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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14화)
2. 사교도와 연극(7)
“살…….”
어차피 죽을 것이지만, 말을 꺼낸 것이 몇 초 안 남았던 그의 명줄을 더욱 단축시키고 말았다. 입을 연 병사의 몸이 어깨부터 하반신까지 나뉘면서 무너졌다.
“히익!”
함께 달려들었던 병사도 비명과 함께 목에서 머리가 굴러떨어지더니 피분수를 뿜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광경을 보며 절망을 곱씹던 병사도 눈을 질끈 감으며 죽음을 각오했다.
‘정말 주마등이라는 게 있었구나…….’
살아오며 겪었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헉?”
아니?!
살았다!
살아난 것이다.
운이 좋았다!
잘리지 않았다!
조용히 떠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여기서 무사히 살아 돌아간다면 집에 가서 예쁜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품에 꼭 안아 볼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사교에 몸을 담지…….
쩍!
서너 걸음을 도망치던 그의 몸이 갑자기 정수리부터 영 좋지 않은 곳까지 절반으로 갈라졌다.
“고, 공격! 서둘러라!”
그 믿지 못할 광경에 로드 나이트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도 유시엘의 적반하장 같은 대응이 당황스러웠다.
애초에 절도죄를 뒤집어씌워서 처리해야 했는데, 왜 이들은 국법에 반하는 살인사건을 일으켜서 일을 크게 만들고 있단 말인가?!
“하, 하지만!”
로드 나이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동료들이 어이없이 죽는 광경을 본 후라, 신음만 흘리며 쉬이 발을 떨어트리지 못했다.
“으, 으으……!”
“가라! 숫자를 당해 낼 수는 없다!”
소집 기사들이 먼저 겁먹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병장기를 꺼내 들고 체셔를 향해 달렸다.
“우, 우아아아아!”
하지만 그들에게도 앞서 죽은 병사들의 모습이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지르는 함성 역시 들으면 기운이 빠질 만큼 처절했다.
무수히 많은 무기들이 체셔를 향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유시엘을 낚아채려는 손이 뻗어 왔다.
바람이 일었다.
체셔에게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향기를 담은 바람이었다.
유시엘에게는 뺨을 간질이는 기분 좋은 바람.
하지만 적들에게 그 바람은 달랐다.
바람이 느껴진다 싶으면 의식이 사라졌다.
사신의 바람.
바람이 혼을 거둬 간다.
그 혼조차도 자신이 거둬진 것을 모르고 있다.
“으, 으아아!”
“끄아아악!”
파죽지세라는 말이 무색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체셔의 검에서 만들어지는 쾌속의 검식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며 인간의 혼을 차곡차곡 거두고 있었다.
비명 소리.
시체가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
핏물이 바닥에 쏟아지는 소리.
하나하나가 죽음을 이루는 소리였다.
소집 기사들과 병사들은 공포로 인해 미쳐 갔다.
로드 나이트의 명령과 자신 있게 읊었던 선서문만 아니라면 검을 내던지고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도망이라도 쳐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공포로 인해 몸과 정신이 따로 놀았다.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만 앞서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죽어 버렸다.
유시엘은 고작 열 걸음 정도를 걸었다.
그런데 이미 거리는 시산혈해를 이루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던 병사와 소집 기사들은 동료의 몸뚱이를 밟고 넘어지기도 했으며, 유시엘의 앞길을 막기도 했다.
하지만 유시엘은 걸었다.
밟히는 것은 오직 그들이 흘린 핏물뿐이다.
시체가 되어서도 유시엘의 걸음을 막지 못했으니, 살아 있는 인간이 무슨 수로 유시엘의 걸음을 막을까?
“무, 물러낫!”
보다 못한 로드 나이트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싸우던 자들은 눈에 촛점을 잃고 검을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오스는 미칠 것 같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이스티아의 실수다.
유시엘의 ‘검’을 너무 우습게 봤다.
체셔 클라인은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하늘밖에 있는 존재였다. 이 세상의 누구라도 저 ‘검’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인간이라면 정말 이럴 수 없지 않은가!
사실 제오스는 그가 데바요르를 죽였다는 소릴 들었을 때만 했어도 무슨 요행이 있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확실하게 알겠다.
요행이 아니다!
이제는 당시에 데바요르가 열 명이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리온 아스발란?
웃기는 소리하네!
리온 아스발란은 봉신가 최고의 ‘검’이긴 해도 ‘인간’이다.
하지만 저 ‘검’은 인간을 가장한 괴물이다. 아니, 반드시 괴물이어야 했다.
유시엘이 어두운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아닌, 불특정 다수를 비웃고 있었다.
“‘사교도’의 머리에서 나온 이런 하찮은 연극이 내게 통할 것 같았나?”
그녀의 석류 속처럼 붉은 눈동자가 주저앉은 채로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씩씩대는 병사를 향했다.
“힉힉대는 소리가 시끄럽군.”
체셔가 무표정으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어 올렸다.
눈빛만 봐도 아가씨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으니 머리를 몸에서 분리하겠다는 의지가 다분히 비쳤다.
“끅!”
그 병사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코로 숨이 새어 나온다.
들썩! 들썩!
스스로 질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는 육체의 기본적인 생존 욕구마저 억눌렀다.
입을 틀어막던 병사는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결국 스스로 눈을 까뒤집고 혼절하고 말았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만 들릴 뿐,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체셔가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 없어졌습니다.”
먼 옛날에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이러했을까…….
유시엘의 눈이 불쾌함으로 얼룩지는 순간, 병사들과 경비대, 그리고 기사 할 것 없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 방향으로 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엥?”
그 길의 끝에는 병사 하나가 유시엘과 체셔의 말을 붙잡은 채로 갑작스런 상황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때였다.
“쏴라!”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건물 옥상 같은 곳에 대기하고 있던 사교도들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일제히 화살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헉! 저 미친놈들이!”
제오스는 겨우 상황이 끝나나 싶어서 안심했는데, 또다시 기름을 들이붓는 정신 나간 천둥벌거숭이들을 보며 경악성을 내뱉었다.
자칫하면 유시엘이 화살에 맞게 생겼다!
살펴보니 발사 명령을 내린 것은 사제 대리 ‘제레미’였다.
이스티아의 눈에 들기 위해 같은 사교도의 뒤통수를 치기도 하는 그 골칫덩이가 또 사고를 친 것이다.
‘간부가 된 것이 이상할 정도로 무능한 녀석이 결국 또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지르네!’
수백 개의 화살이, 건기의 메뚜기 떼처럼 날아들었다. 화살 중 일부는 잘못 쏘아져서 부상을 입고 있거나 멀쩡한 아군을 노리기도 했다.
그 사이에 제오스는 유시엘의 눈치를 살폈다.
‘허, 허세가 아니었어!’
제오스는 유시엘이 저렇게 오연하게 있는 것도 허세라 생각했다.
상황을 보라!
수백 개의 화살이 새까맣게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도 모든 화살을 막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화살 따위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말을 향해 걷고 있었다.
스사사사삭!
체셔의 검이 허공을 매섭게 그었다. 실로 놀라운 움직이다.
팔은 흐릿하게 하얀 옷의 잔상만 보일 뿐이고, 검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사광십이검의 몽상월인(夢想月刃)이다.
마치 꿈속의 한 장면이라 생각될 만큼 수십, 수백 개의 아름다운 푸른빛을 머금은 검기들이 실타래 풀리듯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나가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투바바바바박!
날아들던 화살은 모두 못 쓰는 나무 조각과 쇳덩이로 변하며 비산했다. 그 파편들은 모여 있는 병사들의 몸에 자잘한 상처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우수수수수…….
누구도 감히 신음 소리를 내지 못했다.
멀리서 이 참사를 지켜보던 시민들조차 전율스런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들의 머릿속엔 유시엘이 했던 ‘사교도’ 라는 말과 정체불명의 검사에 대한 것으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나, 난 아무것도 못 봤어!”
몇몇은 괜히 여기 있다가 행여나 관련될까 싶어서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털썩!
그리고 누군가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사교도들은 발이 얼어붙은 것 마냥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자.”
체셔와 유시엘이 말을 타고 떠날 때까지도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교도들은 허공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뒤에 누군가가 질린 듯 중얼거렸다.
“이, 인간이 아니야…….”
3. 대수도원으로(1)
이스티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딱 벌어졌다.
제오스가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체셔 클라인…….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마흔 구가 넘는 시체들의 절단면은 마치 치즈를 자른 것처럼 매끈했다.
부상당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이스티아도 제오스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납득되었다.
“진짜 잘렸는지도 몰랐어요. 칼을 휘두르려고 하는데 팔이 없더라고요. 저기 나자빠져 있는 베네탄은 머리도 없이 한참을 뛰어다녔고요.”
사제 대리 제레미의 명령에 화살을 쐈던 사교도도 떨리는 목소리로 그 말을 거들었다.
“사제 대리는 뼈다귀도 추리지 못하게 진짜 싸움 맛이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를 거드는 사교도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려 백여 명이 동시에 화살을 쐈는데도…….”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저희는 화살을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쏘아 낸 검기 다발에 우리의 화살이 박살나고, 연이어 그 파편에 병사들이…….”
제오스는 화살이라는 말에 찔끔하며 이스티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끝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폭풍의 전야…….
결국 한참 뒤에 이스티아가 반달눈을 하고 소리쳤다.
“너희들…… 혹시 단체로 짜고 나 엿 먹이려는 거야? 그리고 화살을 쐈다고? 내 부탁은 코로 들었냐! 라즈린! 라즈린 어디 갔어?! 야, 제오스! 넌 눈 뜨고 잤어?!”
제오스는 방방 뛰는 이스티아를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그 광경을 눈앞에서 봤지만 아직 못 믿겠어요. 지부장님 말씀처럼 차라리 연극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살은 라즈린이나 저도 몰랐습니다. 갑자기 제레미 그 자식이…….”
“제레미가? 으이구! 내가 못 살아!”
이스티아는 씩씩거리며 벨린을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