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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15화)
3. 대수도원으로(2)
“벨린!”
시체를 살펴보던 벨린이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어느 정도인데?”
“실로 엄청난 쾌검입니다. 만약 이렇게 당했다면 이들의 말처럼 잘렸는지도 모를 겁니다. 데바요르가 괜히 그렇게 당한 것이 아니었어요.”
제오스는 이스티아가 신임하는 신도이긴 해도 벨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나마 아는 것이라곤 사교의 정수를 어렸을 때부터 몸에 담았다는 것 정도일까.
이스티아가 주눅 들어 있는 제오스에게 물었다.
“그럼 놓친 거지?”
“만약 쫓아갔다면 전멸이었습니다. 대신 소식을 들은 솔렌 백작이 무언가 수를 쓴 것 같습니다만, 지금 상황으로 보면 딱히 기대도 되지 않는군요.”
이스티아는 다시 한 번 궁금증이 치고 올라왔다.
‘대체 그 6개월이라는 말이 뭘까?’
유시엘이 선포한 6개월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왈케르나 번드에 도착할 수도 없을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번이나 함정을 피한 유시엘과 체셔의 능력을 보면 이젠 그것도 간과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어렸을 적의 동생은…… 이제 없는 걸까?’
이스티아는 입맛이 썼다.
그리고 옆에서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제오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번 일은 아무래도 유시엘이 머리를 제대로 쓴 것 같다.
‘동생이 우리의 약점을 제대로 알고 있었구나.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과감히 일을 저지를 리가 없지. 일년전쟁이고 뭐고, 이런 사건이면 군부에서 나선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발상의…… 스케일에서 진 거야.’
사교는 세간과 국교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유시엘은 그것을 이점으로 이용했다.
하여튼 놀랍다.
선포식 이후에 보인 그 자신감도 이제는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녀는 다양한 상황을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계획했을 것이다.
앞으론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것 같다.
“제오스, 넌 유시엘의 6개월이 뭐라고 생각하니?”
제오스는 기운 빠진 얼굴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뭐, 그 ‘검’이 유시엘이라는 방해물 없이 홀로 다른 자매들을 싹 다 베어 버리는 기간이겠죠.”
두 사람은 동시에 침묵했다.
그리고 뒤늦게 놀란 것은 제오스였다.
말실수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충격 때문이었다.
이스티아의 목소리가 격양됐다.
“그, 그런 건 불가능해!”
하지만 제오스는 체셔의 신위를 눈앞에서 목격했던 터라 차마 긍정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지리라.
이스티아는 계속 추격을 해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든 따로 붙잡아서 목숨을 붙여 주고 싶은 마음에 이 어이없는 난리를 피웠는데, 시체만 되돌아오니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다고 일년전쟁 중인데, ‘살려 줄 테니 이쪽으로 와라!’라고 해도 유시엘이 믿을 리가 없었다.
‘그냥 6개월 동안 내버려 둘까……. 언니들은 무슨 이유인지 근신 당했다던데.’
이대로 추격해 봐야 돌아오는 것은 시체뿐이다.
하지만 6개월 후라면 다른 언니들이 유시엘을 노리게 된다.
그럼 동생을 구해 내기 힘들다.
어쩌면 이쪽이 노려지면서 동생에게 신경을 못 쓰게 될 수도 있다.
이스티아는 결정을 내렸다.
“신고만 하고 우린 유시엘이 왈케르나 번드에 들어가게 두자. 다른 세력을 쓴다고 해도 손해만 볼 것 같아. 운이 좋다면 수배를 받은 국교회에서 대신 잡아 주겠지.”
이스티아는 몇 초 정도 머릿속을 정리하고 말했다.
“그럼 일단……. 좀 힘들겠지만 목격자들 입을 최대한 막아 보고, 시체들 잘 처리해. 신고 내용은 살인죄가 아닌 여기 페어 도둑으로 간주해서 ‘절도’로 해 놓고. 여기 시끄러워져 봐야 우리한테 좋을 거 하나 없다, 알지?”
“알겠습니다.”
이스티아는 당장 유시엘을 붙잡는 것을 포기했다.
고로, 이젠 유시엘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해야 했다. 바로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이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첫째와 둘째 언니가 근신 당했다고 했잖아? 그럼 둘이 모종의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높아. 아마도 우리 사교도가 걸림돌이라 여기겠지. 그러니까 이쪽에서 선수를 쳐야 돼.”
서로가 서로를 모른다.
이스티아는 어렸을 때 집을 나갔으니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을 겪어 보지 못했다.
그러니 둘의 생각이나 성격을 짐작할 수 없다.
에틸랑쥬와 이실리엔도 마찬가지다.
이스티아의 생각과 성격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그녀들의 세력에 사교도라는 세작을 둔 이스티아다.
언니들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유시엘은 근신 당하면서 놓쳐 버렸다. 그럼 이젠 서로가 가장 귀찮다고 여기는 사교의 수장 이스티아를 무너트릴 필요가 있다고 입을 맞출 것이다.
‘문제없어.’
에틸랑쥬와 달리, 이실리엔은 ‘이면의 몬스터’라는 양날의 검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밝혀 버린 것은 지나친 무리수였다.
파급력은 좋았지만 패널티가 더 크다.
소문을 조금 건드리면 이실리엔의 발목은 다시 붙잡을 수 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도록 손을 써 놨다.
정말 무서운 것은 에틸랑쥬의 바하누스 결사대다.
그 수가 일천 명이다.
거기에 그들 대부분이 봉신가의 ‘검’처럼 특별한 무술과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에틸랑쥬가 가진 세력도 사교도 세작으로 밝혀진 것만 총 70개가 넘는다.
총력전이 되면 여왕국이 발칵 뒤집어질 규모다.
압실란에만 해도 서른 곳 가까이 된다.
사교도가 아무리 많이 숨어들었다고 해도 에틸랑쥬의 세력이 윗선을 쥐어 잡고 있어서는 크게 힘을 못 쓴다.
테러가 아닌 이상에야 견제밖에 안 된다.
“정보를 흘려.”
이스티아가 중얼거리자 제오스가 머리를 숙였다.
“언니들이 등장하면 세작을 시켜서 이실리엔 언니에게 에틸랑쥬 언니가 가진 세력을 보고하도록 해. 둘이 손을 잡는 것을 이용해서 이실리엔 언니가 먼저 에틸랑쥬 언니를 배신하게 만들자. 나도 이실리엔 언니를 구슬릴 말을 좀 만들어 봐야겠어.”
그 둘도 영원한 동맹이 될 수 없다.
일년전쟁의 승자는 오직 한 명.
이스티아라는 공통된 적을 처치하는 순간 둘은 서로가 적이 된다.
“알겠습니다.”
***
솔렌 백작은 이스티아의 작전이 실패했다는 소리를 접하고는 기병대와 함께 유시엘과 ‘검’의 뒤를 따랐다.
그의 뒤로는 기병대와 사교의 주술사 둘, 그리고 재물이 될 동남동녀가 있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이 일이 성공으로 끝나면 얻게 될 ‘보상’을 상상하느라 징그러울 만치 번들거렸다.
이스티아 지부장님의 체온과 체취가 남아 있는 그것을 떠올리자 또다시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아무리 괴물 같은 녀석이라도 진짜 괴물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지, 흐흐흐! 내가 그 막내 년을 붙잡으면 지부장님께선 이번에 무엇을 주실까?’
지부장님의 몸엔 흥미 없다.
아니, 그녀는 감히 음욕조차 품어서는 안 되는 성체이시다.
위대한 열신마왕의 대리인이시며, 무엇보다 아름다운 그녀는 고결한 모습 그대로, 영원히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해야만 한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자신은 언제나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고결한 존재로!
하지만 그 성체를 감싸던 의복에 음욕을 품는 배덕감이야말로 솔렌 백작이 느끼는 가장 큰 쾌락이었다.
빼에엑!
창공을 가르던 매 한 마리가 날카로운 울음을 토했다.
“따라잡았습니다!”
그 매는 사교의 주술로 길들여진 ‘눈’이다.
멀리 말을 타고 도망치는 유시엘과 그녀의 ‘검’을 발견한 것이다.
“좋다! 방향은?”
매와 심령이 이어진 주술사 호코스가 대답했다.
“이제 막 우측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이스나 대운하를 타고 달릴 생각인 것 같습니다! 거리상으로는 약 반 시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솔렌 백작은 혀를 찼다.
벌써 반 시간이나 떨어져 있다.
유시엘과 체셔와는 반대로 솔렌 백작 일행은 다섯 명의 어린이와 기병대까지 몰려가고 있다.
거리는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운에 맡기며 쫓아가길 한 시간쯤 더 되었을까.
호코스가 반색을 하며 외쳤다.
“멈췄습니다!”
유시엘은 지난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침에는 뭐라도 먹으려 했으나, 사교도들이 덤벼드는 탓에 배고픈 내색도 못하고 굶어야 했다. 게다가 체셔가 만들어 낸 시산혈해를 바로 앞에서 지켜봤다.
유시엘이 아무리 독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 해도, 무슨 피에 미친 마녀가 아니고서야 그런 일을 겪고 ‘육포’ 같은 것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파릇파릇한 이스나 평원의 경치를 보니 식욕이 되살아났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체셔는 우수한 검이다.
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곧바로 캐치해서 번거로운 일을 만들지 않는다.
유시엘의 시선이 체셔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체셔가 13년 동안 애지중지해 왔던 낡은 검이 걸려 있었다.
그 검은 체셔의 아버지가 직접 제작한 검이다.
딱히 뛰어날 것도 없는 그냥 그저 그런 검.
‘역시 거절했던 걸까.’
유시엘은 알킨 클라인을 안다.
본가의 여식이라서 아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다.
사실 유시엘이 클라인 가문을 택한 것은 언니들 탓에 마지못한 선택이 아니었다. 알킨이 자신의 아들을 ‘검’으로 써 달라고 자신했기에 믿었다.
유시엘은 15살 무렵에 왈케르나 번드에 땅을 얻고, 그것으로 국교회를 이용하기 위해 유물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 와중에 검 한 자루를 발견했다.
약 200년 전, 이스리아 국교회가 사교의 마녀를 재판하는데 사용했던 집법검인 ‘에밀라 스우치’의 성검이었다.
13대의 성녀들이 남긴 유품을 품고 있어서 강력한 파사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이스리아의 정의’라 불리던 고결한 성검.
하지만 에밀라 스우치는 마녀에 대한 그릇된 증오심으로 그 성검을 사용했다.
그의 손에 죽어 나간 마녀와 오인 받아서 무고하게 죽은 처녀들의 수가 물경 천을 넘었다고 했다.
그 결과, ‘이스리아의 정의’라는 이름을 가진 성검은 에밀라 스우치의 죄와 수많은 마녀들의 어둠을 뒤집어써서 끔찍한 마검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성검이 마검으로 변하며 가지게 된 그릇된 힘에 눈독을 들인 국교회는 그 검을 다뤄 보려 했다.
한데, 누구든 그 검을 들면 심장을 찔러 자살했다.
마녀와 무고한 처녀들의 심장을 꿰뚫었던 것처럼.
심지어 검의 주인이었던 에밀라 스우치도 스스로 심장을 찔렀다.
마녀심판에 사용되었던 집법검이 품게 된 마성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것이다.
유시엘은 그 마검을 찾아서 알킨에게 보냈다.
봉신가의 능력이라면 마성을 억누르고 그 힘을 이끌어 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알킨은 정의로운 자였다.
유시엘도 내심 그가 사악한 마물에 의지하진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어쩌면 유시엘 나름대로의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미묘한 의심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몰래 체셔가 수련하는 것을 살펴봐도 그 검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그런 것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겠지.’
지금까지 체셔가 보여 준 ‘검’으로서의 실력은 유시엘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대미문!
‘검’이 얼마나 강한지 그 기준을 잘 모르는 유시엘도 체셔의 강함이 상리를 벗어났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