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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20화)
4. ‘검’의 능력(2)


이실리엔도 에틸랑쥬와 비슷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검’, 리온 아스발란은 베러세인이 알려주는 정보를 들으며 불신을 표했다.
“사교에 침투해 있는 세작이 전한 정보이니 틀림없소. 체셔 클라인이 십마군의 한 명인 베라드포그를 죽였소. 이스티아가 실패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하오.”
이실리엔이 리온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클라인 가문은 정말 별 볼일 없는 봉신가 아니었니? 얼굴만 반반하던 것 같던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실리엔 아가씨. 아마도 이스티아가 유시엘과 모종의…….”
“그럴 리가? 뭐가 아쉬워서 가진 것 하나 없는 애랑 거래를 하겠어? 오히려 이스티아가 우리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꾸며 낸 것일지도 모르지.”
베러세인은 이실리엔과 리온의 대화를 끊어 냈다.
“그게 아니오. 그때 솔렌 백작도 죽었소.”
이실리엔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뭐? 귀족의 교과서라던 그 사람도 사교도였어?!”
“증거는 없지만 조사 결과가 그쪽으로 기울었소. 함께 죽어 있던 자들이 사교의 주술사였고 심지어 베라드포그를 소환했던 의식도 있었소.”
“보고한 사람이 누구야? 혹시 제레미?”
“그렇소. 외에 자잘한 내용은 보고서에 적힌 대로요.”
보고서를 죽 훑어보던 이실리엔은 그 귀염상인 동안의 얼굴이 아까울 정도로 잔뜩 일그러졌다.
“체셔 클라인에 관한 내용 빼고는 뭐, 그나저나 이거 사실이야? 에틸랑쥬 언니의 세력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70여 개나 된다니…….”
“각 기관의 세세한 정보까지 보고가 올라온 이상 거짓은 아닌 것 같소이다. 이스티아를 친다고 해도 일대일의 상황이 되면 이 세력을 모두 감당할 수 없지 않겠소?”
“이면의 몬스터도?”
“대놓고 못 다루지 않소.”
이실리엔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역시 에틸랑쥬 언니의 말대로 이스티아만 쳐선 안 되겠어. 언니가 약조를 먼저 제안했다는 것은 그것으로 ‘이득’이 있으니까 거래 조건으로 내걸었겠지.’
세력의 규모에서부터 상당한 차이가 나고 있다.
이 정보가 어떻게 올라온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에틸랑쥬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것이 분명하다.
‘하긴 일부러 내게 뭔가를 전하려 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때는 마냥 무방비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몰래 시커먼 짓을 꾸미고 있었네.’
세력과는 무관하게 최소한 에틸랑쥬를 어딘가에 몰아넣고 이스티아를 잡아야 했다.
한번에 이면의 몬스터를 불러내서 에틸랑쥬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이 필요했다.
“이거 쉽지 않겠어.”
그녀에겐 바하누스 결사대가 있다.
이면의 몬스터와 최악의 상성을 가진 그들이…….
이실리엔이 혀를 차는 것을 지켜보던 베러세인도 의견을 말했다.
“독공(毒功)으로 피해를 주는 것도 쉽지 않소. 그들이 가진 성물은 모든 독을 중화한다고 하오.”
이실리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바하누스 결사대의 수를 좀 줄여야겠네. 그들은 약 천여 명. 가족들과 함께 무정권역에 살고 있지.”
베러세인은 이실리엔의 뜻을 이해하곤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띠웠다. 시커먼 살기가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그들의 목숨 값. 결코 싸지 않을 거요.”

그렇게 근신 처분을 받았던 장녀와 차녀가 압실란 공작령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일년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행적에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이스티아는 완벽히 그 모습을 감춘 채로 세작들을 이용해서 교란 및 상대 세력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거나 테러를 행했다.
바하누스 결사대의 호위 속에 대저택에 들어선 에틸랑쥬는 사교도 못지 않은 세력을 과시하며 정보를 통합하고 압실란 공작령 곳곳에 ‘눈’을 두기 위해 불철주야로 새로운 세력을 구상하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에틸랑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정보’였다.

이실리엔은 늦은 밤, 잠들기 직전에 자신 앞으로 온 서신을 읽으며 이를 갈고 있었다.
“이 망할 사교도 년이……!”
당당하게 이름까지 밝힌 서신이다.
사교도를 이용해 타국의 왕실까지 정보를 흘리는 것도 모자라,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겠다고 한다.
자신이 이면의 세력을 등에 업고 여왕의 자리를 노리는 것과 나아가서는 대륙을 평정해 신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를 예로 들어가면서 말이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도 예상도 하고 대비책도 꾸며 놨지만 당치도 않게 일이 커져 버렸다.
“크으! 날 우습게 봤단 말이지? 이딴 술수로 날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 생각…… 응?”
이를 갈며 서신을 마저 읽어 내려가던 이실리엔의 눈에 흥미로운 내용이 보였다.

그전에 에틸랑쥬 언니의 세력이 너무 강해 보이지 않아? 조금 쳐 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언니가 잘만 해 준다면 나는 사교의 힘으로 언니에게 페널티로 작용하고 있는 ‘이면의 몬스터’를 처리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미리 말하지만 우리도 동맹 같은 것은 아니야.
필요에 의한 ‘거래’지.
나는 에틸랑쥬 언니가 가진 세력이 두려워.
그리고 언니는 타국의 시선이 두렵겠지?
나는 장로회에도 아는 사람이 있어.
그래서 ‘가지’를 좀 더 잘 이용할 수 있지.
조만간 소식이 들릴 거야. 대답은 그때로 미뤄도 좋아. 물론 소식만 듣고 입을 닫는다면 크게 후회할 걸?
그럼 언니가 해 줬으면 하는 것은…….

즉, 이스티아는 자신의 약점을 틀어쥐고 휘두르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잘못했다.
이실리엔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멍청한 계집애. 그런 수가 내게 통할 거라 생각해?’
이스티아는 자신이 정보력에서 우위에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면의 몬스터에 관한 소문도 마찬가지다.
얼마든지 날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스티아는 이실리엔의 ‘과격함’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 사실을 뒤집어쓰는 순간 넌 끝장이다, 이스티아.’
기분이 좋아진 이실리엔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루비 사막의 유적을 보수하고 증축해서 만든 성지(城地)에 세워진 성에서 내려다보는 사막의 야경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누구든 이 사막에 불순한 목적으로 발을 들이면 루비 사막의 주인인 베러세인들에게 목숨이 끊어지리라.
“리온?”
이스티아를 엿 먹일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해 버린 이실리엔은 달뜬 목소리로 ‘검’을 불렀다.
그녀의 눈은 아이 같은 귀여운 얼굴이나 몸과는 반대로 짙은 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리온, 날 만족시켜 줄 수 있겠니?”
이실리엔은 셔츠를 살짝 풀어 보였다.
리온은 아직 열댓 먹은 소녀 같아 보이는 그녀의 앳된 몸을 보면서 내색은 못해도 속으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쩐지 한 번씩 눈빛이 이상하더라니…….’
리온은 ‘검’으로 키워졌다.
하지만 그전에 남자다.
예쁜 여자가 유혹하는데 내키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이실리엔의 저 몸을 보면 죄짓는 것 같았다.
망설이는 리온을 바라보는 이실리엔이 무안해진 듯 뺨을 살짝 붉혔다.
사실 이실리엔도 처녀다.
그동안 호기심만 가득했을 뿐이었는데, 리온이라는 멋진 ‘검’을 보는 순간 이런 상황이 되면 마음껏 즐겨 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리온은 정말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멋진 남자다.
저 탄탄해 보이는 몸에 짓눌려서 범해지고 싶었다.
수음만으로는 느껴 볼 수 없는 쾌락을 느낄 것 같다.
리온은 재차 확인하듯 되물었다.
“정말 저로 괜찮습니까?”
이실리엔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명령이야! 날 범하도록 해! 저항해도 용서하지 말…….”
그 순간 자리에서 사라진 리온은 어느새 자신의 몸을 억센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아, 악! 자, 잠깐. 너무 갑작……!”
하지만 리온은 ‘명령’을 이행할 뿐이었다.
그렇게 곧 둘 뿐인 방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새벽까지 수도 없이 리온에게 일방적으로 범해지던 이실리엔은 결국 실신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늦은 아침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도 지난밤의 쾌락을 잊지 못했는지 함께 잠들어 있던 리온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정말 엄청난 아가씨로군.’
리온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성기를 애무하고 있는 이실리엔을 보는 순간 등골로 소름이 돋았다.
“아가씨…….”
밑에서 올려다보고 있는 이실리엔의 저 눈빛이 마치 음란한 악마 같았다.
“좀 더…….”
리온은 속으로는 깊은 한숨을 쉬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것은 거칠게입니까? 부드럽게입니까?”
지난 새벽에는 이실리엔이 울다가 실신할 때까지 범했다.
분명 그녀도 자신의 말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었건만, 그녀의 대답은 가차 없었다.
“거칠게.”

이실리엔의 아침은 보고서를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 좋은데 말이야, 사교도만 없으면 좋겠군.”
이실리엔은 일년전쟁을 위해 구축해 놓은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어느 곳이 배경이 되든지 거점만 마련된다면 보고와 지시에 차질이 없도록 구성해 놨다.
더군다나 이번엔 운 좋게도 은영성의 본거지인 루비 사막이 있는 압실란 공작령이 선택되었다.
당연히 거점을 은영성의 시작인 루비 사막으로 정했다. 어쩌다 보니 에틸랑쥬가 있는 엔더 협곡과 가까운 거리가 되어 버렸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좋다면 좋을 수도 있고 말이다.
루비 사막은 걸으면 닷새 정도면 지날 수 있는 사막이다.
‘루비(Ruby)’ 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사막 안쪽에 있는 골짜기에서 루비가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채취되는 루비 원석은 내부에 보기 싫은 흑색 반점들이 있었기에 보석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한때는 열처리를 진행하면 그 흑색 반점이 사라진다고는 했으나, 특유의 광택도 사라져서 가치를 잃고 말았다.
보고서를 읽고 내용을 정리하던 이실리엔은 지난밤에 도착했던 이스티아의 서신을 떠올렸다.
이면의 몬스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고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충분히 타국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갔을 시간이다.
그런데도 조용하다는 것은 이스티아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손을 썼다거나, 귀족들이 당주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에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실리엔이 서신의 뒷부분을 읽고 기분이 좋아진 것은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