술품이 장식되어 있었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빛나는 장식에서 느껴지는 중후한 멋 또한 일품이었다.
호르문드는 화려한 용(龍)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오크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손을 대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값비싸 보이는 문이었다.
“다과회를 즐기고 계실 겁니다. 단상에 계시는 유시엘 아가씨께 인사를 드리세요. 다른 분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체셔는 미리 듣긴 했지만, 그래도 난처한 듯 되물었다.
“정말 그래도 됩니까?”
호르문드는 새삼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서로 목에 칼을 들이댈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오늘은 미스린토 가문의 네 자매가 가지게 될 ‘검’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이는 날이다.
미스린토는 세간의 귀족 가문과 다르다.
대외적으로는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여왕의 친필 문서에서조차 미스린토 백작가의 최고 권력자인 에크샤를 ‘여백작(Countess)’이라 표기하지 않고, ‘당주(Present master)’라고 표기한다.
당주를 선출하는 방법도 유별나다.
타 귀족 가문은 세습적인 성향으로 자식에게 가문의 작위나 재산이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끔 후계자 지명으로 암투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공식적이지는 않다.
그런데 미스린토는 암투를 세간에 알린다.
아니, 밖으로 알리는 이상 그것은 더 이상 암투가 아니게 된다.
스케반니아 여왕국엔 200여 개의 백작 가문이 존재한다.
그중 일개 백작 가문에서 그런 ‘행사’를 한다고 누가 눈여겨 보겠냐만, 미스린토는 단연 예외였다.
미스린토 가문은 ‘스케반니아의 어둠’이라 불린다.
여왕에게의 입김도 셀뿐더러 귀족들은 작위의 고하 없이 미스린토 가문을 ‘사신’이라 칭하며 두려워한다.
특히 베일에 싸여 있는 미스린토 장로회는 그 힘을 추측하기조차 힘들다.
심지어 여왕조차 그 정체를 짐작만 할 뿐 자세하겐 모르고 있다.
장로회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조차도 의문이지만 여왕의 명령―실제론 부탁―이 미스린토에서 이행되면 수수께끼에 쌓인 장로회의 흔적이 남곤 했다.
한 이야기로, 미스린토에 밉보이면 목이 달아난다고 한다.
그들의 짓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추궁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미스린토는 증거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 스케반니아 여왕국에서 미스린토를 추궁할 용기 있는 멍청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장내에 모인 귀족들은 미스린토에 밉보여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절규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 왔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이곳까지 그 무거운 엉덩이를 질질 끌고 참석한 이유다.
어쨌든 ‘일년전쟁’이라는 행사로 후계자들이 사투를 벌인다.
거기서 살아남은 자가 차기 당주가 된다.
여왕조차 좌지우지할 스케반니아 최고의 권력을 지니는 것이다.
무력, 지략, 암살 등 어떠한 수단도 인정한다.
이번 전쟁처럼 후보들의 수가 적은 경우는 위협이 되는 한 사람을 목표로 정해서 동맹을 맺고 먼저 죽이는 것도 인정했다.
즉, 어떠한 방법으로든 하나만 살아남으면 되는 ‘배틀 로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 년을 꽉 채우는 일도 드물지만, 만약 일 년 동안 승부가 나지 않을 경우엔 당주의 판단으로 승패가 결정된다.
그리고 나머지는 죽는다.
어이없고 잔혹한 규율이지만 미스린토가 스케반니아에 등장하고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래 왔다.
그 판단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공로’다.
전쟁에서 서로 씹고, 뜯으며, 골육상쟁을 벌이는 것도 좋지만 장기적으로 봐서는 대외적으로 무언가를 보여 줘야 했다.
체셔는 인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일년전쟁’에서, 막내 유시엘을 주군으로 삼아 그녀를 지키고, 의지를 실행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봉신가의 ‘검’이었다.
“그럼 들어갑시다.”
호르문드가 문을 열었다.
체셔도 그 뒤를 따랐다.
미스린토의 관계자들을 비롯해서 다른 가문에서 찾아온 귀족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체셔의 등장을 주시했다. 몇몇 사람들은 체셔의 수려한 외모에 감탄사를 내뱉기도 하고, 무(武)에 관심이 있는 자들은 범상치 않은 기도에 경탄하기도 했다.
단상엔 네 자매가 일정 간격을 두고 오크나무 문에 양각되어 있는 것과 같은 용 문양이 새겨진 황금빛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검’을 곁에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은 막내인 유시엘밖에 없었다.
다른 봉신가의 ‘검’들은 체셔를 향해 비웃음을 흘리거나, 유시엘을 보면서 가엾다는 표정을 지었다.
체셔는 호르문드와 헤어져서 단상으로 올라갔다.
아홉 살 때 자신의 머리를 잘근잘근 밟아 주던 그 오만한 계집애라곤 믿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여성이 한쪽 다리를 꼰 모습으로 체셔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도 안 변했군.’
꼬마일 때도 진성 S의 면모가 보이긴 했지만, 지금도 그 내려다보는 눈빛은 여전하다.
그렇다곤 해도 감히 어떤 수식어도 붙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고르게 자라서 차분한 분위기를 품은 화사한 금발과 고명한 화가가 심혈을 다해 그린 것 같은 아미. 그 아래서 오래된 와인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미스린토 특유의 붉은빛 눈동자. 장미처럼 매혹적인 입술까지!
그녀의 미모는 단연 자매들 중 으뜸이었다.
체셔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유시엘 아가씨를 뵙습니다.”
“…….”
유시엘의 턱 끝이 살짝 움직였다.
체셔는 몸을 일으켜 다른 ‘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곁에 섰다.
드디어 모든 ‘검’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어서 현 당주 에크샤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청색이 감도는 흑발과 어우러진 검은 벨벳 드레스. 그것과 반대되는 새하얀 피부. 인광(燐光)이 어른거리는 압도적인 눈빛. 그 흑백의 조합에서 나오는 심연과 같은 분위기는 마주하기조차도 두려울 정도다.
체셔는 11년 전에 유시엘과 함께 왔던 에크샤의 얼굴을 기억해 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분은 나이를 전혀 안 드신 것 같군.’
누군가의 조용히 하라는 요구도 없었지만 에크샤의 존재감은 장내의 소란을 절로 멎게 했다.
이곳에 모여 있는 귀족들 중엔 에크샤와 초면인 사람도 있고, 면식이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생각은 하나였다.
‘여왕께서도 한 수 접어 준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여제(女帝)의 기백이로군!’
기백도 기백이지만 마주치는 순간 ‘두려움’이 먼저 엄습해 온다. 만약 바로 앞에서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상대가 누구든 먼저 고개를 숙일 것이다.
분명 저런 부류의 인간은 날 때부터 절대자의 운명을 타고났으리라.
에크샤는 여성의 몸이었지만, 자신보다 높은 직위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이 자리에서 조금의 주눅도 없었다.
오히려 무심한 눈빛은 요요한 빛을 머금고, 등장과 동시에 좌중을 압도했으며 그 당당한 자태는 당주로서의 기품과 자신감을 고스란히 표출해 냈다.
조용한 공기를 가르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