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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6화)
1. 미스린토의 네 자매(6)


미스린토의 봉신가는 강하다.
자매들이 여러 세력을 가지면서도 봉신가의 자제에게 ‘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곁에 두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정작 ‘검’은 가문에 갇혀 살아서 자각을 못하고 있지만 그들의 힘은 오랜 세월 미스린토의 영광을 위해 갈고닦아지며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뛰어나다는 기사들도 ‘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검’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열 명 이상의 기사들이 대형을 이루고, 체계적으로 상대해야 겨우 해 볼만 하다.
봉신가의 무술은 과거의 동쪽 나라 사람들이 익히던 신비로운 무술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그들이 멸망을 맞은 이후로는 무술의 계보가 대부분 끊기고 말았지만, 미스린토는 수백 년 전부터 그들과의 교류로 많은 것들을 얻어 왔다.
미스린토의 숨은 전력.
그것에는 장로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실리엔은 의외로 귀족들과 연을 잇지 못했다.
상황을 보는 것일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부담 때문일까?
대다수가 이실리엔과의 관계를 꺼리는 눈치였다.
다른 귀족들과의 연을 위해 숨기던 카드를 공개했는데, 그것이 도리어 발목을 붙잡게 된 것이, 참 싫은 상황이다.
‘그래도 미리 연을 이은 사람들도 충분히 많으니까. 걱정 없어.’
마음 같아서는 수만의 몬스터를 꺼내서 싹 쓸어버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타국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한다.
어차피 알려질 것이었고, 알려진다고 해도 그에 대한 대비책은 있었지만, 전쟁이 시작되도 대규모로 몬스터를 부릴 수는 없다.
‘가지’를 이용해 여왕을 섭외한다고 하더라도 타국의 시선을 완벽하게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왕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이면을 옹호하는 순간 공적이 된다.
여왕이 허수아비라고 해도 힘든 것은 힘든 거다.
그리고 이실리엔에게는 이면의 세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에틸랑쥬도 바하누스 결사대의 존재를 알렸지만 실질적으로 활동할 것은 다른 세력이다.
이면의 세력도 그렇고, 바하누스 결사대도 ‘보험’이다. 결코 주 전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 ‘형체가 없는 단체’인 이스티아의 사교도다. 자신의 세력에도 사교도는 반드시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보전부터 밀릴 수밖에 없다.
‘믿을 것은 ‘검’뿐이겠지.’
이실리엔은 곁을 지키고 있는 ‘검’, 리온을 바라봤다. 훤칠한 키에 강인한 이목구비와 사내다운 선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외모다.
게다가 봉신가 중에 가장 강하다고 평가되는 아스발란 가문의 장남.
14살 때 이미 숙련된 기사 둘을 압도했다고 한다.
8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질 정도였다.
‘남첩(男妾)으로 써도 괜찮겠지?’
리온을 바라보는 이실리엔의 눈에 음욕이 어렸다.

이스티아는 그 누구와도 연을 가지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이스티아와 연을 가지는 것은 ‘나는 사교도가 되겠소.’라는 말이었고,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사실 사교도였소.’라는 것과 같다.
이스티아도 그것을 알기에 파티의 분위기만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밝은 성격과 천진난만한 웃음은 사교도라는 것을 둘째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고 있었다.
다른 예는 그녀의 ‘검’이다. 이스티아의 ‘검’ 벨린의 테네반 가문은 사교 소속임을 공개적으로 알렸다.
그들이 미스린토의 봉신가인 이상, 누구도 해코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벨린의 몸은 어렸을 적부터 사교의 불경스러운 의식으로 상리를 벗어나는 어둠의 힘을 축적해 왔다.
그래서 테네반 가문에서는 장자가 오지 않고 이스티아보다 어린 소년이 오게 됐다.
네 명의 ‘검’ 중에서는 벨린이 가장 어렸다. 이스티아는 19살이고, 벨린은 막내 유시엘과 같은 17살이다. 다른 ‘검’들이 모두 약관을 넘겼으니 큰 차이였다.
하지만 이스티아는 어떠한 위험이 닥쳐도 벨린이 곁에 있다면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해도 저물고 야외 파티가 끝났다. 저택의 귀빈 숙소는 내일 출발해야 하는 타지의 귀족들로 가득 찼다. 반대로 거리가 가까운 자들은 속속들이 도착하는 마차에 올라타서 미스린토 저택을 떠났다.
‘정말 긴장감 없는 아가씨네.’
오후의 야외 파티에 잠깐 등장해서 음식을 먹고 다시 낮잠을 자러 갔다가 저녁 식사에도 참석한 유시엘을 보며 체셔는 혀를 내둘렀다.
놀라고 있는 것은 다른 자매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시엘이 대체 뭘 믿고 저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이스티아가 도망친 후로 한시도 놓치지 않고 유시엘을 주시해 왔지만 그녀는 어떠한 세력도 만들지 못했다. 결코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안하단 말이지.’
에틸랑쥬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벌레처럼 꺼림칙한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자신보다 예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둘째치고 그것으로 언니들을 깔보는 것. 그리고 대놓고 속을 긁어 놓는 태도를 참을 수 없어서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전에는 버릇없다고 귀싸대기를 갈겨도 그게 두 배, 세 배로 돌아오니 어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쪼그만 계집애가 손은 또 왜 그렇게 매운지…….
게다가 맞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밟는다.
뻥! 뻥! 차는 것도 아니다.
질근질근 정성을 다해서 님 가시는 길인 듯, 한 발 한 발 사뿐사뿐 밟는다.
이실리엔과 유시엘의 사이가 특히 나빴다.
가문 내에서 둘은 정말 철천지원수다.
개랑 원숭이를 한 우리에 넣어 놔도 그것보단 사이가 좋을 거다.
그래서 둘은 일년전쟁이 선포되는 순간, 유시엘의 저 오만하고 시건방진 얼굴이 비굴하게 변할 거라는 기대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같이 태평스럽기 짝이 없다.
만약 자신이 유시엘의 입장이라면 낮잠은커녕, 숨도 제대로 못 쉴 것 같은데도 말이다.
“체셔, 넌 낮에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 같더군. 이리 앉도록 해라.”
네 자매는 모두 테이블에 앉아 있고 ‘검’들은 각 자매의 뒤에 서 있었다.
하지만 유시엘은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손수 옆자리에 있는 의자까지 빼 주며 체셔에게 합석을 지시했다.
“하지만…….”
“앉아.”
정작 황당한 것은 체셔가 아니다.
언니들이었다.
유시엘의 저 배려로 인해서 괜히 자신들만 ‘검’을 뒤에 세워 두고 식사를 하는 나쁜 년이 되고 말았다.
“흠흠!”
“가, 같이 먹을까?”
그 탓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은 황급히 자리를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전례 없이 주군과 ‘검’이 사이좋게 앉아서 저녁을 먹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이건 어떻게 된 상황이지?’
내일이면 가문을 떠날 딸들에게 인사라도 하려고 얼굴을 비춘 에크샤는 그 광경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렇게 평화로워 보였지만, 최후의 만찬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저녁 식사가 끝나자, 유시엘은 느긋하게 홍차와 에끌레르까지 챙겨 먹고는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적당한 어둠이다. 떠날 채비를 해라.”
비슷하게 식사를 마친 체셔도 그녀를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유시엘은 승마를 익히고 있었다.
체셔 또한 어려서부터 말을 타 왔기에 훈련받은 기병만큼 말을 잘 다뤘다.
체셔는 혼자서도 높직한 말안장에 잘 올라타는 유시엘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봤다.
“아가씨, 정말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넌 뭐지?”
체셔는 유시엘이 곧바로 되받아치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저는 아가씨의 ‘검’입니다.”
“검의 의무는?”
“주군을 지키고, 주군의 의지를 행합니다.”
“그럼 됐다! 가자.”
유시엘이 고삐를 당겼다. 말이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앞발을 치켜들었다.
체셔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에 올라탔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시엘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토를 달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럇!”
마지막으로 챙겨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리면서 최종 점검을 하는 사이, 유시엘은 벌써 발의 배를 박차고는 미스린토의 정원을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불가능하진 않겠지…….”
체셔도 그 뒤를 따라 정원을 달려 나갔다.

남은 자매들은 각자의 방에서 명령을 하달하고 있었다.
에틸랑쥬는 어디로 들어왔는지 말쑥하게 차려입은 웃는 얼굴의 사내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예정대로 생포해서 앞으로 끌고 와. 장로들이 보고 있을 테니 동이 틀 때까진 허튼짓 말고.”
“그러죠, 아가씨.”
이실리엔도 마찬가지였지만, 홀로 방에 남아 생각에 빠져 있는 이스티아는 달랐다.
막상 일년전쟁을 시작하려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애틋한 정이 마음을 붙잡았다.
‘……역시 동병상련인가.’
언니들의 마수에 무엇 하나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억눌렸던 과거.
자신은 사교로 도망쳐 힘을 키웠지만 유시엘은 어리석은 것인지 그런 것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당하다.
믿는 것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언니들의 눈을 피해 구축한 무언가가 말이다.
‘어차피 일년전쟁의 승자는 둘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언니들에게 죽게 둘 수도 없어. 내가 구해 줘야…….’
결심을 굳힌 이스티아가 창문을 열었다.
파라락!
그녀의 손에서 한 줄기의 바람과 함께 의지를 담은 글귀가 적힌 양피지 한 장이 새처럼 날아올랐다.

자정 무렵, 유시엘이 말을 멈추었다.
명마들인지 쉬지 않고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이 거의 없었다.
유시엘은 말에서 내리더니 허공에 손을 내려치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체셔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속에서는 ‘뭐하는 짓입니까?’라는 말이 맴돌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예의 바른 소리다.
‘잘 안 되네.’
오기가 생긴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유시엘의 섬섬옥수가 재차 허공을 내려쳤다.
그 순간 체셔는 주변을 무언가가 덮어 버렸다는 것을 느끼며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미미하게 불던 바람이, 공기의 흐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이상한 공간 속에서 유시엘이 입을 열었다.
“체셔, 넌 미스린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표면적인 것만 알고 있습니다.”
유시엘은 허공에 의자라도 있는 것처럼 무언가에 걸터앉더니 버릇처럼 한쪽 다리를 꼬았다.
“…….”
체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설마 마법인가요?”
유시엘은 체셔의 의문을 한쪽 귀로 흘려 버렸다.
“미스린토는 원래 흡혈귀와 몽마의 피가 섞인 혈통이다. 하지만 인간과도 관계를 가지며, 그 피가 흐려져서 300년 전부터는 그 특징이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되었지.”
체셔는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입을 벙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