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크림슨 티어즈 1권(12화)
2. 사교도와 연극(5)
꽝!
이스티아는 테이블을 내려쳤다.
“…….”
벨린은 서서히 일그러지는 이스티아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내려치는 것이 영 좋지 않았다. 뼈를 부딪쳤으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끔찍하게 아플 것이다.
“아으!”
벨린의 예상대로 이스티아는 곧 손을 감싸 쥐며 팔짝팔짝 뛰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이이이이……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스케반니아 최고의 암살자가 실패했다.
아니, 실패한 것도 아니다.
이렇다 할 시도도 못해 보고 당했다.
데바요르에게 의뢰를 했던 사교도의 보고를 들은 이스티아는 황당함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베, 벨린, 넌 데바요르로부터 날 지킬 수 있겠니?”
벨린은 서슴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면에서 맞붙지 않으면 힘들 겁니다. 특히 밤이라면 ‘정수’를 뽑아 내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그에게 찍히면 그냥, 죽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괜히 그가 살왕(殺王)이라 불리던 게 아니죠.”
데바요르는 스케반니아뿐만 아니라 스웰라드 대륙에서도 명성을 따라올 자가 없는 초일류의 암살자다.
어떤 단체에도 속하지 않고, 단신으로 16년 동안 300여 건이 넘는 암살 의뢰를 한 번의 실수 없이 성공해 냈다.
그런 자가 별 볼일 없는 봉신가의 ‘검’에게 죽었다니!
데바요르의 시신과 싸움의 흔적을 확인하고 온 사교도도 못 믿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수리를 관통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고통은 물론, 공격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어야 합니다. 지금 그는 자신이 죽은지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저승에 가서도 ‘내가 여기 왜 있소?’ 이럴 걸요.”
“그런…….”
“그게 아니고서야 관통된 흔적이 그토록 깨끗하게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제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얘, 그럼 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니?”
“밤새 노숙을 한 것 같아요. 이제 막 에카르드 영지에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런 어중간한데서 노숙이라니. 그럼 그 계획은 어떻게 됐고?”
“보고 드렸다시피 우스바이어의 일이 실패했습니다. 제오스도 연행됐다가 막 풀려났죠. 그래도 덕분에 비슷한 시기에 에카르드에 도착할 수는 있었네요.”
“‘검’ 하나밖에 없는 동생도 제법이네. 아니면 죽이지 말라고 했던 탓에 데바요르가 실수라도 한 걸까?”
사실 데바요르 정도 되는 초일류의 암살자라면 시뻘건 대낮이라도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암살이 가능하다.
벨린이 추측한 것을 이야기했다.
“그의 성격으로 미뤄 보면 유시엘만 빼돌리려니 경력에 ‘납치’라는 것을 남기기 싫었을 겁니다. 그래서 대신 체셔 클라인을 죽이려고 했겠죠.”
이스티아는 팔짱을 끼고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네. 데바요르는 자신이 완전무결한 암살자라는 데 자부심이 넘쳤지.”
벨린의 눈동자가 그녀의 모습을 쫓았다. 보고하던 사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벨린의 눈치를 봤다.
“말해도 돼.”
벨린이 귀신같이 그 시선을 읽어 냈다.
“예? 예. 솔렌 백작의 의견입니다만, 현재 에카르드 영지에 남녀 페어로 이루어진 도둑이 돌고 있다 합니다.”
이스티아는 눈을 빛냈다.
“그 소문은 나도 들었어!”
의외로 이스티아는 괴도나 범죄, 그리고 미스터리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에 로망을 품고 있었다.
“그 페어의 인상착의가 두 사람과 비슷하다는 것 같습니다. 흑발의 남성과 금발의 여성이죠. 혐의를 씌워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원래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누명을 씌운다면 발목을 붙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일년전쟁 동안에는 대놓고 미스린토의 성을 쓰지 못한다.
가지고 있는 세력조차 없는 막내라면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이고 말 것이다.
그녀의 ‘검’이 무력을 행사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수배를 내릴 수 있으니 매우 좋은 생각이라 할 수 있었다.
이스티아는 감탄한 듯 얼굴을 환하게 만들었다.
“역시 솔렌 백작도 머리가 비상한 것 같네.”
하지만 보고하던 사내는 뭐가 그렇게 찝찝한지 어렵사리 이스티아를 불렀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부장님…….”
“왜?”
“솔렌 백작이…… 그, 원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좀 오래됐고요. 그 양반 지금껏 조용히 참은 것도 용해요.”
“…….”
이스티아의 안색이 굳어졌다.
에카르드 영지는 활기찬 곳이다. 영지의 주민들은 누구라도 자신이 에카르드의 주민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간다.
영주인 솔렌 백작은 공명정대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다.
그는 항상 민초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여왕에게 표창 하나쯤 받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쉰이 다 된 나이에도 독신을 고집하며 여성을 멀리했다.
그가 남색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의아해 했지만 ‘그런 사람도 있는가 보다.’ 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솔렌 백작.
그는 사교도다.
열신마왕 스웨르크의 이름 아래 무릎을 꿇은 사내다.
인간의 양면성이라는 걸까?
표면적으로는 존경받아 마땅한 ‘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귀족의 교과서 같은 자이지만 그 이면은 어긋난 욕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지부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솔렌 백작은 흰머리가 비치기 시작했지만 혈색이 좋아서 얼굴만 보면 마흔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오! 드디어 오신 건가!”
저택의 경비는 개미 새끼 하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삼엄했다.
심지어 이스티아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조차 알려질 수 없도록 미리 조치를 해 뒀다.
2년 만에 만난 이스티아는 소리안 공작령에 있는 지부에서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긴 흑발은 비단결처럼 고왔다.
거기에 오밀조밀 사랑스러운 이목구비와 늘씬하게 자란 몸매는 또 어떠한가?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티아가 들어서자 솔렌 백작은 아주 절을 할 기세로 그녀를 반겼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복잡했다.
솔렌 백작은 우수한 사교도다.
큰 자금줄이며 충성심만은 그 누구에게도 안 진다.
그런데 문제는 변태라는 거다.
둘만 있어도 걱정이 안 되는 좀 이상한 변태.
그는 여성의 몸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이스티아는 솔렌 백작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억지로 웃는 얼굴을 했다.
“언제 봐도 욕망에 충실한 모습…… 이 보기 좋네요. 오래간만이에요, 솔렌 백작. 건강해 보여서 무엇보다 기뻐요.”
“영광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릇된 욕망이었다.
이스티아에게 다른 용무는 없었다.
이곳에 온 것은 오랜만에 솔렌 백작을 ‘치하’하기 위해서다.
솔렌 백작은 응접실에서 이스티아와 차를 나누며 그간의 안부를 묻고는, 그것이 끝나자 그 누구에게도 출입이 허가되지 않는 자신만의 방으로 이스티아를 안내했다.
이스티아는 한 번이었지만 이곳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솔직하게 다시 들어오긴 싫었지만 ‘이런 선물’이라도 안 한다면 솔렌 백작의 공적을 치하할 방법이 없었다.
돈도 싫어, 여자도 싫어, 귀중품도 싫어…….
‘이곳은 아마도 평생 적응 못할 거야.’
솔렌 백작의 눈이 조급해졌다.
안절부절.
마치 먹이를 코앞에 두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다.
이스티아는 다른 말도 없이 카디건을 벗기 시작했다.
‘딱히 뭐하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이스티아는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벗은 카디건을 솔렌 백작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카디건을 받아 든 솔렌 백작은 아주 절을 해 댔다.
“가, 감사합니다! 열신마왕 만세! 만세! 만만세!”
정말 남이 입던 옷 하나 가지고 이렇게 좋아하는 귀족도 없을 거다.
이스티아는 방 안을 훑어봤다.
지금까지 솔렌 백작에게 하사한 다양한 옷들이 걸려 있다. 얼핏 보면 무슨 전시회 같다. 심지어 ‘내가 저런 것은 언제 입었지?’라고 생각이 드는 옷도 있다.
‘정말 이 사람의 머리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어.’
이스티아는 아주 측은하다는 눈으로 솔렌 백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솔렌 백작은 그런 눈빛이야 어쨌든 이스티아의 카디건을 얼굴에 비벼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아직 온기가…….”
사람의 취향이니 차마 뭐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뭐라 하기에는 솔렌 백작의 충성심과 공로가 너무도 컸다.
“……솔렌 백작.”
“예, 지부장님.”
이스티아의 눈에는 당최 이 인간이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취향이 별난 우수한 ‘생물’이었다.
“배웅은 됐어요.”
이스티아가 배려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홀로 방에 남게 된 솔렌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그간 참아 왔던 욕정을 폭발시켰다.
저택을 나서려던 이스티아의 앞에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인 평범한 사내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이스티아의 얼굴에 반가움이 비칠 정도로 잘 아는 사이였다.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에요, 지부장님.”
그의 시선이 민소매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는 이스티아의 옷차림으로 향했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살결이 눈부시다.
물론 그는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해 내고는 인사 뒤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스티아는 맨살을 드러내는 것을 안 좋아했다. 지부에 함께 있을 때 그녀는 한 여름에도 항상 뭔가를 걸치고 다녔다.
당연히 스커트 같은 것은 죽어도 입기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민소매 셔츠다.
덤으로 솔렌 백작은 이스티아의 옷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변태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머릿속에서 재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양반도 참…….’
이스티아는 두 팔을 벌리면서 안아 줄 기세로 다가갔다.
“와! 라즈린 아니야?! 지부를 떠나고 처음이네! 진짜 오랜만이다. 중요한 보고야? 왜 직접 왔니?”
“지부장님 얼굴 보려고요. 보고는 그냥 상시 보고죠.”
오래간만에 만난 이스티아를 바라보는 라즈린의 눈빛에는 친동생을 보는 것 같은 정이 있었다.
‘여전히 웃고 계시는구나.’
어린 나이에 미스린토라는 죽음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웃음을 잃어버린 채로 도망쳐 왔던 작은 소녀가 바로 이스티아다.
다행히도 그녀는 흑마법이나 주술에 대한 재능도 있었고, 사교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악마들과도 상성이 좋아서 금방 사교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웃기 시작했다.
과거를 부정하듯 웃었다.
지금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 시절부터 함께했던 자신이나 죠런은 이스티아의 그 웃음이 과거를 지우기 위한 고통스러운 웃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저 어린아이 같은 행동도, 천진난만한 웃음도 말이다.
라즈린과 죠런은 이스티아가 사교에 왔을 때부터 함께 생활했다.
지부장이 됐을 때는 바로 곁에서 보좌까지 했다.
하지만 죠런은 페라넨의 벤검으로 이사를 갔고, 라즈린은 결혼 때문에 이곳으로 오면서 헤어지게 됐다.
“일단 보고할게요. 에카르드 영지에 들어선 유시엘과 ‘검’은 여관에 투숙 중이래요. 그리고 ‘페어 도둑’의 몽타주를 곳곳에 붙이고 있는데, 실행은 언제로 할까요?”
“제오스는 뭘 하고 있데?”
“지시하신 대로 기사로 위장해서 순찰 중이랍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병력을 끌고 연행할 수 있어요.”
이스티아는 기분 좋게 팔짱을 꼈다.
“좋아! 대신 결코 서두르지 마. 억지로 떼어 놓으려면 반드시 들켜. 먼저 상황을 설명하고 최대한 협조를 구해. 그리고 정말 확실하다 싶으면 그때 실행하고.”
말을 마친 이스티아는 뭔가 생각난 듯, 양손으로 라즈린의 어깨를 꽉 잡고는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재차 말하는데, 명심해! ‘검’은 어떤 방법을 써서든 죽여도 되지만 동생은 아니야! 반드시 생포해야 돼! 반드시 생포해야 돼! 중요해서 두 번 말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