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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19화)
3. 대수도원으로(6)
루메아 정교의 대수도원은 소리안 공작령에 있으며, 그 대수도원 안에는 큰 도서관이 있다. 그리고 그 도서관에는 마녀가 한 명 머물고 있다. 유시엘은 그 마녀의 도움을 얻을 생각이었다.
마녀의 이름은 아제랄드 크림.
마법부터 시작해서 연금술과 의술에 도가 텄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여담으로, 일부는 ‘마녀’라는 호칭을 달고도 어떻게 정교의 이름 아래서 생활할 수 있냐고 의문을 표하곤 한다.
사실 국교회에 비해, 정교는 그 이념부터 마녀와 같은 존재에 대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진 않았다.
정교는 국교회가 부정하는 마법에 대해 긍정적이다.
신성력이 인간을 구원한다면 정교는 신성력의 부족한 부분을 마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력은 믿는 자에게만 그 은총을 내리지만 마법은 사람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정교의 대수도원 ‘도서관 마녀’가 대표적인 예다.
‘마녀’는 정교에서 숨기지 않는다.
원한다면 누구든 그녀를 만나서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체셔는 처음으로 지도를 꺼내 보았다.
왈케르나 번드로 가는 것이 무산된 이상, 최단거리로 정교의 대수도원으로 가는 길을 구상해야 했다.
“얄궂게도 끝과 끝이군요.”
현재 위치는 압실란 공작령의 이스나 운하 초입.
목적지인 소리안 공작령은 북서쪽이다. 대수도원도 소리안의 북서쪽 국경 근처에 있다.
지도상에서 일직선으로 가로지를 경우 여섯 개의 영지를 지나며 그랑델 강과 돌건 산맥, 소리안의 명소인 로니어 캐니언을 지난다. 체셔 혼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유시엘이 있는 이상은 로니어 캐니언을 지나는 것은 힘들다. 만약 로니어 캐니언을 둘러서 이동한다면 실질적인 이동 시간은 보름을 훌쩍 넘기게 된다.
함께 지도를 들여다보던 유시엘도 로니어 캐니언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신 때문에 늦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눈에 굳은 의지를 내비쳐 보였다.
“안 됩니다.”
체셔는 유시엘이 입도 열지 않았는데도 만류했다. 그러자 유시엘도 황당해서는 입을 반쯤 벌리고는 대체 뭐냐는 듯 체셔를 노려봤다.
“설마 로니어 캐니언을 가로지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
그냥 직진해도 돌건 산맥을 넘는다.
둘러 가기엔 너무 멀어서 산을 넘는 것은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로니어 캐니언은 단순히 힘들기 만한 돌건 산맥과 달리 끔찍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위험하다.
깎아지른 절벽과 급류, 위험천만한 야생동물과 독물이 우글거리는 천연의 밀림도 있다.
전문 모험가들도 쉬이 들어가길 꺼려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로니어 캐니언은 둘러 가도 고작 사나흘입니다. 여유롭게 20일 정도죠. 무리해서 지날 가치는 없습니다.”
“아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지나야 할 이유가 있다.”
유시엘은 검지와 중지로 지도의 두 곳을 짚었다. 둘러 갈 수 있는 로니어 캐니언의 동쪽과 서쪽 끝부분이다.
“오른쪽은 이스티아의 지부가 있는 사교권이다. 이스티아는 압실란으로 갔지만 이곳에 사교도들은 그 어느 곳보다 많다. 지나가면 반드시 들켜. 그리고 왼쪽은 어디 같아 보이지?”
체셔는 유시엘의 검지가 짚고 있는 곳을 살폈다.
“아!”
엘반토르 무정권역(無政權域)!
바로 에틸랑쥬의 바하누스 결사대가 있는 곳이다.
무정권역이 무엇인가?
좋은 말로는 국가의 모든 이목으로부터 벗어난 것이고, 나쁜 말로는 내놓은 땅이다.
하지만 그곳에 머무는 바하누스 결사대는 결코 악의 집단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멋대로 내쳐졌던 비운의 집단일 뿐이다.
바하누스 결사대가 엘반토르에 자리를 잡으면서 기존에 그곳에 있던 범죄 조직은 숨을 죽였다.
하지만 결사대는 군부에서도 포기했던 엘반토르를 평정하고 범법자들을 모두 법 앞에 세워 버렸다. 무려 15년 가까이 된 일이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을 비롯해서 그들의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만약 그곳을 지나가게 되면 누구든 눈에 띄고 만다. 이곳은 도시지만 군역과 마찬가지로 경비가 삼엄하다.
체셔는 난처한 듯 유시엘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유시엘도 체셔를 마주 봤다. 교차하는 두 시선엔 고집과 갈등이 비치고 있었다.
“그곳은 자신감만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유시엘도 지지 않고 의견을 내세웠다.
“사교권을 돌아서 이동하려면 어림잡아도 열흘은 더 걸린다. 그리고 엘반토르를 둘러서 지나려면 국경을 넘어야 한다. 검문에 반드시 들키겠지, 그럼 어쩌겠어?”
아무리 주군의 의지라지만 로니어 캐니언은 위험했다.
그리고 유시엘도 그런 체셔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다.
“네가 날 걱정하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난 이미 두 번이나 네 발목을 잡았어. 아무리 네가 ‘검’이라 해도 이건 주군의 도리가 아니다. 더 이상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마.”
“그건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아가씨. 그렇게 무리하다가 변을 당하는 것이 더욱 비참한 것입니다.”
유시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살아오던 유시엘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유시엘의 손이 올라갔다.
“……고.”
유시엘은 순간 욱해서 손을 들어 올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손을 내렸다. 그리고 아닌 척 시선을 돌렸다.
맙소사!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지금 이 어색한 행동을 체셔가 눈치채진 않았을까?
게다가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말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리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걱정해 주는 건데, 나는…….’
하지만 유시엘의 걱정과 달리, 체셔는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마주치며 대답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각오라면 가 봅시다.”
체셔는 로니어 캐니언을 건너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일이다.
지금은 다른 자매들의 눈에 들지 않고 움직일 수 있냐는 것이 더 중요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체셔는 큰 핸디캡을 안고 있다. 대수도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기를 유시엘의 몸에 있는 독을 붙잡아 두는데 사용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베라드포그와 같은 악마는 물론이고, 에카르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적에게 합공이라도 당하면 속수무책이다.
“영지를 피해서 이동합시다. 이제부터 편한 잠자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물론 로니어 캐니언 직전에는 마을에 한 번 들르긴 해야 합니다. 준비할 것이 많으니까요. 사교도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가씨의 말씀처럼 왈케르나 번드로 들어갔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모른 척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걸까?
지금까지의 체셔의 태도로 보면 전자일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 뜻에 맞춰 줘야 하는 걸까?
유시엘은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상대가 자신을 보며 곤란해 하는 상황은 많이 겪거나 만들어 왔다.
반대로 자신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곤란해졌던 일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전자에는 질근질근 밟아 주는 것으로 뒤끝 없이 끝냈지만 후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그녀였다.
사실 체셔는 자신의 ‘검’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밟으려면 밟을 수도 있었고, 굴욕을 주려면 줄 수도 있다.
한데, 체셔에겐 트집 잡을 것이 없다.
아니! 딱히 트집을 잡겠다는 것은 아니다.
너무 완벽하다 보니 괜히 흠을 찾아보고 싶을 뿐이다
‘이게 아니잖아…….’
이렇게 불리한 입장이 되다 보니 별의별 추잡스런 생각이 다 드는 터라, 유시엘은 자신에게도 놀라고 있었다.
미스린토를 떠난 첫날, 발장난을 쳐 봤을 때도 체셔는 무표정과 무감정으로 일관했다.
결국 가지고 노는 맛이 없는 것 같아서 다른 거릴 궁리하고 있었는데, 어째 나날이 이쪽의 입장이 불리해지는 불편한 현실.
‘아까부터 왜 저렇게 곤란해 하시지?’
하지만 체셔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4. ‘검’의 능력(1)
본의 아닌 부정을 저지르고 저택에서 열흘간 근신 처분을 받은 에틸랑쥬와 이실리엔…….
두 사람이 품게 된 분노는 밉살스러운 유시엘이 아닌, 사교의 사악한 주술로 자신들을 함정에 빠트렸다고 생각되는 이스티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저택을 나서며 가장 먼저 접한 소식은 이스티아가 유시엘을 놓쳐 버렸다는 것이었다.
‘아! 그 멍청한 계집애! 사교도 별것 아닌가 보네.’
‘세상에! ‘검’ 하나밖에 없는 애를 못 잡은 거야?’
유시엘을 놓쳤다는 것은 왈케르나 번드로 무사히 들어가게 됐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선고한 대로 6개월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왈케르나 번드에서 그녀를 끄집어내는 것은 무모하다. 유시엘 하나 때문에 국교회까지 상대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떠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약속대로…….”
“그래.”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은 이스티아를 처치할 때까지 상호불가침의 약조를 맺었다.
하지만 둘은 웃는 얼굴과 반대로 속으로는 서로를 비웃고 있을 거다.
지난 열흘간 두 사람은 어떻게 이스티아를 치고, 그 후에는 어떻게 서로를 잡아먹을지 고민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신경전은 지켜보고 있던 장로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열했다.
만약 외부와 연락을 취하게 그냥 두었다면 피바람이 몰아쳤을 정도로.
미스린토의 저택 앞쪽에는 두 무리가 대치하고 있었다.
에틸랑쥬를 마중 온 것은 바하누스 결사대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엠블럼에는 푸른 십자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검은색 드레이크(Drake)가 그려져 있다.
국교회의 상징인 푸른 십자가를 지키는 ‘악’의 상징 드레이크는 결사대원들이 국교회를 위한 희생과 업을 끝까지 품고 가겠는 굳은 각오를 나타내고 있었다.
반대쪽에는 이실리엔을 호위하기 위해 온 암살자 집단 은영성(隱影城)의 ‘베러세인’이 있었다.
그들은 이실리엔이 이면 이전에 내보여 주려 했던 단체였다. 베러세인들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람들 같아 보이지만 눈빛은 달랐다.
하나같이 냉정한 암살자의 눈이다.
두 무리는 저택에서 사이좋게 나오는 에틸랑쥬와 이실리엔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실리엔이 베러세인들을 섭외했다는 사실에 에틸랑쥬는 의외라는 얼굴이 됐다.
‘베러세인이라니 제법이네. 암살자는 귀찮은데…….’
이실리엔도 바하누스 결사대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실제로 보니 역시 장난이 아니군. 대체 저걸 어떻게 상대하지?’
베러세인과 바하누스 결사대가 마주하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빛과 어둠의 대치였다.
바하누스 결사대가 내뿜는 은은한 백광의 신성력과 은영성의 베러세인들이 풍기는 암살자의 어두운 살기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숨 막히는 대치를 이루었다.
하지만 양측의 주인은 약속을 맺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자매의 뜻을 전해 받은 양측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는 동맹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서로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에틸랑쥬는 압실란 서쪽 엔더 협곡이 거점이다.
그곳에는 바하누스 결사대의 임시 기지가 있다.
이실리엔은 은영성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압실란의 서북쪽 루비(Ruby) 사막의 살막(殺幕)이 거점이다.
“현재 이스티아의 위치는 파악됐어?”
에틸랑쥬는 약조대로 일단 이스티아를 노릴 생각이었다.
사교도는 골치 아프다. 곳곳에 숨어 있는 세작들도 그렇고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상대하기 곤란해진다.
무엇보다 자신을 함정에 빠트려 유시엘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더욱 화가 났다.
“이스티아는 각 영지에 있는 소지부를 경유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이 에카르드 영지입니다.
찾기도 난처하다.
고정된 거점이 없는 이스티아는 이목을 속이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정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