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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5화)
1. 미스린토의 네 자매(5)


바하누스 결사대.
대륙의 이면. 4군단장 헬 나이트.
36만의 사교도.
이름만 보면 차녀인 이실리엔이 가장 위협적이다.
하지만 그 위험부담이 크다.
스웰라드 모든 나라의 공적이 될 수 있다.
이 자리가 끝나면 그 사실은 각지로 퍼져 나갈 것인데, 시작부터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이스티아의 36만 사교도다.
무려 36만이다!
이곳의 몇몇은 이미 사교도라 해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즉, 어떠한 변수가 발생할지 모른다.
처음으로 충격을 줬던 바하누스 결사대는 다른 둘에 비하면 정공(正攻)이라고 할 만했다.
비록 왕실의 위험이 있겠지만 유시엘에 의해 드러나게 된 미스린토의 가지가 있으니 그것도 문제없다.
이실리엔은 타국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고, 이스티아는 정교와 국교회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그런 둘과 달리 에틸랑쥬는 방해 받을 것이 없다.
마치 짜 맞추기로 한 것 같은 균형이지 않은가!
물론, 막내 유시엘을 제외하곤 말이다.
에크샤는 다시 단상의 가운데로 나서서 홀에 모인 사람들을 훑어봤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소란이 멎었다.
“일년전쟁의 시작은 명일 여명부터입니다.”
압실란 공작령까지는 약 삼 일 거리다.
자매들은 본거지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가 붙는다.
하지만 유시엘은 체셔라는 ‘검’밖에 없다. 체셔도 그 사실을 깨닫고 유시엘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자매들의 눈을 피해서 왈케르나 번드까지 들어갈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다. 6개월이라는 기간을 예고하고, 한 수가 있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눈엣가시는 미리 제거해 두는 편이 낫다.
당연히 언니들은 쌍심지를 켜고 유시엘을 죽이려 들 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일년전쟁이다.
일 년 후에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아서 당주가 된다. 모두 죽이고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이다.
불안요소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이상으로 일년전쟁 선포식을 끝내겠습니다. 오후에는 야외에서 파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실리엔의 일은 잠시 보류하겠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떠들고 다니실 분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만.”
설명할 것도 없이 입을 열면 목이 달아난다는 말이다.
홀에 모인 사람들이 도망치듯 흩어졌다. 단상 위에 있던 자매들도 몸을 일으켰다.
“어머! 막내야, 바로 안 도망치는 거니? 삼 일이래! 삼 일!”
이실리엔이 대놓고 비꼬았지만 유시엘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한 태도로 대답했다.
“저녁은 먹고 가야지.”
“뭐어?”
이건 또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잠시 말문이 막혔던 이실리엔은 이내 교소를 터트렸다.
“내일 해가 뜨는 순간 넌 죽은 목숨이다! 지금까지 그 악마 같은 행실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유시엘은 질렸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꽥꽥대라 오리 같은 계집. 아니면 일년전쟁 기념으로 또 밟혀 보고 싶은 건가?”
이실리엔은 주먹을 쥐며 이를 갈았다.
“크으으으윽!”
체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실리엔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기는 유시엘을 따랐다.
“아가씨…….”
유시엘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체셔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따라오자 귀찮은 듯 몸을 돌렸다.
“어디까지 따라올 셈이지? 가서 쉬고 있어.”
“하지만…….”
“내일까진 걱정할 것 없다! 심란하면 늘 하던 대로 나가서 검이라도 휘두르든가 해라.”
“…….”
유시엘은 그 말만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체셔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중얼거렸다.
“늘 하던 대로……?”

야외 파티가 시작됐다. 쉬고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저택의 정원으로 나와서 자리를 채웠다.
초여름의 기운이 느껴지는 장미의 정원에서 열리는 호화로운 파티는, 와인의 향기와 큰돈으로 초빙한 이름 있는 집시 여인들의 아름다운 가무가 어우러지며 분위기를 절정으로 몰아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완 반대로 음식도 입에 대지도 못하고 있는 체셔는 다른 ‘검’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다른 ‘검’들은 주군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지만, 그것이 딱히 영광이라 생각하지 않는 체셔는 그 주군마저도 어디 갔는지 만나질 못하고 있었으니까.
미스린토에는 14개의 봉신가가 있다.
봉신가의 자제가 본가 자녀들의 ‘검’이 되는 것은 큰 영광이다.
지난 일년전쟁의 승자였던 에크샤의 ‘검’인 윌런 린바르트는 지금 ‘가지’가 되어 스케반니아 군부를 틀어쥐고 있다.
클라인 가문은 처음 ‘검’으로 선택됐다.
체셔의 아버지 알킨 클라인은 페라넨 공작이 스케반니아 남쪽 카릴해(海)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만든 무장선원(武裝船員)을 지휘하던 장교였다.
하지만 큰 성과를 올리고 해적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자, 그는 하일람 백작의 영지에 있는 민병대의 검술 교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알려진 검 실력도 그럭저럭.
봉신가의 순위에서 클라인가를 맨 끝자락에 머물게 한 장본인이었다.
“여유롭군?”
들고 있던 컵의 물도 미지근해졌다고 느낄 즈음, 에틸랑쥬의 ‘검’ 오라크 베스틴이 나타났다.
그는 수심이 가득한 체셔를 내려다봤다.
상계에 기반을 둔 부자 가문답게 걸치고 있는 것 무엇 하나 안 비싸 보이는 게 없었다.
“얼빠진 주군이라 실망이 크겠어.”
오라크가 코앞에서 빈정거리며 주군의 욕을 한다.
‘검’으로서 당연히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화도 안 났다.
9살 때 머리를 밟혔던 기억부터 시작해서 여기 와서 다시 보게 된 유시엘은 무엇 하나 유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체셔는 ‘검’으로 자랐다.
이럴 때는 화를 내주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웃!”
체셔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순간, 오라크는 저도 모르게 검을 뽑을 뻔하고는 안색을 바꾸었다.
‘……이, 이런 바보 같은?!’
기세에서 밀렸다!
침울하게 앉아 있기에 별것 아닌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이 사내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이, 이름이 뭐냐?”
“‘체셔 클라인’입니다만.”
“흥! 알킨 클라인의 아들인가…….”
그 순간 체셔의 손이 뱀처럼 움직였다.
딱히 주군에 대한 애정이나 경외심이 없어서 유시엘을 욕한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새파란 녀석이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불쾌했다.
오라크는 갑자기 체셔가 자신의 망토 사이로 손을 넣어 가슴과 목, 그리고 겨드랑이 쪽의 몇 군데를 손끝으로 연달아 찌르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고 있었기 때문이다.
“흡!”
하지만 오라크도 봉신가의 ‘검’이다.
체셔가 혈을 쳤다는 것을 깨달은 오라크는 혈이 점령하기 전에 내기를 끌어올려 치고 들어오는 체셔의 기를 맞받아 냈다.
하지만 강하다! 쉽게 쳐 낼 수는 없었다.
“…….”
투두둑! 툭!
오라크의 몸에서 연이어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체셔는 놀라고 있었다.
점혈을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라크가 그것을 어렵지 않게 걷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같은 봉신가라 이건가.’
딱히 공격할 생각은 없어서 경고만 할 생각이었지만, 오라크는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 기세다.
그리고 체셔 역시도 이제 와서 그만두자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오라크는 비웃듯 체셔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와는 조금 진지한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군. 재미있는 재주를 익혔다만 내겐 소용없다.”
체셔도 표정을 지웠다.
지금은 야외 파티 중이다. 이런 곳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오라크도 비슷한 결론을 내린 듯, 체셔를 지나치며 말을 흘렸다.
“후원으로 와라.”
오라크가 먼저 몸을 돌렸다.
체셔는 그 자리에 남아 짧은 한숨을 쉬면서 저택의 3층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가 커튼을 치고 있었다.
‘……가도 소용없겠지만.’
체셔도 근처를 지나는 시종에게 식어 버린 물 컵을 건네고는 오라크가 있을 후원으로 향했다.
미스린토의 후원 또한 붉은빛으로 가득했다.
야트막한 언덕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미의 미로를 마주하자 현기증이 날 만큼 달콤한 향기가 풍겨 왔다.
이런 곳에서는 시체만 치워 놓으면 피가 튀어도 모를 거다.
“짧게 끝내죠. 서로에게 좋을 것은 없을 테니.”
기다리고 있던 오라크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서서히 다가오던 체셔가 갑자기 웃음을 지우는 순간, 그는 호흡조차 용납하지 않는 태산 같은 압박감에 팔을 시작으로 어깨를 타고 등까지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허헉!”
오라크는 날숨을 토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단걸음에 코앞까지 다가온 체셔의 주먹이 명치에 틀어박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으으으……!”
체셔는 자신의 옷을 붙잡고 꼬꾸라지는 오라크를 밀어내고는 몸을 돌렸다.
장미의 미로 저편에서는 또 다른 노인이 그림자 속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딜 가든 보고 있겠지…….’
일년전쟁 시작 전, 모든 자매들과 ‘검’은 장로회의 보호를 받는다.
이런 사사로운 감정 싸움은 예외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오라크나 체셔가 칼을 뽑아 들었거나 싸움이 길어졌다면 제재가 들어왔을 것이었다.
그래서 체셔는 오라크가 손 쓸 시간도 주지 않고 전력으로 기선제압을 한 것이다.
“기, 기다…… 려!”
오라크는 돌아서는 체셔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하지만 체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저를 붙잡고 싶다면 두 발로 서서 말씀하시길.”

파티가 한창일 때 유시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늘 데리고 다니는 시종 소년만 곁에 두고 묵묵히 요리를 즐겼다.
‘설마 여태 주무셨던 건가?’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는 체셔는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 ‘검’이 쓸데없이 말을 걸 필요는 없었다.
그저 주군인 유시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 존재였다.
그런데 유시엘은 주군이라는 이유는 둘째고, 보고 있기도 위태로웠다.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무언가가 하나도 없었다.
내일 동이 트는 순간 유시엘은 세 자매로부터 공격받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좋지…….’
체셔의 근심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에틸랑쥬는 그녀와 연을 이으려는 귀족들 사이에서 화기애애하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오라크, 얘는 어디 갔데?’
사람들이 ‘검’을 소개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찾아도 보이질 않으니 입장이 난처해졌다. ‘검’이 멋대로 주군의 곁을 떠나다니 언어도단이다.
‘나중에 따끔하게 한 소리 해야겠군.’
개인이 가지는 세력과는 별개로, ‘검’은 진정으로 믿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늘 자신의 곁을 지켜 주는 수호자이자, 의지를 내보일 수 있는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