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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7화)
1. 미스린토의 네 자매(7)


“뱀파이어라고 불리는 자들인가요?”
뱀파이어도 흡혈귀다.
흡혈귀라서 뱀파이어라고는 하지만, 흡혈을 일삼는 것들을 통틀어 흡혈귀라고 칭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주군은 앉아 있고 자신은 서 있다. ‘검’이 된 자로서 주군을 내려다볼 수는 없는 법이다.
체셔는 그녀의 앞에 무릎앉아 자세로 예의를 갖췄다.
“그래, 원래는 뱀파이어다. 하나, 말했듯 어떤 몽마와 관계를 가지면서 맥이 갈려 버린 통칭 ‘악마’다.”
“그럼 혹시 가문 사람들의 붉은 눈도…….”
“가전(家傳)의 특징. 흡혈의 욕구나 빛도, 성물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지만 그것만은 사라지지 않더군.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만 악마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되니 유명무실이 되고 말았다. 정말 아무 의미도 없어졌지. 우리가 인간 사회에 녹아든 것도 그런 기능이 대부분 사라진 300년 전부터다. 체셔, 무엇 때문에 미스린토의 장로회가 수수께끼 속에 있는지 짐작이 가나?”
“아직 모르겠습니다.”
“미스린토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 죽었다거나, 당주의 자리에서 내려왔다면, 그것은 장로회에 들어간다는 말이지. 재미있는 이야기로, 내 또래로 보이는 장로도 있다. 악마에게 외관은 의미가 없지.”
“그런……!”
체셔는 9살 때 유시엘과 함께 찾아왔던 에크샤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록 어렸을 때였지만 워낙 강렬한 인상이어서 11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보게 된 그녀는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가씨께선 왜 그런 사실을 제게 밝히는 겁니까?”
“일 년 동안 싫어도 함께해야 할 것인데, 알 것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
유시엘이 기울이고 있던 머리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다.
그녀의 내려다보는 눈빛이 체셔의 머리에 닿았다. 그 순간 체셔의 기억은 과거로 던져졌다.
‘그때 나흘 정도 계셨던가? 가끔 마주치면 늘 저런 눈으로 쳐다보곤 하셨지…….’
인생 참 얄궂다.
‘검’으로서 목숨을 바쳐야 할 상대가 그 무서운 꼬마였다니…….
사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검’이라는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 사내로 태어나서 한 여성을 위해 사는 것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검’이 자신을 이루는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넌 내가 왜 선포식에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예.”
유시엘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체셔의 턱을 발끝으로 들어 올려서 시선을 붙잡았다.
자세가 아주 익숙하다.
자신보다 낮은 사람을 많이 놀려 본 솜씨다.
“봐라.”
유시엘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윗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뾰족하게 자란 송곳니가 드러나 있었다.
“특징이 사라졌다고…….”
“무슨 이유인지 나의 피는 뱀파이어의 특징을 지니고 있더군. 내가 그것을 깨달은 것이 9살 때였다.”
유시엘은 발끝으로 장난이라도 치듯 체셔의 얼굴을 이리저리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일년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유시엘의 얼굴에 기이한 희열이 어렸다.
그럼에도 체셔는 유시엘의 끊임없는 발장난을 거부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안 들켰습니까?”
“감출 수 있는데 누구에게 들키겠어?”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이런 상태로 왈케르나 번드에 도착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체셔, 네가 있는 거야.”
유시엘의 발은 마치 애무하듯 체셔의 목을 타고 가슴께를 쓸어 내려갔다. 하지만 체셔는 입을 꾹 다문 채 그 발길을 조금도 거부하지 않았다.
‘재미없어…….’
유시엘은 체셔의 아랫배까지 발을 가져가다 멈추고는 흥미를 잃은 듯 발을 거두었다.
“곧 있으면 두 명이 날 노리고 접근할 것이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습니다만.”
“난 에틸랑쥬의 직속 기사와 이실리엔이 가진 암종의 ‘목’을 물었다.”
“……그 말씀은!”
유시엘의 눈에 살광이 스쳤다.
“반칙을 가장해 일시적으로 그 둘의 발을 묶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우릴 따르고 있는 장로회가 해결해 줄 것이지. 물론 그때는 그들이 뱀파이어에게 물렸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관계없다. 난 이미 왈케르나 번드에 들어갔을 테니까.”
유시엘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새하얀 손가락이 체셔의 얼굴을 쓸듯 들어 올렸다. 체셔는 그 손의 끌림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동안 집을 나가 있던 이스티아는 예외다. 도착할 때까지 그녀로부터 네가 날 지켜야 한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유시엘의 눈동자에는 체셔를 향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체셔는 유시엘의 이러한 행동에 양면성을 느끼면서도 주군이 신뢰를 표하는 이상, 그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했다.
“그 믿음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

라이바란 가문도 테네반 가문처럼 사교도 집안이다. 이번 일년전쟁에는 테네반 가문이 미스린토의 삼녀인 이스티아의 ‘검’이 되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사교도는 모두 하나다. 그리고 평등하다.
열신마왕(裂神魔王) 스웨르크의 이름 아래 모인 자들은 하나의 생명으로 결코 차별받지 않는다.
이번 일년전쟁의 승리자는 열신마왕의 대리인 이스티아 님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사교도 봉신가가 ‘검’이 아닌데도 나섰다. 라이바란 가문의 제오스는 이스티아의 전서를 받고는 유시엘이 저택을 떠나는 순간부터 미행을 하고 있었다.
“승마술이 상당한 실력이군.”
유시엘이 승마에 취미가 있다는 것은 조사한 정보로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17살 계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는 유시엘의 승마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유시엘과 체셔는 미스린토 본가가 있는 남쪽 페라넨 공작령의 웰건에서 쉬지 않고 말을 몰았다.
제오스는 달리기만으로 두 사람의 뒤를 쫓아왔다.
봉신가의 무술을 익힌 자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자정 무렵, 갑자기 유시엘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들어 내려치는 행동을 시작했다.
“헉?”
제오스는 헛바람을 삼켰다.
갑자기 그들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사교의 마법도 저런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공간을 뛰어넘지 않는 이상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고 기감에 반드시 걸린다.
‘아, 아니군. 어디서 저런 마법을 배운 거지?’
제오스는 달빛으로 인해 흐릿한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무형의 막’에 의해서 외부와 단절된 공간 속에 있는 것이었다.
제오스는 청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봤지만 거리도 거리고, 내부에서 오가고 있을 대화는 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까이 가기엔 ‘검’의 기감 때문에 위험했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두 사람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쉬는 건가?’
한시가 급한 상황일 텐데, 이해할 수 없었다.
유시엘은 나무에 기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체셔는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제오스는 그들과 제법 떨어진 곳에서 기척을 죽인 채로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체셔도 유시엘로부터 열 걸음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기에 들킬 리는 없었다.
제오스가 상황을 주시하고 반 시간 정도 흘렀을 때였다. 체셔가 갑자기 몸을 틀어서 유시엘에게 달려갔다.
유시엘도 무언가를 느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저들이 대체 왜 이곳에?!’
체셔와 유시엘을 노리는 행색으로 접근한 두 사내는 장녀 에틸랑쥬의 직속 호위기사 에덴발트와, 이실리엔의 암종인 견습 정원사 롬벨트였다.
유시엘은 적의를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짓이지?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유시엘에게 이지를 제압당한 그들은 명령받은 행동만 할 뿐이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다. 주군을 위해 죽어다오.”
에덴발트는 분리된 채 등에 걸려 있던 창대를 하나로 합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롬벨트도 마찬가지다.
단검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는 자세를 취했다.
체셔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이 아주 작정을 했나 봅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이미 말을 맞춘 유시엘과 체셔와 달리, 멀리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오스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이 누군가?
바로 장녀와 차녀다.
미스린토의 율법과 일년전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다른 두 동생을 어렸을 때부터 압박하면서까지 일년전쟁을 준비한 자들이 아닌가.
당연히 명일 여명까지는 모든 자매들이 장로회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도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스티아 아가씨는 그럴 리 없겠지만.’
사실 별것 아닌 봉신가라서 기대는 안 했지만 그대로 저 체셔 클라인이라는 ‘검’의 실력을 볼 수 있는 기회다.
이실리엔의 암종인 롬벨트의 실력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틸랑쥬의 기사인 에덴발트는 미스린토 내의 기사들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미스린토의 기사들도 봉신가에서 차출되는 만큼, 봉신가의 자제들과 같은 무술을 익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은 일반적인 기사들과 비교조차 해선 안 되었다.
“아가씨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편하면 앉아 계셔도 좋고요.”
“음! 알겠다.”
에덴발트가 기합을 내지르며 창으로 찔러 들어왔다.
체셔도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검을 출수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경탄을 금치 못할 신속(神速)의 발검이지만 소리마저 죽인 듯 칼이 스치며 닿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챠앗!”
꽈르르릉!
에덴발트의 창끝이 마치 갈라지는 모양을 하더니 수십 개의 창영(槍影)을 만들어 냈다. 그 창영은 체셔가 서 있는 공간을 점하며 뇌성벽력을 터트렸다.
‘대충 하라는 명령은 안 내려 놓으신 건가?’
얼이 빠져 있는 체셔를 향해 뇌기를 머금은 돌개바람과 날카로운 창끝이 쾌속하게 날아들었다.
기세를 받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봉신가 중 유일하게 창을 쓰는 이베르트 가문의 창엔 강력한 뇌기(雷氣)가 어려 있어서 기세만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든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겪어 보니 역시 명불허전!
14개의 봉신가 중에 상위에 머무는 가문의 무술다운 위력이 느껴졌다.
퍽!
롬벨트도 서 있던 자리에 흙먼지만 남겨 놓고 사라졌다. 체셔는 기감을 퍼트려 롬벨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는 발끝으로 땅을 찼다.
스르르.
체셔의 몸이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수십 개의 창영을 표홀하게 피해 냈다.
그런 체셔의 놀라운 신법을 보고 있던 제오스는 입에서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 잊고 있었다.
창은 한쪽을 잡고 다른 한쪽에 달린 창날로 찌르거나 베는 무기다. 몸체도 길어서 잡은 부분은 조금만 움직여도 반대쪽은 공격의 방향이나 범위가 크게 변한다.
그것은 창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지만 최소의 동작으로 넓은 범위를 신속하게 격할 수 있다는 점은 창술을 익히는 자들의 가장 큰 자부심이다.
‘사, 사람이 저렇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가?!’
하지만 그런 자부심이 체셔에 의해 박살나고 있다.
수십 개는 될 법한 창영의 공세 속으로 파고든 체셔의 검이 창대를 타고 내달렸다.
‘움직이지 못해?!’
제오스는 검과 창이 닿는 순간, 마치 허공에 창이 고정된 것처럼 꿈적도 하지 않는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 눈을 크게 치켜떴다.
보는 사람이 그런데 당사자는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드드득!
창대를 타고 들어온 체셔의 검은 에덴발트의 손가락을 엄지만 남기고 모두 날려 버리고 말았다.
“끄아아악!”
잘린 손가락이 꾸물거리며 허공을 수놓았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품으로 파고든 체셔는 에덴발트의 명치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꺽!!”
에덴발트는 창을 놓치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체셔는 유시엘의 목을 노리고 있는 롬벨트의 움직임을 놓쳐 버린 것 같았다.
유시엘은 목 언저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굳이 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