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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4화)
1. 미스린토의 네 자매(4)
무려 2세기 가까이 스웰라드의 다섯 국가가 혈안이 되어 찾으려 하는 이면의 세력.
그 꼬리를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유일하니까.
한편, 체셔는 미스린토의 여식들이 내보이는 카드에 식은땀이 흘렀다.
주군인 유시엘은 어떤 카드를 내밀지 걱정과 기대가 반반이었다.
차녀 이실리엔이 들어가고 삼녀인 이스티아가 나섰다. 그녀는 언니들이 뭐라고 하든지 관심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이실리엔을 지나치며 씩 웃어 보였다.
이실리엔은 이스티아의 이유 모를 웃음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쟨 뭐가 좋아서 웃고 난리야?’
이스티아는 19살이라는 나이에 순진하고 청초해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체는 흑마술계를 주름잡고 있는 사교(邪敎)의 스케반니아 지부장이다.
10살 때 흑마술에 손을 댔고, 12살에 집을 나가서 사교에 몸담았다.
그 후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일년전쟁이 선포되자 본가로 돌아왔다.
사교는 전 세계 어디든 존재하고 있다.
그 정보력과 단결력은 어느 단체나 세력에 비할 것이 아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흑마술과 주술로, 저주와 암살은 물론, 신성모독의 의식으로 악마를 부린다는 사실이다.
사교도는 세상 구석구석 깊숙하게 녹아 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사실은 사교도고, 언제 명령을 받고 자신의 몸을 필요로 해서 등을 노릴지도 모른다.
이스티아는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입을 열었다.
“스케반니아의 36만 사교도가 저의 힘입니다.”
숨길 것도 없다.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다.
다만 그 정확한 숫자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홀에 모인 군중들은 36만이라는 숫자를 듣는 순간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스케반니아 여왕국의 인구는 약 1,200만이다. 그런데 그중에 36만 명이 사교도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약 35명당 한 명은 사교도라는 소리다.
“사교도는 당신의 가족, 형제,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티아는 자신이 덧붙인 말에 얼어붙어 버린 장내의 공기를 뒤로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드디어 유시엘의 차례가 되었다. 체셔도 굳은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남성의 음욕을 자극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유시엘을 안을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을 내도 좋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유시엘은 에틸랑쥬와 달리, 남성들로부터 기분 나쁠 정도로 음욕이 어린 시선을 받았다.
반대로 얼굴값 좀 한다는 장녀와 차녀는 질투심이 어린 눈으로 유시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성격도 개차반인 주제에……. 저 악마 같은 년!’
그럼에도 유시엘은 당연하다는 듯 그 독사처럼 표독스러운 시선을 즐겼다. 심지어 그녀의 입꼬리는 비릿한 조소가 이슬처럼 맺히면서 비틀어지고 있었다.
“훗!”
시선도 속이지 않는다.
자신을 노려보는 두 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보란 듯이 어깨로 군중을 가리킨다. 너희들보다 내가 더 잘났다는 노골적인 제스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체셔는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들 중에 누구라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연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대놓고 적을 만들고 있는 유시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늦기에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선포식에 ‘검’이 도착하지 않았다면 유시엘은 비참하게 굴욕을 맛봤을 것이다.
장로회 때문에 일을 크게 꾸미지 못했던 것이 무엇보다 아쉬웠다.
적어도 지각이라도 했으면 유시엘의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멍청한 용병들은 마차는 고사하고 말도 못 죽인 듯했다.
이실리엔의 눈빛은 초여름에 독이 잔뜩 오른 독사 같았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유시엘은 이미 조각조각 찢겨져서 개 먹이로 던져졌을 거다.
하지만 그런 반응이 과한 것도 아니다.
미스린토 내에선 분쟁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고, 유시엘은 그것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부터 언니들을 물심양면 괴롭혀 왔다.
어렸을 때 집을 나갔던 이스티아를 제외하곤 말이다.
유시엘이 군중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모두를 내려다봤다.
저 오만한 얼굴이 치욕으로 구겨지는 것을 보고 싶다.
쾌락에 몸부림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사내들은 눈에 추잡한 욕망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럼에도 유시엘은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왈케르나 번드가 내 것이다.”
왈케르나 번드!
압실란 공작령 동쪽 끝에 있는 무혈평화의 성역(聖域)이다.
신의 이름하에 어떠한 분쟁이나 다툼을 금하고, 이를 어길 경우 국교회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아니, 말이 처벌이다. 신의 뜻에 반한 이단 행위라 칭하며 화형시킨다.
왈케르나 번드에는 국교회의 스케반니아 본단과 순교자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성전(聖殿)이 있다.
그리고 압실란 공작령에 종속되어 있지만 왕실의 직접적인 보호를 받는 곳이다.
심지어 경비도 모두 군에서 담당한다.
“아가씨께선 어떻게 그곳을 소유할 수 있었소?”
“누구지?”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도 말을 낮추는 유시엘의 태도는 일부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불쾌함을 표출할 수는 없었다.
만약 표출하는 자가 있다면 다들 그자를 위해 묵념 정도는 해 줄 것이다.
흰머리가 비치는 중년인이 기품 있게 목례를 했다.
“압실란 공작령 호르윈드의 영주, 데나본 백작이오.”
유시엘은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살짝 감았다.
그 고혹적인 제스처에 사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 새어 나왔다.
“그래, 비밀로 할 것도 없지. 일년전쟁 동안 빌렸다.”
모두의 입이 딱 벌어졌다. 왈케르나 번드가 어디 빌려 줄 수 있는 곳이었던가?
“일 년간 빌리는 대신, 나는 왕실에 뻗어 있는 미스린토의 ‘가지’를 잘라 주기로 했다.”
에크샤의 한쪽 아미가 꿈틀거렸다.
다른 자매들도 마찬가지로 동요했는데, 특히 이실리엔의 얼굴이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유시엘이 말하는 ‘가지’는 선조들이 목숨을 받쳐 가며 뻗쳐 놓은 것이다. 미스린토가 왕실이 인정하는 독립된 가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덕분에 귀족들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왕실이 미스린토에 잡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여왕이 설설 기던 이유가 이거였군!’
각자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으며 술렁이기 시작하자, 에크샤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공포의 끝’이라 불리는 미스린토 당주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지만 유시엘은 도리어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왜 그러지? 그런 ‘가지’가 좀 잘린다고 미스린토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그게 아니라면, 그런 것에 의지하지 않으면 가문을 존속시키는 것조차 자신 없는 건가?”
체셔는 이미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유시엘은 말 몇 마디로 장내를 혼돈에 빠뜨렸다. 심지어 그 혼돈을 즐기듯 서늘한 미소마저 머금고 있다.
“유시엘!”
에크샤가 노한 얼굴로 유시엘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가 무슨 권한으로 그 ‘가지’를 자르겠다는 게냐!”
유시엘은 자조하듯 피식 웃더니 갑자기 군중을 돌아보면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훗! 거짓말인 게 당연하지.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살짝 뒤흔들어 봤다. 난 언니들 같은 세력이 없다는 것은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 나의 가증스런 어머니여!”
“…….”
에크샤는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고개를 숙이는 에크샤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녀의 눈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장난치라고 있는 자리가 아니다, 유시엘!”
“내겐 진지하라고 있는 자리가 아니지, 당주. 현실적으로 내가 이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나? 조금이라도 찔린다면 막내딸을 빈말으로나마 응원해야 하는 것이 사람 된 도리지. 아니, 사람이라 하기도 힘들군. 이 더러운 족속은……. 솔직히 말해서 내 몸에 당신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혐오스럽다.”
자매들은 어려서부터 일년전쟁에 대해서 숙지하고 힘을 키워 왔다.
특히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은 가문을 먼저 장악하고 다른 자매를 견제했다.
이스티아가 집을 나간 것도 그것 때문이다.
이대로 가문에 처박혀 있으면 언니들의 견제로 세력도 가지지 못하고 개죽음을 기다리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교’라는 그릇된 길을 택해야 했다.
유시엘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거절’이었다.
두 언니들이 손을 써 놓은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스티아가 도망치자 그 이후부터 감시당했다.
결국 유시엘은 살아남기 위해 사고(思考)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구상하고, 또 구상한다.
수없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복수하듯 가문의 ‘룰’을 이용해서 언니들을 괴롭혔다.
에틸랑쥬와 이실리엔, 그리고 이스티아와 유시엘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유는 당주의 재혼 때문이었다. 즉, 그녀들은 이부 자매였다.
에크샤와 유시엘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은 허탈함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유시엘에게 쏟아지던 경외와 욕망의 시선이 경멸로 바뀌었다.
유시엘은 그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왈케르나 번드에는 나의 저택이 있다. 국교회가 유실했던 유물을 기증함으로 얻은 소중한 땅이지. 내가 묻힐 곳이기도 하고…….”
그때 뒤에 앉아 있던 이실리엔이 소리쳤다.
“유시엘! 그 말은 왈케르나 번드에 머물며 싸우지 않겠다는 건가?”
유시엘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실리엔, 하나 경고하지. 난 6개월 동안 왈케르나 번드에 숨어 있을 거다. 당주가 되고 싶다면 어떠한 수를 써서든지 날 거기서 끄집어내야 할 거야. 만약 6개월이 지난다면 당주는 내가 된다.”
이실리엔은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는 듯 벌떡 일어서서 유시엘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게 나의 ‘한 수’다.”
유시엘은 할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붉은색 드레스가 아름답게 춤추었고, 찬란한 금빛의 머리카락이 아찔한 향기를 풍기며 흩날렸다.
그리고 등이 파인 드레스 탓에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의 매혹적인 뒤태에 사내들은 헛기침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고 말았다.
체셔도 홀린 듯 멍청하게 서 있다가 한 걸음 늦게 제자리로 돌아와 유시엘의 곁에 섰다.
이제 미스린토 여식들의 세력 소개가 끝났다. 분위기는 첫째부터 셋째까지 그야말로 막상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