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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9화)
2. 사교도와 연극(2)


클라인가의 메이드인 웨리는 요리 실력이 뛰어났다.
지금은 퇴직한 샬린이라는 메이드의 견습으로 들어왔던 웨리는 12살 때 체셔가 태어나는 것을 봤다.
체셔는 웨리를 친누나처럼 따랐고, 무척 좋아했다.
특히 그녀의 해물 스튜는 일품이었다.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는 어머니는 경기를 일으켰지만 아버지와 체셔는 해물 스튜가 나오는 날이면 서로 쌍수를 들고 좋아했다.
‘언제나 활짝 웃는 얼굴이 참 좋았지.’
체셔의 미소는 웨리를 닮았다.
웨리는 체셔가 아기였을 때부터 늘 상냥함과 배려를 담은 미소를 보여 줬다.
체셔도 늘 웨리와 마주 웃었다.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체셔는 추억에서 빠져나왔다.
현실에 있는 유시엘은 창밖의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고운 뺨에 달빛이 어른거리는 모습이 꿈결처럼 몽환적이다.
“아!”
체셔는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왜 그러지?”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1층에 내려가도 기감의 범위는 충분하다.
여차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천장을 박살내고 적에게 일격을 날릴 능력이 체셔에겐 있었다.
체셔는 배낭에서 육포를 비롯해서 노숙할 때 쓸 예정이었던 말린 반찬과 수통을 챙겨서 1층으로 내려갔다. 품에 뭔가 한가득 들고 내려오는 체셔를 본 주인이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봤다.
“주방 좀 빌리겠습니다.”
어차피 늦은 시간이라 술을 마시는 손님 몇을 제외하곤 한산하다. 주방의 사람들도 뒷문으로 나가서 술잔을 주고받고 있을 뿐이다.
오직 불만 빌리는 것이다. 비록 불씨는 거의 죽어 있었지만 체셔는 능숙하게 불씨를 다시 살리고는 양철 솥에 물을 부어 부드럽게 으깬 육포와 마른 반찬을 넣고 끓였다.
향신료도 쓰지 않고 챙겨 온 소금만을 이용해 간을 맞췄을 뿐이지만 금방 그럴싸한 것이 만들어졌다.
맛도 괜찮고 무엇보다 육포의 육질이 부드럽다.
이 정도면 유시엘도 충분히 배를 채울 수 있으리라.
“특이하군.”
예상대로 유시엘은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왈케르나 번드에 도착할 때까지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 하지 않고 있었다.
괜히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비린 육포를 씹었겠는가?
“좋군, 끼니마다 만들어.”
대신 체셔가 할 일이 늘어나고 말았다.

***

종업원으로 위장했던 제오스는 독을 쓰려던 작전이 실패하게 되자, 밖에 나와 있는 요리사들과 먹기도 싫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젠장!’
섣부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일반인은 못 느끼는 기의 파장이 무려 100여 미터 가까이 펼쳐져 있다.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낱낱이 체셔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으리라.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녀석이…….’
체셔라는 ‘검’은 알면 알수록 암담해지는 상대였다.
봉신가 최고라 인정받는 리온 아스발란을 봤을 때도 이 정도의 높은 벽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건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이런, 씨……! 보고도 못하겠네.’
성과가 전혀 없다.
아니, 성과를 낼 수가 없다.
성과만 못 낸 것이면 다행이다.
파훼법이라도 조금이나마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으니 더 미칠 노릇이다.
체셔가 펼치는 기감의 범위가 좁으면 모를까, 그 반경이 무려 100여 미터다.
그 범위 내에서는 뭘 해도 그가 먼저 눈치채고 만다. 만약 그 안에서 허튼짓을 하다가 들키면 미행조차 불가능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기감의 범위 밖에서 무언가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활?
그런 실력을 가진 ‘검’이 화살을 못 막겠는가?
자신도 화살 정도는 눈 감고도 쳐 낸다.
제오스는 먹기 싫은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머리를 싸맸다.
인정하기 싫어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솔렌 백작의 영지로 미뤄야겠군.’
솔렌 백작은 이곳에서 압실란 공작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지나게 되는 에카르드의 영주다.
그 또한 사교도이며, 이스티아의 열렬한 추종자다.
취향이 지저분한 변태라는 것이 흠이지만 충성심만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유시엘과 체셔는 가짜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다.
적당한 누명을 만들어서 에카르드 영지에 붙잡아 두면 시간을 벌 수도 있고, 일이 잘되어서 둘을 잠시라도 떼어 놓을 수만 있다면 유시엘을 붙잡을 수도 있다.
붙잡는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붙잡으란다.
제오스는 그 지시가 황당했지만 뭐라 토를 달 입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딱히 어렵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스티아 아가씨도 참……. 뭔 옛정에 그렇게 목매시는지 모르겠어.’
제오스는 술잔을 내려놓고 취한 것처럼 자리를 떴다.

***

제오스가 전해 온 보고서를 받은 이스티아는 멍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클라인 가문이 그렇게 대단했었니?”
체셔 클라인에 대한 보고 내용은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검’이니 롬벨트를 처치했다는 것은 이해는 할 수 있다.
한데, 에덴발트까지는 믿기 힘들었다.
그는 미스린토 본가에 있는 기사다.
바깥으로 치면 왕실에 머무는 기사다. 아무리 ‘검’이라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제오스의 마지막 전언은 이스티아의 심기를 더욱 어지럽혔다.

리온 아스발란보다 강한 것 같아요.

이스티아는 곁에 있던 벨린에게 서신을 건넸다.
“벨린, 이 글을 봐줘.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
벨린은 ‘검’들 중에 가장 어리다.
하지만 이스티아는 그가 ‘검’들 중 가장 강하다고 믿고 있었다.
벨린 또한 그렇게 자신했다.
자신의 몸에 숨겨져 있는 사교의 정수는 그 끝을 짐작해 내기 힘들 만큼 어둡고 강력했으니까.
“리온과 비교했다는 것부터 넌센스네요.”
그렇다곤 해도 리온 아스발란은 강하다.
아스발란 가문의 백연식(百連式)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막아 낸 적이 없는 무적의 검술로 알려져 있다.
아스발란 가문이 가진 절정의 환검(幻劍)들이 쉴 새 없이 잇달아 펼쳐진다.
그걸 모두 막아 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리고 괜히 아스발란 가문을 봉신가 중 으뜸이라 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겐 경험과 능력이 있다.
“어쨌든 접근해 있는 것은 제오스니까, 그의 말처럼 서둘러서 에카르드에 모아야겠다.”
이스티아는 자신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 작은 키를 가진 벨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급조지만 좋은 연극을 한 편 만들어 보자구.”
새벽이 한창일 시간…….
이스티아가 머물고 있던 여관에 검은 그림자들이 은밀하게, 그리고 무수히 몰려들었다.
하지만 여관에 있는 그 누구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침을 맞았다.

***

유시엘은 지난 늦은 오전부터 열두 시간 가까이 잤지만 그래도 피로가 풀리지 않은 듯했다.
“아가씨…….”
체셔는 걱정이 한층 더 깊어졌다.
유시엘은 아닌 척했지만, 체셔는 그녀의 체력이 정말 ‘귀한 아가씨’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새벽에 체셔가 만든 스튜를 먹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유시엘은 어느샌가 쓰러지듯 다시 잠들어 버렸고, 정오가 되어서야 다시 깨어났다.
시간상으로 보면 꼬박 하루를 자 버린 것이다.
“이런.”
깨어나서 시간을 확인한 유시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말 하루를 머물러 버리고 말았다.
영지에 들어서기 전에 경비에게 대화의 내용을 흘린 것도 새벽에 은밀하게 빠져나가기 위함이었는데, 또 행적을 남기게 생겼다.
“하아…….”
새벽에 다시 자 버린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게 아닌 모양이다.
유시엘의 한숨 소릴 듣고 있는 체셔는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는 동안에 사교도로 추정되는 사람 수십 명이 인근을 에워싸기 시작했고, 지금은 빠져나갈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여관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음.”
자책하는 듯한 신음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체셔.”
체셔는 그녀가 일어나는 순간부터 자세를 바로잡은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예, 아가씨.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군. 상황을 알 수 있겠어?”
“정확하게 짚으셨습니다. 현재 사교도로 추정되는 백에 가까운 인원들이 이 여관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를 본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왜 깨우지 않았냐고 추궁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과연.’
유시엘은 순간적으로 한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상황을 읽어 냈다.
끊임없이 사고했을 때 가정되어진 시나리오 하나가 그녀의 뇌리를 스친 것이다.
유시엘은 확인을 위해 창밖을 내다봤다.
“체셔, 밖에 있는 사람들의 능력은 어느 정도지?”
“말씀드렸다시피 보통 시민들입니다. 떼로 모여들지 않았다면 사교도라는 추측도 못했을 것입니다.”
체셔의 대답을 들은 유시엘은 확신했다.
‘죄를 만들어선 안 된다.’
자신들은 미스린토에서 나온 순간부터 위장 신분이다.
다른 자매들과 달리 유시엘은 ‘검’ 하나를 제외하고는 스케반니아 여왕국의 모든 세력이 적이나 마찬가지다.
일년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의 발을 묶었다고 해도 그 둘의 세력은 널리 퍼져 있고, 이스티아도 남아 있다.
이스티아의 세력은 사교도.
사교도의 ‘눈’은 그 무엇에 비할 것이 아니다.
사교도는 국가 세력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있다. 만약 ‘범법자’가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국법에 반하는 행위까지 해야 한다.
만약 왈케르나 번드로 향하는 길에 범법으로 인한 수배가 내려진다면…….
“아가씨?”
유시엘은 머릿속으로 정리된 내용을 이야기했다.
“범법은 안 된다. 이스티아의 노림수가 분명해. ‘검’을 상대하기 위해 모인 자들치곤 너무나 약하지? 이런 잔챙이들을 보내서 길을 막았다는 것은, ‘검’으로 하여금 무력행사를 하게 만든다는 이스티아의 계략이다.”
체셔도 유시엘의 뜻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저희가 범법을 저지르게 해서…….”
“국법으로 사로잡겠지.”
유시엘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람이었다.
체셔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어제의 그 준비된 계략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녀는 예기치 못한 위험 요소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다음 목적지는 에카르드인가?”
“예, 압실란 공작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지나는 곳이 솔렌 백작 소유의 에카르드 영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