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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8화)
1. 미스린토의 네 자매(8)
텁썩!
그 순간 에덴발트가 놓친 창이 체셔의 왼손에 들렸다.
체셔는 손에 들린 창을 앞으로 한 번 내지르고는 곧바로 뒤쪽으로 내던졌다.
콰작! 퍽!
“컥!”
“크악!”
두 번의 타격음이 두 개의 비명을 만들어 냈다.
창이 앞으로 내질러졌을 때는 주저앉아 있던 에덴발트의 목젖이 박살 났고, 뒤로 내던져졌을 때는 유시엘을 노리던 롬벨트의 미간을 꿰뚫었다.
“커르르륵!!”
에덴발트는 없는 손가락으로 목을 감싸 쥐며 피거품을 물었다.
부릅떠진 롬벨트의 눈에서는 초점이 사라졌다.
돌아보지도 않고 던진 그 창에 얼마나 정확하고 강력한 힘이 실렸던 걸까…….
롬벨트의 뒤통수에서는 뇌수 섞인 핏덩이가 묻은 창끝이 수줍게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호오?”
창에 머리를 관통당해서 벌렁 넘어간 롬벨트를 힐끗 내려다보는 유시엘이 오싹한 미소를 띠웠다.
유시엘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
언니들이 ‘이블 스마일(Evil smile)’이라 부르는 악마의 미소다.
“알…… 아니, 과연 나의 ‘검’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일이 발생했다.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그림자들.
바로 미스린토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에덴발트와 롬벨트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체셔가 그림자들을 향해 묻는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분노가 서려 있었다.
유시엘도 체셔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가운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장로들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아직 여명은 멀었을 텐데? 그리고 공격받기 전에 제제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지켜보고만 있었지?”
그림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장녀와 차녀를 추궁토록 하지.”
“어차피 저 ‘검’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란 판단이었다.”
유시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반박했다.
“호오? 만약 이 반칙으로 내가 죽었어도 추궁으로 끝낼 생각이었나? 당주도 그렇고 장로회도 한통속이었군. 아주 나와 이스티아를 예외로 치지 그랬어? 위에 둘만 일년전쟁을 치르게 했으면 좋았잖아. 이대로라면 압실란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 작자들의 세력으로 가장한 당신들, 장로회에게 죽을지도 모르겠군.”
그림자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그림자 중 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열흘간 어떠한 행동도 못하도록 근신 처분을 내리겠소. 아가씨껜 무엇보다 좋은 조건이라 생각하오.”
“흥! 미스린토의 전통도 많이 퇴색된 것 같군. 시작 전부터 이런 비겁한 술수가 오가다니. 만약 내가 여기서 죽었다면 아주 만세삼창을 했겠군. 아쉬워서 어쩌지?”
유시엘은 조롱하듯 독설만 남기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편, 체셔는 유시엘이 가정하고 실제로 성공한 시나리오로 인해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유시엘이 여유를 부리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한 것이다.
유시엘은 일년전쟁 선포식 전후로 유시엘은 언니들을 조롱했다.
그것은 언니들을 도발하기 위한 격장지계이자, 장로회의 눈에 들기 위한 치밀한 계책!
장로회는 유시엘의 그 태도로 장녀부터 삼녀까지 속이 뒤틀렸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힘이 없는 유시엘을 어떻게든 죽이려 할 것이라는 것도.
물론 유시엘이 계획한, 위협이 되지 않는 암습은 장로회를 이용해 언니들에게 패널티를 주기 위한 준비였다.
안타깝게도 저택을 나가 있던 이스티아가 제외됐긴 했지만 왈케르나 번드까지 가는 동안 장녀와 차녀의 공격을 받지 않는 것은 크나큰 메리트다.
한편 대화 내용을 듣지 못하고 있던 제오스는 다른 것에 놀라고 있었다.
‘으음! 아무래도 사교도로는 저 체셔라는 ‘검’을 상대할 수 없겠는데……. 그나저나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네.’
체셔는 세력도 없는 유시엘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보잘것없는 봉신가의 ‘검’으로 알려져 있었다.
실력도 고만고만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이번 전투로 그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봉신가 내에서도 일절로 인정받는 에덴발트의 창을 스치지도 않고 피해 내는 것만 봐도 자신은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아스발란 가문의 ‘검’, 리온이나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장로들이 두 구의 시신을 수습해서 사라지고, 유시엘과 체셔도 출발하기 위해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사람의 말이 저만치 멀어졌을 때, 제오스도 그 뒤를 조용히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2. 사교도와 연극(1)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은 동이 트자마자 가벼운 마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하지만 에크샤가 갑자기 앞을 막아서면서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암습이라고요?!”
에크샤는 한심하다는 듯 두 딸을 노려봤다.
“너희들에겐 실망했다. 열흘간 근신이다! 근신 기간 동안은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명심해라.”
에틸랑쥬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휙 달아나는 것 같았다.
이실리엔도 오늘 저택을 나서면 부하들이 잡아 온 유시엘의 비참한 얼굴을 내려다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능욕하게 한 다음, 살아 있는 채로 태워 죽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날벼락이 떨어졌다.
“유시엘이 이렇게 말했다더군. 미스린토의 전통도 많이 퇴색된 것 같다고……. 어디 가서 소문이라도 내면 이게 무슨 망신이겠느냐!”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두 시신에 대한 조사가 끝나고 뱀파이어에게 물려서 이지가 제압됐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이상은 두 사람의 무죄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에덴발트나 롬벨트의 독단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공연한 자신들의 수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롬벨트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에덴발트가 어째서…….’
유시엘이 무언가 손을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검’ 하나만 데리고 왈케르나 번드로 향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손을 쓰려 했다면 이스티아의 부하에게도 손을 썼을 것이다.
에틸랑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찰나지만 지금까지 유시엘을 지켜봐 왔던 것들부터 차근차근 떠올렸다.
무언가 놓치지 않았나?
이상한 낌새는 없었는가?
이실리엔도 마찬가지였다.
속수무책이었지만 결과는 이미 닥쳐왔다.
하지만 당황해서만은 안 되었다.
열흘이라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가? 가장 큰 적이라 여기던 에틸랑쥬 언니도 함께 당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제 둘은 열흘간 미스린토 저택을 떠나는 것은 물론, 일년전쟁에 개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만약 그것을 어긴다면 전쟁을 시작도 못해 보고 목을 내놓아야 한다.
이제 두 사람은 이스티아가 유시엘이 왈케르나 번드로 들어가기 전에 잡아 주길 바라야 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유시엘은 6개월을 약속했다.
어차피 별것 아닌 일이 분명하지만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불안 요소를 남겨 두긴 싫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은 본의 아니게 부정을 저지른 상태.
만약 유시엘이 마음을 바꿔 일 년 후까지 왈케르나 번드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이실리엔이 안색을 싹 바꿨다.
‘윽! 언니가 함께 당했다고 안심할 게 아니었잖아!’
이스티아가 당주의 자리를 꿰차게 될지도 모른다!
공로가 아무리 많아도 부정을 메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일의 흑막은……!’
에틸랑쥬도 결국 같은 답에 도달한 듯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다.
그녀는 손톱을 깨무는 버릇이 나왔고, 이실리엔은 신경질적으로 팔이 하얗게 될 때까지 틀어쥐었다.
한참 후, 이실리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이거 분명 이스티아가 뭔 짓을 한 거겠지?”
“사교의 사악한 주술로 둘을 홀렸을 게 분명해!”
둘의 분노는 유시엘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
유시엘과 체셔는 동이 틀 때 잠깐 긴장했지만 별 다른 위협은 없었기에 인근의 우스바이어 영지를 찾았다.
꼬박 하루를 달렸다.
사람은 물론이고 말도 쉬어야 했다. 그리고 유시엘의 체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페라넨 공작령을 벗어나려면 얼마나 남았지?”
체셔는 일년전쟁을 위해 스케반니아 여왕국 대부분의 지리를 외운 상태라서 지도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 속도라면 약 반나절 정도만 더 가면 압실란 공작령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왈케르나 번드는 압실란 공작령의 동쪽 끝 해안가다. 즉, 스웰라드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두 사람은 경비병이 있는 곳까지 와서도 대화를 했다.
“강행군 덕에 상당히 빨리 왔습니다.”
“음! 하루 정도 쉴 곳을 물색해 봐라.”
영지에 들어설 때 신분 확인이 있었지만 둘은 위장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간단한 확인 절차를 끝내고 두 사람이 영지로 들어갔을 때였다.
신분을 확인했던 경비병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
남은 경비병은 이상하다는 듯 사라지는 경비병의 등에 대고 물었다.
“교대하기 전에 갔다 왔지 않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체셔는 잠을 자지 않고도 오래 견딜 수 있지만 유시엘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기절하듯 침대에 쓰러졌다. 씻고 자라는 말을 할 새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흙먼지가 가득한 몸을 침대에 파묻고 있었다.
체셔는 입구를 등지고 유시엘이 있는 창가를 바라보는 위치에 앉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기감을 퍼트렸다.
눈을 감고 있어도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들이 머릿속에 하나하나 그려지기 시작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체셔는 호흡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찾아온 것은 펍의 일을 돕던 소년이었다. 더워지는 날씨에 사내들이 많이 모이는 펍의 열기 때문인지 소년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 거죠?”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사교도 탓에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 없다.
오직 미스린토에서 챙겨 온 건량에 의지해야 했다.
체셔는 먹거나 마시지 않고도 오래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음식은 유시엘에게 맞추고 물을 많이 챙겼다.
먹는 것은 둘째치고, 마시지 않으면 괴로웠으니까.
오전에 여관에 들어왔지만 유시엘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늦은 밤이 되어서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체셔가 염려를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나저나 유시엘은 역시 대단하다.
하루 종일 뻗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가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피로한 것 같은 안색이 그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을 정도다.
“오랜 시간 수고했다.”
체셔는 유시엘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앉았다.
“주무시는 동안 물을 사 뒀습니다.”
체셔는 저녁쯤에 다시 찾아온 소년에게 씻을 물을 주문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장정 넷이 양손에 물동이를 하나씩 들고 문 앞에 갔다 놨다.
물론 체셔가 미리 피부에 대어 보기도 하고, 마셔 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이상한 점은 찾을 수는 없었다.
체셔는 여전히 벽을 보며 기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귓가에서는 유시엘이 몸을 씻는 소리가 관능적인 음색처럼 간질거렸지만, ‘검’으로 자란 체셔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 수는 없었다.
한참 후에 유시엘이 몸을 씻고 나왔다.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끝나고서야 체셔가 몸을 일으켰다.
“뭔가 드시고 싶진 않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만.”
항상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음식만 입에 대 오던 유시엘에게 말고기 육포나 뜨거운 스프에 ‘녹여’ 먹어야 할 법한 마른 빵처럼, 질이 떨어지는 것은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비린내에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한사코 불평하지 않고 먹었다.
“됐다, 아직 생각 없어.”
‘해물 스튜가 생각나는군. 유시엘 아가씨도 좋아하실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