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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17화)
3. 대수도원으로(4)
“합!”
베라드포그의 검이 지나가자 체셔의 검이 빛을 뿜었다.
‘윽?!’
뭔가 빛이 번쩍 하나 싶었는데, 어느새 검이 목을 노리고 쏘아져 오고 있다.
펑!!
베라드포그는 대경하며 다급히 대검을 세워 막아 냈다.
찌르르르…….
‘검이 부딪쳤는데 왜 폭음이?’
그리고 지금 것은 장난이라는 듯 체셔의 검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퍼엉!
쾅!
빛이 번쩍이면 체셔의 검은 급소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베라드포그는 대검의 면으로 방패처럼 체셔의 검격을 막아 냈지만 연신 터지는 정체 모를 폭발과 그로 인한 충격에 주춤주춤 물러서야 했다.
악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부우웅!
몇 번의 공방에서 체셔의 호흡을 읽은 베라드포그는 대검을 휘둘러 기세를 잡았다.
그리고 뒤로 훌쩍 물러섰던 체셔가 땅을 박차려는 순간 진각을 밟았다.
꾸우웅!
굉음과 함께 지축이 뒤집어질 듯 요동쳤다. 돌이고 흙이고 할 것 없이 떠올랐다가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앗!”
유시엘도 그 충격에 붕 떴다가 바닥에 떨어졌지만 체셔는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헉!”
마찬가지로 몸이 공중에 뜬 체셔는 위에서 내려쳐지고 있는 검으로 가장한 쇠몽둥이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마, 막을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선택지는 하나다.
피할 방도가 없으니 막는 수밖에 없다.
유시엘은 쓰러져 있다가 땅이 뒤집어지는 굉음을 듣고는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콰자자자작!
공중에서 누운 자세로 베라드포그의 검을 막았던 체셔의 몸이 대검과 함께 땅속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결코 살 수 없을 충격이 분명했다. 마치 사람을 모래 속으로 생매장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저들은?!”
멀리서 한 무리의 기병대가 접근하고 있다.
선두에는 한 번 봤던 얼굴도 보였다.
“솔렌 백작!”
꽈앙!
땅속에 파묻혔던 체셔의 몸이 솟아오르더니 베라드포그의 검에서 다시 불꽃이 튀었다.
“크윽! 이, 이런 바보 같은?!”
베라드포그는 물러서며 얼굴 가득 불신을 표했다.
체셔의 검에서는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 나오는 것 같은 새하얀 검기가 스멀거리고 있었다.
펑!
퍼벙!
쾅!
마치 검을 깨부수려고 하듯 연이은 폭음과 함께 베라드포그의 검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은 마치 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매서웠다.
구덩이에서 솟아오른 체셔의 몸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가 깨지거나, 전신에 날카로운 돌 조각이 박히고 베이는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시뻘건 안광이 불길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죽이겠다.
반드시 죽이겠다!
필살(必殺)의 의지를 품은 눈빛이 마치 피부를 찢고 들어오는 것 같다.
베라드포그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지금 이건 보기 좋게 막아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적은 일부러 이 검을 노리고 있다.
게다가 검격과 함께 전해져 오는 이 충격은 계속해서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벌써 팔이 덜덜 떨린다.
신법도 표홀해서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체셔의 눈이 홱 돌아갔다.
그 섬뜩한 눈빛은 기병대와 솔렌 백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힉!”
“헉!”
그들은 마치 사신이 슬며시 다가와서 목에 낫을 들이 대는 것 같은 느낌에 대경실색했다.
주르르륵.
몇 사람은 체셔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말안장 아래로 빗물이 아닌 것을 줄줄 흘리기까지 했다.
체셔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유시엘에게 한 발작이라도 더 움직이면 죽는다!
“베, 베라드포그가 방어만 하고 있어!”
“저 ‘검’은 핏덩이잖아. 이길 수 있다고!”
기병대원들의 대화를 들은 베라드포그는 자존심 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 ‘검’은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대체 어느 인간이 지옥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십마군의 한 명인 자신을 이토록 몰아붙일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어떻게 공격해 볼 방법이 없다.
환장할 노릇이다.
‘빌어먹을, 틈이 안 보이는군!’
진각에 한 번 당했던 체셔는 더 이상 허점을 보이지 않았다.
공격하는 순간 반드시 방어를 하게 만들어 놓고 순간적으로 땅을 박차며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게다가 이 속도는 쾌검이라는 말이 부족하다.
쾌검은 속도를 중요시하다 보니 힘을 도외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 방, 한 방에 실린 힘이 자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렬하다. 마치 강철로 만든 포탄을 막아 내는 것 같다.
스으으으.
체셔의 검을 감싸며 실타래처럼 풀려 나오던 검기가 일순간에 싹 멎었다.
기이잉!
그리고 기이한 공명음과 함께 체셔의 검에 둘러진 검기가 점점 푸른빛으로 변해 가며 하나의 형체를 이루었다.
콰차앙!
두꺼운 얼음이 쪼개지는 것 같은 굉음이 터졌다.
그것을 본 기병대들이 입을 맞춰 소리쳤다.
“거, 검강이다!”
그들은 지금 전설을 보고 있었다.
“뭣이?!”
체셔의 검에 서린 새파란 검강이 베라드포그의 검에 닿았다.
콰작!!
그리고 두께만 반 자 가까이 되는 베라드포그의 대검은 사정없이 박살나고 말았다.
파바바바박!
“끄아아악!”
“으아! 내 눈!”
“아! 내 눈!”
마치 노린 것처럼 깨진 대검의 파편이 암기처럼 기병대를 덮쳤다.
정면에 있던 다수의 기병대가 파편에 맞아 그대로 절명했고, 일부는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한편, 검을 잃어버린 베라드포그의 얼굴에는 황당함과 동시에 난생처음 느껴 보는 공포가 어려 있었다.
‘시트리엘의 천룡보검도 막아 냈던 검이건만……!’
강도와 유연성이라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옥의 광석 ‘엘세드르톤’으로 만들어진 검이 인간의 검격에 깨지다니?!
말도 안 된다!
“저, 저년만!”
그때 기병대원 한 명이 유시엘을 향해 달렸다.
베라드포그가 패배하면 자신들이 죽는 것은 당연지사.
그는 미리 인질을 잡을 생각을 했다.
그러자 본능처럼 체셔의 목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빈틈이 되었다.
베라드포그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열쇠가 쥐어진 것이다!
‘호위랬지! 어디 이것도 막아 봐라!’
그의 시커먼 날개가 움직였다.
패액!
새까만 깃털 몇 개가 유시엘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기감을 펼치고 있는 체셔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체셔의 몸이 틀어지면서 검이 깃털을 향해 날아갔다.
베라드포그의 깃털에는 독이 있다.
중독되면 오장육부가 딱딱하게 굳어서 한 시간 내로 죽고 만다.
쾅!!
“커억!”
그 빈틈을 노리고 베라드포그가 들고 있던 박살난 검의 폼멜이 체셔의 머리를 찍었다.
‘하날 놓쳤…….’
체셔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잘 보이지도 않는 거센 빗줄기 사이로 날아든 새까만 깃털을 유시엘이 보고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
뭔가 뜨끔한 것을 느낀 유시엘이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깃털 같은 것이 콕 박혀 있다.
베라드포그의 독이 묻어 있는 깃털이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유시엘은 체셔가 쓰러지자마자 이리 떼처럼 몰려드는 솔렌 백작과 기병대를 힐끗 쳐다보고는 멍한 눈으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섭게 쏟아지던 소나기는 기세가 많이 줄어 있었다.
“차갑다…….”
한참 동안 비를 맞았음에도 느껴지지 않았던 차가움이 뒤늦게 전신을 휘감아 왔다.
비록 길진 않겠지만 혼자가 되고 말았다.
언니들의 그늘에서 빛을 향해 손을 뻗어 보려던 암담함이 다시 느껴졌다.
하늘로 손을 뻗어 보았다.
새까만 먹구름은 한 점의 빛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한데, 착각일까?
손이 하늘에 닿을 듯 말 듯하다.
어질.
독이 퍼지는지 눈앞이 흐려졌다. 들어 올리고 있는 팔에서도 서서히 감각이 지워지는 것 같다.
촤악!
흐려지던 시야에 붉은 것이 흩뿌려졌다. 뺨 언저리가 뜨끈했지만 몸은 이미 감각이 사라졌는지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퍽!
툭…….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무언가가 연달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날카로운 기계적 소음과 뒤섞인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
유시엘은 말을 잘 듣지 않는 머리를 움직여 비가 멎기 시작하는 전경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달려오던 기병대 넷이 머리를 잃은 채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리 떼처럼 몰려들던 기병대들은 혼비백산하며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째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흐릿하게 변한 시야 사이로 무언가 반짝이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서걱!
빛이 허공을 그으면 머리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베라드포그도 무슨 이유인지 바닥에 쓰러진 채로 고통에 겨운 듯 몸을 비틀어 대고 있다.
사방으로 도망치는 기병대를 일일이 쫓아가서 몸과 머리를 분리시켜 놓은 것은 바로 체셔의 ‘검’이었다.
그 믿지 못할 광경이 일 분이나 됐을까…….
유시엘의 눈앞에 펼쳐진 이스나 평원에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서 있지 않았다.
비명 소리에 놀라 멀리 도망친 말들만이 젖은 풀을 뜯고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는 몸뚱이를 잃은 수십 개의 머리통이 굴러다녔다.
고여 있는 빗물은 이미 빨갛게 물들었다.
유시엘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은 마치 핏빛의 호수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신비로운 빛 내림이 이스나 평원을 비추기 시작했다.
찰박, 찰박…….
유시엘은 감각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서 체셔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체셔의 머리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몸도 날카로운 돌 조각에 찢겨져서 출혈이 심해 보였다.
키잉! 키잉!
그때 눈이 시릴 만큼 새하얀 빛을 머금은 체셔의 검이 날아와서 유시엘의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정신을 잃어서도 지켜 준 건가?”
유시엘이 손을 뻗어 체셔의 검을 어루만졌다.
움찔!
그 순간 체셔의 몸이 대답하듯 움직였다.
눈앞이 흐려졌다. 몸을 움직였던 탓에 제대로 독이 퍼지는지 호흡도 힘들었다.
기도가 이렇게 좁았나 싶다.
마치 가느다란 대롱으로 숨을 쉬는 것 같다.
잠시 후, 체셔가 몸을 일으키며 유시엘을 불렀다.
“아가…… 씨. 헉!”
체셔는 바로 앞에서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유시엘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가씨! 유시엘 아가씨!”
체셔는 다급히 유시엘의 호흡을 확인하고는 맥을 짚으며 기를 흘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