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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18화)
3. 대수도원으로(5)


“독!”
호흡 기능이 멈췄다.
하지만 심장은 아직도 산소를 공급해 주고자 미친 듯이 뛰어 대고 있었다.
체셔는 단숨에 유시엘의 옷을 벗겨 냈다.
천금을 줘도 보지 못할 나신이 드러났지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목숨이 더 중요했다.
투툭! 툭!
체셔는 독이 더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유시엘의 혈도 곳곳을 짚었다. 그리고 앉혀 놓은 채, 한 손으로는 머리를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 허리 쪽을 세게 쳤다. 유시엘의 허리가 튕기듯 꼿꼿하게 펴졌다.
“흐으읍!”
체셔의 꾹 다문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기를 이용해서 유시엘의 몸에 퍼지고 있는 독의 진행을 멈추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한곳으로 모아 보려 했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무척 힘든 작업이었다.
“크읍!”
체셔의 입에서 시커먼 핏덩이가 왈칵 터져 나왔다.
내장이 입으로 죄다 쏟아져 나오는 느낌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혀를 깨물어 가며 정신을 붙잡았다.
“크으! 제발……!”
생문(生門)을 타고 들어간 체셔의 기가 퍼져 있는 독과 치열한 힘겨루기를 했다. 몸이 정상이었다면 모를까, 부상과 무의식중에 이기어검마저 써 버린 후다. 몸에 남아 있는 기의 양은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체셔는 선천지기마저 끌어와야 했다.
그의 얼굴이 일시적으로 하얗게 변했다가 선천지기가 내기로 변환되면서 혈색이 돌아왔다.
힘을 얻은 체셔의 기가 사지에 퍼져 있던 독을 생문으로 모아 오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체셔가 장심(掌心)으로 유시엘의 가슴께를 두드렸을 때였다.
마비가 풀리면서 숨이 터져 나왔다.
“으크!”
체셔는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잇몸까지 찢어져서 선홍색 생피를 철철 쏟아 냈다.
하는 김에 생문을 통해 독을 뽑아내려 했지만 마치 갈고리에 걸린 것처럼 그 독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섬뜩!
그 순간 체셔의 몸이 경고 신호를 보냈다.
죽는다!
더 이상 무리하면 정말 죽는다!
자신이 죽는 것은 둘째 치고 여기서 실패하면 애써 모아 놓은 독이 다시 퍼진다.
체셔는 선천지기가 변환된 기를 유시엘의 생문에 쏟아 넣고는 손을 뗐다. 그 기는 생문에 모인 독을 붙잡고 견딜 것이다.
하지만 영원하진 않다.
해독제를 찾을 때까지 매일 아니, 어쩌면 몇 시간 단위로 계속해서 기를 불어넣어 독기를 붙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체셔는 헐떡이는 유시엘을 눕혀 놓고 쓰러졌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쓰러졌지만 엎드려 있는지 누워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 동안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겨우 감각을 되찾은 체셔는 다시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후읍, 하아…….”
호흡에 맞춰 티끌만큼 남아 있던 기가 몸 곳곳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몸을 추스르던 체셔는 아쉽게나마 기력을 회복하고 눈을 떴다.
먼저 유시엘의 몸 상태를 살펴봤다.
천만다행으로 정신은 잃었지만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아, 참!”
그제야 유시엘의 나신이 눈에 들어온 체셔는 헛기침을 하며 벗겨 버렸던 옷을 주섬주섬 입혔다. 그리고 근처를 둘러봤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실컷 싸웠던 베라드포그는 어째선지 허리가 절반쯤 잘려서 나자빠져 있다.
기병대들도 머리통을 잃은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들의 검상은 모두 자신이 낸 것과 동일했다.
체셔는 재작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낮잠을 자다가 깨어났더니 아버지께서 ‘검이 스스로 움직였다’라는 황당한 소리를 했다.
무슨 소리냐고, 농담하지 말라고 했지만, 차후에 그것이 ‘이기어검’이라는 고절한 경지의 검술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결코 다시 해낼 수는 없었다.
‘무의식중에 된 건가…….’
체셔는 바닥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아버지께서 없는 솜씨로 만들어 주신 모양도 왠지 어색한 검.
하지만 지금은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검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자신과 유시엘을 구해 주기까지 했다.
축축하게 젖은 이스나 평원을 비추는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건만 막상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혹시 유시엘도 같은 생각을 할까?
그녀가 깨어나면 넌지시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

밤늦게까지 솔렌 백작으로부터 소식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긴 제오스는 그가 기병대를 끌고 갔다는 이스나 평원으로 달려갔다.
흔적을 따라 두 시간쯤 달렸을 때였다.
까마귀들이 시끄럽게 울어 대는 소리와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 왔다.
“이, 이건?!”
그곳에는 에카르드의 기병대와 솔렌 백작, 그리고 사교에도 얼마 없는 주술사 둘이 목이 잘린 채로 죽어 있었다.
“거기다 베라드포그까지? 어째서…….”
그의 시신을 탐하던 까마귀들은 중독되어, 무슨 생선 말려 놓은 것마냥 사방 천지에 널려 있었다.
제오스는 남아 있는 흔적을 살펴봤지만 솔렌 백작이 아이들을 이용해서 베라드포그를 소환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당시의 상황을 그려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대략적인 흔적만 보면 싸웠다기보다는 마치 도망치는 기병대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바깥쪽을 보며 방사형으로 널려 있는 기병대의 시체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오스는 추측하기 싫은 어떠한 사실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솔렌 백작은 유시엘과 그녀의 ‘검’을 따라갔다.
그리고 ‘검’을 상대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재물로 베라드포그를 소환했을 것이다.
소환된 베라드포그는 ‘검’과 싸웠다.
하지만 패했다.
그런 간단한 인과가 그려지자, 제오스의 안색이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하얗게 변했다.
그 괴물 같은 ‘검’은 베라드포그마저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만약 그 ‘검’이 아니더라도 베라드포그가 누군가와 싸우다가 죽은 것은 사실이다.
베라드포그는 악마다.
그것도 지옥에 대충 굴러다니는 악마가 아니다.
열신마왕 스웨르크의 십마군이다.
그럼 십마군이 어떤 자들인가?
과거, 지옥과 플레브 린트가 전쟁을 치렀을 때 천룡보검을 든 천룡왕 시트리엘에게 항복을 받아 낸 자들이 바로 십마군이다. 그 일로 십이마군에서 십마군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인간과 비교한다는 것부터 어리석은 짓이다.
제오스는 베라드포그가 쓰는 엘세드르톤으로 만든 검의 파편을 발견했을 때는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완전히 박살 나서 비산했다.
기병대의 시신에서도 그 파편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인세의 그 누가, 지옥에서 가장 단단하면서도 유연하다는 엘세드르톤을 이렇게 부술 수 있겠는가?
까악! 깍! 까악!
제오스는 먹잇감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화가 난 듯 울어 대는 까마귀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것도 두려웠다.

이스나 평원에 다녀온 제오스의 보고를 듣고 있는 이스티아는 태어난 이후 가장 얼빠진 얼굴을 하고 말았다.
“솔렌 백작이 죽었다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되물으셔야죠. 십마군의 베라드포그가 죽었습니다. 상황으로 볼 때 ‘검’과 싸우다 패배한 것 같아요. 베라드포그의 검상도 에카르드에서 잘려 죽은 병력들과 일치했고요. 참 깔끔하게 베었더라고요.”
이스티아는 소름이 돋아나는 팔을 감싸 쥐었다.
“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모릅니다. 기병대의 죽음도 의문입니다. 그 ‘검’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사방으로 산개하는 기병대를 일일이 쫓아가서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다들 그 장소의 바깥 방향으로 도망치다 목이 떨어져 죽었어요. 유일하게 베라드포그만 허리가 잘렸고요. 체셔 클라인, 그는 진짜 악취미예요. 여태 당한 자들만 봐도 9할이 목이 잘렸잖아요.”
이스티아는 벨린을 쳐다봤다.
이번만큼은 벨린의 새파란 눈동자도 여유로움을 잃고 있었다.
벨린이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이기어검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은…….”
검강과 더불어 이기어검은 그야말로 전설로 회자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수백 년 동안 그 경지를 이뤘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검이고 검이 나다.
검과 내가 하나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내 의지대로 못 움직이랴…….
구결은 남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경지가 바로 이기어검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검술이 정말 실존했는지조차 믿지 않는 사람이 생겼다.
“그가 베라드포그를 죽일 정도라면 결코 정공으로는 유시엘을 떼어 낼 수 없을 겁니다.”
이스티아는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동생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자.”
만약 일년전쟁 전에 유시엘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해 놓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일년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붙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체셔 클라인’이 엄청난 변수로 등장해서 이렇게 막아서니 이스티아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몰라주는 동생도 원망스러웠다.

***

유시엘과 체셔는 왈케르나 번드로 갈 수 없었다.
유시엘의 몸에 남아 있는 베라드포그의 독을 체셔가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한 곳으로 모은 후에 기를 이용해서 붙잡아 두는 것이 전부였다.
다시 말해서 독의 지독함을 떠나서 생화학적인 독이 아닌, 저주나 마법의 일종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체셔는 유시엘의 생문에 모아 둔 베라드포그의 독을 지속적으로 붙잡아 두기 위해서 약 5시간 간격으로 대부분의 기를 쏟아부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정교의 대수도원으로 간다.”
체셔의 입장에선 펄쩍 뛸 소리다.
“정교의 대수도원까진 무려 보름 거립니다. 왕복하면 한 달이에요. 그사이에 다른 자매들의 눈에 띄면 정말 끝장입니다. 그냥 국교회에 도움을…….”
유시엘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국교회라고? 체셔, 현재 우린 범법자다. 내부에 관여하지 않는 정교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어. 만약 붙잡혔다고 쳐도 도움을 못 받겠지. 그럼 너는 일 년간 매일같이 ‘이 짓’을 해야 돼. 그게 가능하겠어?”
“…….”
솔직히 무리다. 조금도 아니고 대부분의 기를 소모한다. 반 시간가량 쉬면 회복할 수 있지만 엄연히 몸을 혹사시키는 행위다.
그것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몸이 상한다.
그리고 아무리 붙잡아 둔다고 해도 일 년 동안 몸 안에 독 덩어리를 두고 있겠다는 것부터 어불성설이다.
무엇보다 일 년은 고사하도 한 달도 버티기 힘들다.
그리고 다른 문제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 강한 적을 만난다면 체셔가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다.
“들키지 않도록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그녀들은 내가 어떻게든 숨어서 왈케르나 번드에 들어갔을 것이라 여길 것이다.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무리 국교회라도 절차니 뭐니 해서 당장은 우릴 못 잡는데다, 내진되어 있는 왕실 병력만 아니라면 국교회는 중요한 유물을 기증했던, 하게 될 나를 붙잡지 않아.”
“국교회로 가지 못하는 것은 역시 왕실 세력 때문이군요.”
“미스린토의 성을 쓴다고 해도 왕실엔 나와 연이 있는 자가 없으니 도리어 위험한 일이지.”
국교회에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의 끄나풀이나 사교도가 섞여 있다면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게다가 수배가 내려졌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목적지가 왈케르나 번드라는 것을 아는 적들이 내버려 둘 리도 없다. 나중에 왈케르나 번드로 돌아오더라도 수배는 풀어야 한다.
“망설일 시간은 없다, 바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