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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11화)
2. 사교도와 연극(4)
노을이 깔릴 무렵까지 쉬지 않고 달린 체셔와 유시엘은 사방이 트인 언덕에서 말을 세웠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유시엘은 자조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약 체셔가 아닌 누군가가 유시엘의 미소를 봤다면 곧바로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곧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온 만큼만 더 가면 압실란 공작령에 들어간다. 에카르드 영지만 지나면 일부러 둘러 가지 않는 이상, 다른 영지를 거칠 일도 없다. 할로바스 만(灣)으로 빠지는 이스나 운하만 따라가면 왈케르나 번드가 나온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노숙을 감행하면서까지 왈케르나 번드로 직행하고 싶었지만 유시엘의 체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 버린 뒤라서 차마 그렇게 하질 못했다.
말을 탄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한두 시간 정도 사냥이나 취미를 즐기는 정도라면 모를까, 몇 시간씩 질주하는 것은 아무리 숙련된 자라 해도 고되다.
특히 더울 땐 더하다.
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내리쬐는 햇볕은 몸만 아니라 마음도 지치게 한다.
그리고 지금은 초여름이다.
지나치게 더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낮엔 짜증이 날 만큼 무더운 날씨다.
땀은 나지, 흙먼지는 징그럽게 달라붙지…….
좋은 환경에서 좋은 것만 먹고 살아왔던 유시엘에겐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노숙은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 쉬워 노숙이다.
밖에서 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같은 날씨에는 새벽이 되면 한기가 올라와서 몸을 상하게 한다.
그리고 아무리 편하다 해도 방바닥만 못하다.
만약 무리하게 노숙을 하다가 유시엘의 몸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발이 더 느려질 수밖에 없다.
체셔는 다시 육포 스튜를 만들었다.
땔감을 모아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고…….
하지만 만들지 못했다.
아니, 만들 이유가 없어졌다.
유시엘이 돌에 기댄 채로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가씨…….”
체셔는 안타까워하며 잠자리를 준비했다.
무리해서는 안 되었다.
얼마 안 남았다면 모를까, 아직 압실란 공작령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들어선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왈케르나 번드까지는 이틀을 더 가야 했다.
체셔는 부드러운 풀을 모아서 바닥에 깔았다.
너무 많이 깔면 오히려 불편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고 평평함을 느낄 정도면 족했다.
새벽을 대비해 불을 피울 수 있도록 장작도 모았다. 그리고 유시엘을 모포에 눕혀 주는 일까지 끝났을 때엔 해가 완전히 넘어갔다.
곧 별이 총총하게 떠올랐다.
달도 충분히 밝았다.
조금씩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날씨는 아직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체셔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후우.”
기가 몸 곳곳을 타고 돌며 활력을 불어넣었다. 하루 동안 몸에 쌓인 잡스런 기운들도 어깨에서 피어오르는 푸르스름한 안개에 섞여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기감이 더욱 넓어진다. 탁 트인 언덕은 시야도 좋다.
쉬는 시간이라도 결코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영지와 영지 사이.
특히, 물자가 오가는 대로의 인근에는 질이 나쁜 용병 무리나 도적들이 오간다.
그들은 야전전투에 익숙하다. 어떻게 하면 먹잇감을 농락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는지 많은 경험을 통해 숙지하고 있다.
그런 무리는 동료의식도 없다.
동료를 먹잇감으로 내던지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취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다. 어차피 그러기 위해서 모인 자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불을 피우고 있으면 ‘내 것 좀 빼앗아 가소’라고 하는 꼴이다.
달이 서서히 기울어질 무렵, 체셔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새까만 눈동자에 파르스름한 달빛이 어른거렸다.
유시엘은 처음 눕혀 놓은 대로 잠들어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살짝 찌푸리고 있는 미간이 마냥 사랑스럽기만 하다.
깨어 있을 때의 오만하고 위압적인 모습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귀여운 얼굴이다.
슬슬 한기가 서릴 때라서 불을 더 피워야 했지만 그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생기고 말았다.
‘혼자인가?’
이런 야밤에 은밀하게 접근해 온다는 것은 십중팔구 적이다. 그런 상대가 물의 별에 사랑을 담으러 올 리는 없으니 당연히 맞서 줘야 하지 않겠나.
체셔는 소리 없이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달빛을 받아 시리게 빛나고 있는 쇠붙이를 비웃듯, 미리 만들어 둔 잿물을 검신에 들이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새까만 피부를 가진 흑인이 어둠 속에서 흰자위만 허옇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생선 가시처럼 작은 훅(Hook)이 잔뜩 달린 반원형의 쇠갈고리가 들려 있었는데, 그것마저 피부색처럼 검은색 일색이었다.
‘데바요르’는 암살자다.
16년 동안 단 한 번도 청부를 실패한 적이 없는 완전무결한 초일류의 암살자.
그를 아는 사람 중에서는 그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없다.
‘요놈 봐라?’
그는 오랜만에 호승심을 느꼈다.
수백 번의 암살을 행했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범위’에서 먼저 기척을 읽고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대상의 호위는 다르다.
자신의 반경에 들어오기 전부터 기척을 읽어 내고는 먼저 경고하듯 기세를 피워 올린다.
대상은 모닥불 옆에 잠들어 있었다.
제법 먼 거리긴 하지만 달려가서 낚아채고 도주하는 데는 숨 한 번 들이킬 시간이면 충분하다.
대상의 호위는 죽여도 대상은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선금은 생각 이상으로 많이 받았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호위가 보란 듯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자! 나는 여기 있다. 어디 한 번 와 봐라!
데바요르는 상대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듯 피부색과 대조되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 주지!’
서로가 위치를 알고 있다.
데바요르가 먼저 자신만만하게 걸음을 옮겼다.
걸을수록 그의 모습이 점점 흐려졌다. 마치 몸이 투명하게 변해 버리는 것 같다.
‘사라졌어?!’
체셔는 당황스러웠다.
기감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라졌다는 거다.
문제는 기척조차 못 읽었다는 거다. 오는 도중 점점 흐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기감으로 인한 감지는 범위 내에 움직이는 것을 무엇이든 느낄 수 있다.
그 범위 내에서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가 무언가와 ‘동화(同化)’했다는 것이다.
체셔는 상대를 일류 이상의 암살자로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도발에 걸리지 않으려 한다는 것도.
암살자는 기사나 무인이 아니다.
그들에게 ‘정정당당’이라는 단어는 가치가 없다.
대상을 처리하면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이지선다의 논리로 살아가는 단순한 동물이다.
즉, 데바요르가 느끼는 호승심은 강한 자에 대한 호승심이 아니다.
강한 자가 지키는 대상을 자신이 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느끼는 암살자만의 호승심이다.
그 강한 호위를 비웃으며 대상을 처치하면 자신은 강한 호위에게 이긴 것이다.
대상은 죽었다!
자신은 성공하고 상대는 실패한 거다.
그럼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하지만 데바요르는 그냥 끝내기가 아쉬워서 ‘호위’를 죽이고 대상을 느긋하게 데려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자신의 위대한 경력에 ‘납치’라는 조촐한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미있네요.”
체셔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유시엘 앞에서는 보여 주지 않는 차가운 미소가 내걸렸다.
쏴아아아…….
식어 버린 바람이 들판을 휩쓸고 지나갔다.
체셔와 데바요르의 무언의 대치는 어느새 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체셔는 유시엘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검을 늘어트린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반대로 데바요르는 최고의 은신술로 서서히 접근하며 기회를 노렸다. 사실 데바요르는 제법 근접해 있었다.
고작 스무 걸음이나 될까?
그의 움직임은 작은 벌레 같은 움직임이었다.
작지만 분명 조금씩 이동한다.
무인의 기감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지형지물과 하나 된 채로 조금씩 이동한다.
밤은 충분히 길다.
결코 서두를 필요는 없다. 맹수가 초식동물을 노리듯 서서히 접근하면 된다. 상대는 자신이 도망쳤는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방심을 하고 말 것이다.
그럼 그 순간이 끝이다.
이 갈고리는 방심하고 있는 심장을 비웃으며 뜯어낼 것이다.
데바요르는 체셔의 호흡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호흡을 읽으면서 짧은 틈을 이용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갔다.
반대로 체셔는 데바요르의 위치를 모르고 있다. 대신 그가 나타나는 순간을 노린다. 유시엘의 한 걸음 옆까지 접근해도 손을 쓸 때는 움직임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시간에 생사가 갈릴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면 충분하다.
움직임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 체셔의 검은 상대의 숨통을 끊어 낼 것이다.
클라인가의 검술은 극쾌(極快)를 추구한다.
그중에서 가장 빠르다는 사광십이검(射光十二劍)!
체셔가 익힌 검술은 빛마저 잡아낼 수 있다고 한다.
‘크…….’
어느 순간부터인가 데바요르는 접근하면 할수록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곤 움직임을 멈추어야 했다.
가만히 있어도 절로 신음이 나올 것 같이 갑갑하다.
대상과의 거리가 아직 열 걸음은 남았는데, 목을 죄는 압박감은 은신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크윽!’
데바요르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삼켰다.
적의 호흡을 놓치고 말았다!
압박감에 잠시 정신이 흐트러지는 순간, 호흡을 놓친 것도 모자라 적의 위치까지 잃어버렸다.
체셔는 그것을 노린 듯 이미 자리에 없었다.
‘제길!’
데바요르는 한순간이지만 새파란 검끝이 자신의 미간을 찔러 들어오는 환상을 보았다.
16년 동안 실패 없는 암살을 해 왔던 본능이 외쳤다.
미친 짓은 그만둬라.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살고 싶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있는 힘껏 도망쳐라!
달이 구름에 침식되었다.
달빛마저 잃어버린 대지는 완연한 어둠에 물들었다.
그 어둠이 어딘가 낯설다고 생각되는 순간, 데바요르는 머리 부근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눈앞이 빨갛게 물들 때가 되어서야,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도망쳐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암살자 인생의 오점이 남아도 좋다.
살아야 했다.
하지만 데바요르는 그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어느새 정수리에 박혀 버린 체셔의 검이 턱까지 관통해서 바닥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풀썩…….
도망치려던 데바요르의 몸이 순간적으로 한 번 들썩이고는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졌다.
“즐거웠습니다.”
죽음의 감각마저 초월해 버리는 초신속의 일격!
체셔의 검이 만들어 낸 몽환절명식(夢幻絶命式)이었다.
쭈욱.
데바요르의 머리로부터 뽑혀 나오는 검이 진득한 핏물을 머금어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슥슥…….
체셔는 데바요르의 넝마에 검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 냈다. 그러고는 유시엘의 곁으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근처에 모아 놓은 장작에 불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