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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10화)
2. 사교도와 연극(3)
솔렌 백작.
중년 나이에도 독신을 고집하며 동생인 페고트 남작의 막내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정계의 생활도 잘하는 편이고, 뭣보다 뒤가 구릴 만한 짓을 하지 않는, 귀족의 교과서 같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던 유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에카르드 영지에 가는 것보다 이곳을 조용히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했다.
여관, 포위, 사교도, 범법, 계략…….
유시엘의 머리는 이러한 조건들로 최적의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 지식의 샘에서 혼돈의 조각을 재구성했다.
그러다 무언가가 생각난 듯 창밖을 살폈다.
그녀의 레드와인 빛깔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체셔, 만약 내가 없다면 포위를 은밀히 빠져나갈 수 있겠나?”
“그건 아무 의미 없습니다.”
“가능하냐고 물었다.”
“가능합니다.”
유시엘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만약 맞은편에 보이는 교회의 크러치 벨(Church bell)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 것 같지?”
체셔도 유시엘이 가리키고 있는 교회의 탑에 있는 크러치 벨을 바라봤다.
뿔 형태의 첨탑에 있어서 종이 떨어진다면, 데굴데굴 굴러서 시장 쪽으로 향할 것이다.
“제가 크러치 벨을 떨어트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사건을 일으키는 거다. 저곳이 어디냐? 이스리아 교회다. 정교처럼 신부들만 있는 것이 아니지. 왕실에서 파견된 기사들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 머물고 있다. 그리고 때마침 교회 주변엔 사교도도 많아 보이는군.”
체셔는 또 한 번 감탄했지만 유시엘을 두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유시엘은 그런 체셔의 걱정을 읽어 냈다.
“그게 아니라면…… 검기를 날릴 수 있겠나?”
“아!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유시엘은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여기서 교회의 크러치 벨까지는 50미터가 족히 넘는다. 약관의 나이에 검기를 뽑아내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닿는단다. 50미터 이상 떨어진 크러치 벨에.
미스린토의 숙련된 기사들도 검기를 날리지만 잘해 봐야 20여 미터에 그친다.
그것도 그만큼 날아가면 위력이 형편없다.
어린아이가 맞아도 한 번 울고 끝낼 정도다.
체셔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가씨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제오스는 다른 사교도들과 여관을 감시하고 있었다.
2층 창문으로 비치는 실루엣은 유시엘이 틀림없었다. 그녀도 체셔라는 ‘검’이 있으니 상황을 파악했으리라.
공교롭게도 교회 근처에서 수작을 부리게 되었지만 자기 입으로 사교도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 이상은 들키거나 해코지 당할 이유가 없다.
사교도는 표면적으로 평범한 시민들이니까.
‘어제 그 소년?’
어제 종업원으로 위장하면서 만났던 펍의 일을 돕는 어린 소년이 심부름을 가는지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몇 분이나 흘렀을까?
갑자기 시장 안쪽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와 플레이트의 쇳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헉! 반돌크 남작이 왜?”
우스바이어의 영지의 로드 나이트(Load knight)이자, 왕실 파견 기사인 반돌크 남작이 소집 기사들과 경비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그 순간이었다.
쐐―액! 퍼버벙!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파공음과 함께 폭음이 터졌다.
“으헉!”
제오스는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갑자기 교회의 첨탑이 폭발하더니 머리 위로 깨진 돌조각이 우수수 쏟아졌다.
텅! 텅! 텅! 텅!
교회의 크러치 벨이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꺄아악!”
“으악! 피해!”
아래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대피했다.
시장을 달려오던 기사들은 말을 박차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꽈아아앙!
시장에 모여 있던 제오스와 사교도들은 갑자기 멀쩡한 교회의 크러치 벨이 떨어지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천만다행으로 떨어진 장소가 큰길인데다, 미리 소란이 일어서 인명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닥에 무참히 처박힌 크러치 벨 앞에 도착한 반돌크 남작은 검을 뽑아 들면서 우렁찬 일갈을 내질렀다.
“움직이지 마! 지금부터 움직이는 놈은 다 사교도다!”
제오스는 직감적으로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를 보며 슬슬 자리를 피하려던 사교도들은 반돌크 남작의 외침에 꼼짝없이 발목이 잡혔다.
제오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때 펍에서 일하던 소년이 반돌크 남작이 타고 있던 말에서 뛰어내리며 외쳤다.
“저분들이에요!”
소년이 여관 입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느새 떠날 준비를 마친 체셔와 유시엘이 말과 함께 서 있었다.
‘위장까지!’
제오스는 둘의 모습을 보는 순간 크러치 벨을 떨어트린 것이 체셔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쳤군! 그게 검기였나! 거리가 얼만데?!’
반돌크 남작의 말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유시엘과 체셔는 반돌크 남작에게 예를 표했다.
“당신들이 신고한 게요?”
체셔가 대답했다.
“오전에 산책 도중, 사교도들이 신성한 이스리아 교회를 해하려 한다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도망쳤지만 결국 이곳에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든 연락할 방법을 찾다가…….”
체셔는 갑자기 분에 찬 목소리로 근처에서 상인의 행색을 하고 있거나 배회하다 멈춰 선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모두 사교도입니다! 조금 전에 이상한 마법을 써서 크러치 벨을 떨어뜨렸습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체셔에게 지목당한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반대로 반돌크 남작은 노한 얼굴로 부득 이를 갈더니 여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연행해라! 저항하면 그 자리에서 베도 좋다!”
제오스는 자신도 포박하려는 경비대원을 보면서도 차마 저항할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이곳에 있는 기사와 경비대원을 죽이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체셔’는 싸울 명분을 얻는다. 그럼 사교도로부터 영지를 구한 ‘영웅’이 되는 것이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연행된다 해도 미스린토 봉신가라는 것을 밝히면 풀려나겠지만 이들을 놓치고 만다.
게다가 에카르드 영지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때, 유시엘이 쓰고 있던 후드를 살짝 걷어내면서 반돌크 남작을 올려다봤다.
“기사님, 저희를 영지 밖까지 호위해 주실 수 있나요?”
“헙!”
반돌크 남작은 유시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치 심장이 멎는 것처럼 숨이 콱 막히고 말았다.
“무, 물론이오!”
반돌크 남작은 이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함께 있는 사내가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이 아름다운 여인의 호위 같기도 했지만, 외관이 수려한 것을 빼면 그다지 강해 보이진 않았다.
한데, 이 아가씨의 미모는 귀족가의 영애들 중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빼어났다.
아니!
이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성은 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신이 편애했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 기사된 자로서 흐트러질 순 없지!’
반돌크 남작은 고개를 저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추슬렀다.
마치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자신은 이미 결혼도 한 몸이지 않은가.
반돌크 남작의 지시로 포박당한 사람들의 수는 무려 백에 달했다.
그중에는 진짜 사교도도 있었고, 평범한 시민도 섞여 있었지만, 조사를 받은 후엔 풀려나거나 이스리아 국교회의 재판소에 넘겨질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연행되었다.
체셔와 유시엘은 반돌크 남작과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체셔는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부터 시작해서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한 영지를 대표하는 기사인 ‘로드 나이트’가 사교도가 아니라 해도 그 아래 있는 기사들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끙! 죽겠군.’
반돌크 남작은 묵직하게 주변을 눌러 오는 기이한 기운에 신음을 흘렸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체셔가 무지막지한 기운으로 주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강한 기는 약한 기를 억누른다.
‘기 싸움’이라는 말이 거기서 비롯됐다.
기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데, 기가 죽으면 몸이 움츠러든다. 체셔의 그 기운은 인근에 있는 자들에 대한 무언의 경고다.
허튼짓 하면 목이 떨어져 나간다는 경고.
심지어 그 기운의 농밀함이 어디든 균일해서, 기운의 원천이 체셔라는 사실을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크으으으으윽!’
한편 일부러 체셔와 유시엘의 뒤를 잡았던 기사 한 명은, 체셔에게 일격을 날리기 위해서 검병을 잡은 손에 힘을 주려 했지만 그것이 번번이 무산되자 신음을 흘렸다.
힘을 주려면 근육이 끊어진 것처럼 손아귀가 탁 풀렸다.
“쿨럭!”
그러다가 기침이 터져 나왔다.
거칠게 터져 나오는 숨에서는 녹슨 쇠 냄새가 났다.
체셔도 그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서 투구 사이로 눈을 마주쳤다.
“저분의 몸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체셔가 입을 열자 그대로 기세를 얻어맞은 그 기사는 결국 피를 토하며 혼절하고 말았다.
쿵!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가 모로 넘어가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쓰러지면서 반쯤 벗겨져 버린 투구를 타고 시커멓게 죽은피가 흘러나왔다.
“헉! 이보게!”
“이게 무슨 일이냐!”
그것을 본 동료들이 기겁을 하며 몰려들었다.
유시엘도 깜짝 놀랐지만 체셔가 걱정 말라는 듯 입과 눈동자를 굴리자 유시엘도 ‘적절한’ 대처를 했다.
“꺄악!”
‘아가씨!’
체셔의 표정만 봐도 유시엘의 대처가 썩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쓰러진 사람을 구하려던 기사들이 하나같이 투구 사이로 눈을 빛내면서 유시엘을 보호하려 했으니까.
그런 짧은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동료들에 의해 쓰러진 기사의 플레이트가 벗겨졌다.
“눈이 돌아갔어.”
흰자만 보이는 눈으로 사지를 부들부들 떨고 있다.
‘이 정체 모를 기운 탓인가?’
반돌크 남작은 추측밖에 하지 못했다.
무술을 익힌 자가 내뿜는 기운과 비슷했지만 위력이 상식을 벗어났다.
어쩌면 사교의 술법일 수도 있다.
“다들 괜찮나?”
그쯤에서 체셔는 기운을 죽였다.
사교도는 색출됐다.
기감만 적당히 펼쳐 놓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기사들은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습니다.”
반돌크 남작도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자 의아해했다.
‘액땜이라도 해야겠군.’
그렇게 무사히 우스바이어 영지의 밖까지 호위를 받은 체셔와 유시엘은 반돌크 남작에게 감사를 표하고 에카르드 영지를 향해 말을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