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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3화)
1. 미스린토의 네 자매(3)
“가문의 작은 행사에 자리를 빛내 주신 귀빈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말투는 정중하다.
하나, 기세에는 거침이 없다.
몇몇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신음을 흘렸고, 일부는 입을 반쯤 벌리고 넋이 나갔다. 이백여 명에 달하는 정군(政軍)의 인물이 그녀의 첫 인사에 압도당한 것이다.
비록 일부였지만, 처음 그녀를 보게 된 자들은 저 ‘여자’를 시험해 볼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한마디에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은 본가의 일년전쟁 선포를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작은 피해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해 드릴 것이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자매가 그동안 준비해 온 세력을 가지고 특정 지역에서 대립한다.
그 세력이 무엇인지는 당주와 장로회, 그리고 후계자 개개인만이 알고 있다.
사실 귀족들에게 이 ‘행사’는 몸에 닿는 피해는 거의 없다. 하지만 후계자들의 소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대표 세력’이 공개된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매들 중 누구에게 연을 붙이느냐에 따라서 일 년 후 당주가 결정될 때 자신의 입지가 바뀐다.
비록 백작가지만 ‘미스린토’라는 힘을 등에 업으면 정계에서의 생활이 아늑해진다.
눈치 볼 게 없어진다.
미스린토라는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지릴 사람들이 왕실에 수두룩한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에크샤가 뒤로 물러서고, 장녀 에틸랑쥬와 그녀의 ‘검’ 오라크 베스틴이 앞으로 나왔다.
“오오!”
색이 옅은 붉은 머리카락과 에크샤와 쏙 빼닮은 눈매. 소녀다움을 벗어던진 몸에서 풍기는 요염한 매력이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틸랑쥬는 별 다른 인사 없이 일년전쟁에 관한 정보를 공개했다.
“이번 무대는 압실란 공작령입니다.”
스케반니아 여왕국은 세 곳의 공작령을 두고 있다.
그중 압실란 공작령은 전(前) 여왕 바제인의 셋째 아들이 관리하고, 61개의 영지를 가진 스케반니아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홀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압실란 공작령에 종속되어 있던 자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웃는 사람들은 구린 것이 있든 없든 윗대가리만 죽는 상권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우는 것은 구린 것이 가득한 정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 년 후에도 승부가 나지 않았을 경우에 당주의 판단을 좌지우지할 ‘공로’의 밑밥이 될 것이다.
“저의 대표 세력은 ‘바하누스 결사대’입니다.”
전 여왕 바제인은 이스리아 국교회가 너무 비대해지자, 견제 목적으로 루메아 정교를 제2의 국교(國敎)로 받아들였다.
바하누스 결사대는 20년 전에 그 루메아 정교를 대항할 목적으로 이스리아 국교회에 의해 창설됐다.
하지만 그 무렵 바제인이 지병으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렇게 고삐가 풀린 루메아 정교는 단숨에 세력을 넓히는 것도 모자라, 기존에 유일한 국교로 자리 잡고 있던 국교회의 존속마저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국교회는 표면적으로 정교를 인정하면서, 바깥으로 내보였던 정교의 반대 세력을 나몰라라는 식으로 내쳐 버렸다.
정교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게다가 이념도 국민들에게 잘 먹혔기 때문에 국교회는 저항을 포기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공존을 선택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공중에 붕 뜨게 된 국교회의 저항 세력은 흩어지거나 바하누스 결사대에 합병되었고, 그들은 지금까지도 국교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에틸랑쥬는 그들을 등에 업었다.
종교적인 문제라서 예민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현 여왕 네르민도 정교의 존재를 인정한다.
바제인의 생각대로 그 존재만으로 국교회에 대한 견제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교는 국외―몬골트 시국(市國)―에 본단을 두고 있다.
국교회도 원래는 할켄 왕국에 본단이 있지만 스케반니아의 ‘유일국교’라는 이유로 내부의 사사로운 것까지 관여한다.
반대로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정교는 여왕의 입장에서 보면 공짜로 얻은 좋은 방패인 셈이다.
현재의 바하누스 결사대는 썩어 있는 국교회의 내부 개혁과 자신들의 복귀를 요구하고 있었다.
에틸랑쥬는 그들을 섭외하는 카드로 당당하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여왕의 자리에 오르겠다’라고.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얼마든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 ‘카드’가 아니면 바하누스 결사대라는 세력이 움직일 리가 없으니까.
귀족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왕의 입장에선 반역죄를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하지만 바하누스 결사대는 그 이념이 종교적이라서 국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곤 해도 그들이 가진 무력만큼은 일국을 기우뚱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 그들이 누군가의 세력에 가담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제시한 두 정보로 인해 홀은 전례 없이 술렁였다.
일부는 바하누스 결사대를 가진 에틸랑쥬와 반드시 연을 이어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만약 장녀가 미스린토의 장로회처럼 숨겨진 힘을 얻고 바하누스 결사대까지 가지고 정계로 나선다면 나쁜 말로 ‘반역’이고 좋은 말로는 ‘혁명’이 가능하다.
그것도 성공 확률이 엄청나게 높은 혁명!
에틸랑쥬에 이어서 차녀 이실리엔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속으로 경악성을 내뱉고 있었다.
‘바하누스 결사대라고? 정교의 홍의집행단(紅衣執行團)도 어쩌지 못했던 녀석들이잖아!’
정교가 세력을 확장할 당시에 홍의집행단과 바하누스 결사대는 한 번 마주친 이후로 서로를 피했다. 그대로 싸우면 양패구상이 빤했기 때문이다.
사실 국교회가 저항 세력을 내쳤던 것도 홍의집행단의 힘을 두려워 한 탓이 컸다.
만약 양패해 버리면 그때는 정교를 견제할 카드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이실리엔은 긴장한 기색을 지우고 앞으로 나섰다.
귀족들의 지원도 생각해야 하는 마당에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었다. 어느 귀족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후보에게 연을 이어 주겠는가.
장녀 에틸랑쥬는 25세. 차녀 이실리엔이 23세.
비록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이실리엔은 열댓 먹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상대를 볼 때 외적인 것을 가장 먼저 판단하게 된다. 겉이 앳되어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감을 주기 힘든 마이너스 요소다.
이실리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스린토라는 이름을 등에 업었다고 해도 홀에 모인 자들이 ‘인간’인 이상, 그 인식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앞으로 나선 이실리엔은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이미 상당수가 에틸랑쥬 쪽에 마음을 둔 분위기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좀 뒤집어야겠네.’
이실리엔은 원래 밝히려 했던 세력을 접어 두고 다른 것을 선택했다.
여기서 밀리면 본격적으로 귀족들의 지원이 시작되는 일년전쟁 후반에 힘들어진다. 기선을 잡아야 그만큼 나중이 편하다.
결국 그녀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나왔다.
무리수를 두기로 한 것이다.
그로 인해 귀찮아지더라도 대책은 충분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지게 될 사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일년전쟁의 패배는 죽음이다.
할 수 있을 때 과감하게 내질러야 한다.
“이면의 4군단장. 헬 나이트가 저의 지원자입니다.”
덜컹! 쾅! 우당탕!
의자가 넘어지고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심지어 에크샤마저 미간을 좁히고는 놀란 얼굴로 이실리엔을 쳐다봤다.
스웰라드 대륙에 있는 다섯 국가가 아직도 그 동향을 주시하고 싸움에 대비하고 있는 ‘대륙의 이면’!
그리고 수만의 몬스터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다섯 명의 기사!
170년 전, 스웰라드 대륙에 있는 다섯 국가가 연합군을 세워서 이면의 세력과 정면으로 맞섰다.
결과는 승리했지만 피해가 막대했다.
이면의 세력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숨어 버렸지만, 스웰라드의 각국은 아직도 그들에 대한 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
이실리엔이 말한 4군단장은 스케반니아를 쳤던 ‘헬 나이트’를 칭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스웰라드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군사 수준이 향상되었다. 과거의 싸움은 단순 무력 대결이라, 지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나오지만 당시 군단장들이 보여주던 신위는 그야말로 일기당천이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 거의 멸종하다시피 했던 이면의 흉악한 몬스터들이 다시 세상에 등장한다면…….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미스린토 내에만 해당될 문제가 아니겠어.’
“당주…….”
누군가가 신음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이것은 국가 단위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일년전쟁의 주최자인 미스린토의 당주의 첫 번째 판단이 필요했다.
수수께끼에 싸여 있던 이면의 꼬리가 등장했다.
그 진위가 판단되면 스웰라드의 모든 나라가 다시 협정을 맺고 연합군을 재창설하는데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을 것이 분명했다.
에크샤가 이실리엔에게 물었다.
“진실인가?”
“당주님은 승자만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확실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그 힘은 일년전쟁에만 사용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국가의 존속을 위협할 숫자가 아닙니다.”
무리한 이야기다.
그들의 힘은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군단장인 헬 나이트와의 약조는 아직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아직 스웰라드 대륙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전력이 없었다.
과거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실리엔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보아 준 것은 이실리엔이 당주가 되면 그들이 지낼 수 있는 땅을 얻어 주고, 교류해 주겠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이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늘’이다.
하늘 아래 살 수 있는 것으로 족했다.
미스린토라면 그것을 이루어 주는 것이 가능하다. 왕실에 가득 뻗어 있는 ‘가지’가 있는 이상…….
헬 나이트는 좋은 조건이라며 긍정했지만 세간의 시선도 있으니 당장 모든 도움을 주진 못할 것이며, 다른 간부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대답을 들려줄 것이라며, 대대 하나를 내주었다.
즉, 당장에라도 소규모지만 이면의 몬스터를 부릴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숙련된 기사 여럿을 상대할 수 있는 그 이면의 힘은 미스린토의 전쟁에서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바하누스 결사대가 걸림돌이 되겠구나.’
그들은 이스리아 국교회의 교도들이다.
성물(聖物)과 이스리아 교단의 상징과도 같은 신성력은 어둠의 몬스터들과 상성에서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밝히지는 못했지만 헬 나이트의 약조가 이루어지면 사단 급의 전력을 얻는다. 그 위력은 바하누스 결사대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 바하누스 결사대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세상 어디서든 활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반대로 자신이 가진 이면의 세력은 ‘몬스터’다. 당연히 세간의 이목을 신경 써야 했다.
게다가 무대가 무대이니만큼 국지전이 되어야 했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최악의 상황에는 타국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