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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13화)
2. 사교도와 연극(6)
“아가씨, 역시 몸이…….”
이번에는 유시엘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말을 타는 것이 힘들다곤 하나, 두 번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정신을 놓아 버리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깨어 있을 때는 피로가 느껴지긴 했어도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쉬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졌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으!”
유시엘은 태어나서 대부분을 저택 내에서만 보냈다.
승마에 취미를 붙인 것도 일년전쟁을 위해서였지만 그것도 일주일에 두어 번 탔을 뿐이다.
즉, 체력을 기를 만한 무언가를 전혀 하지 않았다.
15살 때는 조금 돌아다니긴 했지만 참 편하게 돌아다녔다.
그게 끝.
사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머리를 더 써야 했다.
살아남기 위한 사고를…….
머릿속에는 어디에 던져 놔도 살아남을 계획이 그려져 있다 쳐도, 체력 안 되는 17살 계집이어서야, 그 머리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다.
유시엘은 정작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고작 며칠이다. 참고 달려도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뻗었다.
지금도 겉으론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체셔에게 얼굴을 드는 것도 민망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오죽하겠는가?
유시엘은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이토록 몸이 약할 줄은 몰랐다.”
언니들과 치고 박고 싸워도 항상 승리를 거머쥐었으니 나약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게다가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으니 힘들 일도 없고, 당연히 단련이 되어 있지도 않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체셔가 나서서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소.”
문 밖에는 기사 한 명과 귀족들이 데리고 있는 자들로 보이는 체인을 덧댄 가죽갑옷으로 무장한 병사 둘이 있었다.
기사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종이 한 장을 펼쳤다.
“신분증을 보여 줄 수 있겠소이까?”
체셔의 한쪽 아미가 꿈틀거렸다. 기사가 내민 것은 몽타주였다.
유시엘과 자신…….
아니, 특징이 비슷하긴 하지만 어딘가 매치되지 않는 몽타주.
체셔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이들은 누굽니까?”
“일 주 전부터 이곳 에카르드에 남녀 페어의 도둑이 들어왔소. 귀족가의 재물을 훔쳐 내곤 하는데 정말 약삭빠르다오. 그런데 마침 여관에서 비슷한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을 봤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말이오.”
그렇게 말한 기사는 고개를 들어 체셔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유시엘을 쳐다봤다.
“저 금발이며…….”
“신분증입니다.”
체셔가 불쾌한 기색을 표하며 신분증을 내밀었다. 신분증을 받아 든 기사가 잔뜩 의심이 서린 눈을 했다.
“에카르드의 주민이 아니구려. 언제 오셨소?”
“두 시간도 안 된 것 같습니다.”
기사가 신분증과 몽타주를 번갈아 보고 있을 때였다.
“아!”
유시엘이 갑자기 놀라는 소리를 냈다.
또르르르.
창밖에서 날아 들어온 듯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진 것은 새끼손톱만 한 ‘진주알’이었다.
“엇?!”
기사도 당연히 누군가 던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얼굴에 노기를 담으면서 버럭 소리쳤다.
“그, 저건! 에잉, 역시 이놈들이었군! 잡아라!”
“아니, 이건!”
당황한 유시엘이 말을 더듬었다. 안으로 들이닥친 기사와 병사를 보는 체셔의 얼굴에도 낭패의 빛이 어렸다.
“기다리세요! 뭔가 오해가…….”
“오해는 무슨! 그럼 저 보석은 무엇이냐!”
체셔는 유시엘을 돌아봤다.
창밖에서 날아왔다?
말하기도 민망하고 구차한 변명이다.
‘당했다!’
누군가의 함정이 분명하다.
정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우스바이어에서 잘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이없는 함정에 걸려들다니 방심했던 걸까?
적은 누군가? 역시 사교도인가?!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은 장로회가 직접 결정한 근신 처분 중이다. ‘어떤 행동도’라고 했으니 그 두 사람이 무언가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의 성격이라면 이렇게 어쭙잖은 짓은 안 한다.
“아가씨!”
체셔도 우스바이어에서 들었던 유시엘의 ‘경고’ 탓에 무력을 쓰지 않고 그들을 막아 내는 것이 힘든 듯했다.
여기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얌전히 연행되서 오해를 푸는 것과 여기서 이들을 죽이고 도망치는 것.
하지만 어느 쪽이든 위험하다.
이곳의 영주 솔렌 백작은 어떤가?
그가 사교도일 가능성은 낮다.
조건을 걸어서 체셔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오해는 풀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자신들이 잡혀 있을 때 그 페어가 나타나면 알리바이가 성립된다.
적은 사교도일 것이다. 대놓고 소란을 못 피우니 이렇게 소극적인 방법으로 함정에 빠트리려는 것이다.
적의 약점은 이쪽의 이점이다.
이들이 정말 사교도인지 확인만 된다면 돌파구는 있다.
생각을 정리한 유시엘이 외쳤다.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체셔와 실랑이를 벌이던 기사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시엘을 노려봤다.
“얌전히 연행되겠다. 하지만 그와 난 사정이 있어서 떨어질 수 없다. 우리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그 페어가 나타난다면 알리바이가 성립되는 거겠지?”
기사는 검을 내리며 대답했다.
“흠! 얌전히 연행된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역시 이들 또한 사교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 페어도 자신들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일부러 만든 존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만약 저 기사가 제안을 듣고 역정을 냈다면 유시엘은 일단 연행에 응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자신들은 범법자다.
눈앞에서 증거를 목격하고 역정을 냈는데 뒤늦게 자비를 베풀 리가 없었다. 그는 기사의 기본적 도리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어떻게든 자신들을 붙잡으려는 이스티아의 수작이 분명했다. 감옥에 가두어 두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굽거나 삶을 수 있으니까.
“체셔.”
“예!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가씨.”
유시엘은 창문의 커튼을 치면서 말했다.
“조용히 베라.”
그 지시를 들은 기사와 병사들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둥실.
체셔와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는 머리통이 백색 섬광과 함께 하늘을 날아가는 경험을 했다.
물론 그것은 죽음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겪는 소중한 경험이다.
퓨슈!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센 핏줄기가 천장을 때렸다.
챙! 처척!
다른 병사 둘도 검을 뽑아 들었지만 체셔는 이미 다른 한 명의 미간에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꺼어억……!”
정말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이었다. 살아남은 병사는 눈 한 번 깜빡 할 새에 두 명이 고인이 되어 버리자, 공포보다 황당함이 앞서는 듯했다.
“으, 으으으!”
하지만 그 황당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힘차게 뽑아 든 검을 쥔 손에서는 힘이 풀리고 눈빛도 비굴해졌다. 그에겐 허공을 수놓는 핏줄기 사이로 비치는 체셔의 무심한 표정이 사신의 얼굴처럼 보였다.
“사, 살려…….”
그는 축축하게 젖기 시작한 바짓가랑이를 오므리고 처량하게 올려다봤다. 체셔가 그를 처리하려는 찰나, 유시엘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대화를 요구하는 유시엘의 태도에 병사의 눈에는 희망의 빛이 어렸다.
“너희는 사교도인가?”
“그, 그렇…….”
“혹시 영주인 솔렌 백작도 사교도인가?”
그는 행여나 유시엘이 못 들을까 봐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사, 사교도입니다.”
유시엘은 이마를 짚었다.
존경받던 솔렌 백작이 사교도라니…….
시민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게다가 영주가 사교도라면 이 영지에 있는 기사나 병사들도 대부분 사교도일 가능성이 높다. 그 말인즉, 우스바이어 영지처럼 요행으로 빠져나가기는 힘들다는 말.
“솔직하게 대답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주도록 하지.”
“그,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하지만 유시엘은 이미 체셔에게 눈짓으로 명령을 내린 후였다.
“죽을 것이다.”
푹!
체셔의 검이 그의 미간을 파고들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는, 구하……!”
하지만 미간에 박혀 있던 체셔의 검이 뽑혀 나옴과 동시에 의식도 사라지고 말았다.
“아가씨.”
체셔는 커튼 사이로 바깥의 상황을 확인하고 있는 유시엘을 바라봤다.
일이 이렇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유시엘의 모습은 여느 때와 같이 여유롭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최악의 상황임에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유시엘이 대답했다.
“이 영지에는 사교도가 많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도 있지. 그들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는데 성공했지만, 시민들의 시선까지 챙겨야 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이 소란이 신고로 이어질 경우, 사교도로 인한 문제가 불거지게 되는 것이다.”
유시엘의 말대로 바깥에서는 사교도로 추정되는 병력이 몰려드는 시민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기사부터 병사들까지 잔뜩 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동해 있었다.
“그러니까, 체셔여.”
“예, 아가씨.”
“소극적인 대응은 그들이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큰 사건으로 만들도록 해라.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결국 작은 사건으로 묻히게 될 것이다.”
유시엘은 바닥을 구르고 있는 기사의 머리통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본 체셔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여성이라면 시신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감이 있을 법한데도 유시엘은 오히려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것이 이 사건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촤악!
유시엘은 커튼을 젖히더니 사교도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향해 기사의 머리를 내던졌다.
“저, 저거……!”
“으아악! 저건 사, 사람의 머리잖아!!”
시민들과 사교도들은 여관 창문에서 던져진 것이 사람의 머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신음을 삼켰다. 덕분에 사교도 병사들도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무, 물러서랏!!”
“방해하면 연행하겠다!”
삐익! 삐익!
흩어져 있던 병사들도 여관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 마구간에 있던 말부터 모조리 끌고 가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단부터 없애려는 것이다.
‘미친 건가?’
제오스는 그 둘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커튼을 치기에 뭔 일인가 싶었는데 그들을 죽여 버린 모양이다.
아무리 사교도의 술수라는 것을 눈치챘다고 해도 살인은 무모한 선택지다. 지금부터 수배를 받으면 왈케르나 번드까지 도착할 수 없다.
아니, 간다고 해도 그 사실이 이스리아 국교회에 이야기가 들어가면 출입할 수 없다.
곧이어 유시엘이 여관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사교도들은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와! 진짜 예쁘긴 예쁘네. 아주 빛이 나는구먼!’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저 정도의 미모와 오연한 눈빛을 갖춘 소녀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응?”
“어?”
유시엘을 바라보던 그들의 눈에 이내 의아함이 비쳤다. 그녀는 무슨 생각인지 ‘검’도 동행하지 않고 홀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여기 모인 기사와 병사들이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 태도이지 않은가.
“무슨…….”
작위 기사가 둘에 소집 기사가 서른이다. 거기에 경비병 포함 병사들까지 하면 무려 백여 명이 몰려 있는 셈이다.
그것뿐인가?
다른 사교도들도 용병인 척하며 한 건 노리고자 칼과 활을 빼 들고 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 잡아라!”
말이 ‘잡아라!’였다. 달려드는 병사들의 손엔 ‘검’을 상대할 생각으로 시퍼런 롱소드가 한 자루씩 쥐어져 있었다.
‘쩝!’
만약 붙잡는다면 저 가녀린 몸을 원 없이 품어 보고 싶었지만 한낱 말단인 자신은 그저 마음껏 그녀를 범해 보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응?’
하지만 그런 상상이 그가 현세에서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 되고 말았다.
죽기 전까지 추잡한 생각을 했으니 지옥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으리라.
유시엘의 뒤엔 어느새 ‘검’이 따르고 있었다. 달려들던 병사들은 갑자기 목이 떨어져 나간 동료를 보면서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믿기 싫은 끔찍한 현실을 직감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자신의 몸은 토막토막 잘려서 무너질 것이다. 몸 곳곳을 스치던 가느다란 통증이 뒤늦게 그것을 속삭여 왔다.
넌 이미 죽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