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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16화)
3. 대수도원으로(3)


“아가씨?”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유시엘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육포 스튜가 놓였다.
유시엘은 아련한 표정을 지우고 대답했다.
“수고했다.”
유시엘이 체셔의 앞에 나타났던 것은 단 한 번뿐이었지만 알킨과는 자주 만나 왔다.
삭막한 미스린토의 생활에서 만난 알킨 클라인은 심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자 편한 대화 상대였다.
유시엘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곤 ‘검’뿐이었다.
언니들의 그늘에 가려 무엇 하나 가지질 못했으니, 미스린토의 기본적인 ‘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봉신가의 ‘검’을 쓸 수 있다는 기본적인 권리…….
어쩌면 그것은 맹신일 수도 있었다.
아니, 유시엘이 처한 현실에선 맹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클라인 가문은 봉신가 중에서 가장 덜떨어진 곳으로 인식 받고 있었다.
크기도 작고, 가끔 봉신가 자제들 간에 이뤄지는 대련에서는 늘 끝자락에 머물렀다.
그래도 유시엘은 믿어야 했다. 클라인가의 ‘검’이 아니면 자신은 저항도 못해 보고 죽을 테니까.
선포식, 단상에 섰을 때도 유시엘은 왈케르나 번드에 도착하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라고 각오했다.
그리고 죽어도 당당하게 죽고자 했다. 필사적으로 사고하고 구상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체셔는 잘해 주었다. 자신을 지켜 주었다. 내색은 잘 못하겠지만 속으론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애정을 담아서 잘근잘근 밟아 주고 싶을 정도로.
체셔는 유시엘이 스튜를 먹다 말고 ‘이블 스마일’을 지어 보이는 것을 발견하곤 슬쩍 거리를 벌렸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체셔는 미간을 구겼다.
새까만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퍼부을 것처럼 바람도 축축해졌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스나 평원에서 비를 피할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야말로 허허벌판.
나무들이 보이긴 했지만 비를 막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체셔가 난처해 하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습니다만.”
“지긋지긋한 흙먼지를 씻어 낼 수 있겠군.”
“그러다가 감기 걸립니다.”
우르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대기가 부르르 떨었다.
유시엘도 스튜를 내려 두고 우중충해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아!”
빗방울이 뺨에 닿았다.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그 귀여운 제스처에, 바라보고 있던 체셔의 표정이 훈훈해졌다.
후두두, 후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체셔는 다급히 방수포로 말에 매달려 있는 짐을 감쌌다.
콰르릉! 콰릉!
“제대로 쏟아부을 생각인가 보네요…… 아가씨!”
갑자기 체셔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불렀다.
유시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벌떡 일어섰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건 인간이 아니에요.”
“그래, 나도 느꼈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장소에 먹구름을 가르고 붉은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사교의 주술사 레반과 호코스는 기병대의 도움으로 땅을 파고 끌고 온 아이들의 머리와 피로 웅덩이를 채웠다. 그렇게 무엇을 하려는지조차 모른 채 희생된 다섯 아이들의 머리는 핏물이 가득한 웅덩이 속에서 퀭하게 벌어진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코스가 새까만 시약을 부었다.
부글부글!
피웅덩이에서 물이 끓듯 거품이 일기 시작하더니 넘칠 정도로 불어났다. 이어서 레반의 입에서 악마를 부르는 불경스러운 주문이 흘러나왔다.
“헉!”
기병대 중 누군가가 기겁하는 소릴 냈다.
피웅덩이에 들어 있던 동남동녀의 머리가 핏물 위로 떠올라서 빙글빙글 돌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동남동녀를 재물로 사용하는 불경한 의식은 주술사나 맨정신으로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같은 사교도라도 쳐다보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실패라도 하면 폐인이 된다.
쓴 놈만 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애꿎은 놈들까지 폐인이 되거나 혼을 빼앗기고 만다. 지금 기병대들의 처지가 딱 그랬다.
특히 재물을 이용한 소환 의식은 더욱 위험하다.
성공 확률은 높지만 실패하면 카르마를 뒤집어쓰며 그 즉시 혼이 거두어지는 운명을 겪기도 한다.
살아 있는 ‘재물’을 쓰는 의식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우뚝!
빙글빙글 돌던 머리들이 하나둘 멈추었다.
그 머리들은 마치 무언가에 고정이라도 된 것처럼 먼 하늘의 한 곳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소나기가 기세 좋게 쏟아졌다. 솔렌 백작은 비에 젖어서 얼굴에 덕지덕지 엉켜 있는 머리카락을 걷어 내며 광소했다.
“크하하하하!! 됐구나! 성공이구나! 레반! 호코스! 너흰 역시 나의 자랑이다!”
기병대원들은 어린아이 다섯을 죽여 놓고 흡족해 하고 있는 주술사 둘과 그걸 보며 박장대소하는 솔렌 백작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새삼 사교에 몸담고 있다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레반의 주문이 끝나자, 동남동녀의 눈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눈’들이 바라보고 있던 하늘에 가득 끼어 있던 먹구름에 시커먼 구멍이 생겼다.
레반과 호코스가 그 방향을 바라보며 절을 했다.
“검은 날개의 용병이시여!”
열신마왕 스웨르크가 신임하는 열 명의 악마. 십마군(十魔君)의 한 명, 검은 날개의 용병 베라드포그!
전장의 죽음을 주워 먹는다는 악마 용병이 사교의 두 주술사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피웅덩이에서 동남동녀의 머리가 하나둘씩 사라졌다. 넘칠 것 같았던 피의 양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큐웅!
하늘에 나 있던 시커먼 구멍에서 지상을 향해 붉은 빛줄기 하나가 번개처럼 떨어져 내렸다.
기병대들은 본능적으로 말에서 내려 몸을 바닥에 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레반과 호코스는 지상으로 떨어진 붉은빛을 마주하고 있는 솔렌 백작의 옆에 나란히 섰다.
우웅! 우우웅!
뭉쳐 있던 붉은빛이 멎어 들었다.
그곳에는 9척은 될 것 같은 키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 그리고 검은 깃털의 날개를 가진 금안(金眼)의 악마가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커다란 검을 등에 비켜 메고 있었다.
“우우…….”
그 모습을 힐끗 본 기병대원이 두려운 듯 신음을 흘렸다.
시커먼 피부와 우락부락한 근육으로 가득한 몸만 봐도 인간 정도는 맨손으로 들고 찢어 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저 무식하게 커다란 검을 보라!
장정 넷은 달라붙어야 겨우 들 수 있을 법하다.
저런 것이 휘둘러진다면 플레이트를 껴입었다고 해도 일 검에 짓이겨지고 말 것이다.
츠으으으.
베라드포그의 몸에 닿은 빗방울이 증기로 변해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솔렌 백작을 힐끗 쳐다보곤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으음! 역시 인간 세상에는 빛이 가득하군. 네가 재물을 이용해서 이 몸을 부른 건가?”
“예, 저기 앞에 있는 계집을 호위하고 있는 ‘검’을 죽여 주십시오!”
“그래도 곤란하군. 재물을 받긴 했지만 내가 딱히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만.”
“그러니까 저 앞에 있는 ‘검’을…….”
“그래, 정성도 있고 하니, 내 부하 악마라도 시종으로 부리게 해 줄까?”
“저 앞에 있는 ‘검’을 죽여 주십시오!”
그 순간 베라드포그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불쾌한 기색을 표했다.
“지금 인간 하나를 죽이려고 날 소환했다는 건가?”
찔끔!
솔렌 백작은 베라드포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손사래를 쳐 댔다.
“혼자 수십의 병사와 기사를 벤 놈입니다. 그리고 함께 있는 여자는 반드시 산 채로 잡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만약 실망시킨다면 대신 네놈의 뇌를 뽑아 먹겠다.”
베라드포그는 끔찍한 소리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솔렌 백작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무래도 유시엘의 ‘검’에게 최대한 분발하라고 응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체셔는 전례 없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교도가 뭔가를 부른 것 같습니다. 이 생소한 기운은 아마도 악마라 생각됩니다.”
체셔가 펼쳐 놓은 기감 속으로 베라드포그가 들어왔다. 조금의 주저나 경계심도 없다.
인간 따위 그냥 한손으로 으깨 버리겠다는 자신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난 신경 쓰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라.”
유시엘이 체셔를 독려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각오를 다져 온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태연했다.
“감사합니다.”
체셔는 시커먼 그림자가 빗줄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체셔의 몇 걸음 앞에 멈춘 베라드포그가 물었다.
“너로군?”
유시엘은 베라드포그를 보자마자 이를 악물었다.
저자를 부르기 위해 대체 몇 명이나 희생된 것일까?
게다가 실패했을 경우 일어나는 끔찍한 결말을 알고도 그 불경스러운 악마 소환의 의식을 했다는 것은 아무리 사교도라 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과거에 마녀가 성행하던 사교와 달리, 현재의 사교는 어느 정도 도덕적인 ‘선’을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만약 베라드포그를 소환한 것이 이스티아의 지시라면 그녀는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쓰레기다.
“체셔여, 저자는 베라드포그다. 검은 날개의 용병이라 불리는 악마이지. 열신마왕 스웨르크가 가지고 있는 십마군(十魔君)의 한 명으로, 열신마왕의 힘을 상징한다.”
베라드포그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달리 소개는 필요 없는 것 같군.”
“굳이 소개도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유시엘 아가씨를 노리고 온 것 아닙니까? 절 쓰러트리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완전히 접어 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이놈이?’
베라드포그는 순간적으로 등골로 한기가 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 덜떨어진 귀족 놈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자신을 주춤거리게 만들 정도의 기세를 가진 인간이 그 정도의 일을 못해 낼 리가 없었다.
“아가씨, 요령껏 피하세요.”
“알았다.”
베라드포그가 체셔의 기세에 잠시 놀라 있는 사이, 체셔의 모습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베라드포그는 악마다.
악마는 상리 밖에 있는 존재다.
어떠한 힘을 가지고 어떠한 공격을 해 올지 모른다.
그래서 체셔는 그가 반격조차 못할 정도로 공격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빠르군!’
순간적으로 체셔의 모습을 놓쳤지만 기감을 벗어나진 못했다.
그래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는 되었지만.
후와아아아앙!
언제 뽑았는지도 모르게 베라드포그가 유시엘의 체구보다 더 거대한 대검으로 강력한 횡 베기를 해 왔다.
달려들던 체셔가 우뚝, 멈춰 섰다.
틱!
대신 반동으로 튀어 나간 칼집이 그대로 두 동강 났다. 반걸음만 더 걸었다면 다리가 떨어져 나갔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