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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21화)
4. ‘검’의 능력(3)
귀족은 이기적이다.
어떻게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왔는데 한 번의 말실수로 모든 것을 잃고 싶지는 않을 거다.
이면의 몬스터가 그렇다.
누구에게든 중요한 정보이지만 먼저 입을 연다는 것은 위험부담도 먼저 뒤집어쓴다는 말과도 같다.
자! 만약 누군가 입을 열었다 치자.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이실리엔이 입을 닫거나 딴소리를 한다?
그렇게 되면 입을 열었던 귀족만 손해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귀족들이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해 주겠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입을 연 사람이 누군가만 알면 된다.
상대는 ‘미스린토’의 딸이다.
밉보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거둬 가는 사신 가문의 사람인 것이다.
귀족들이 먼저 떠벌릴 가능성은 극히 낮다.
만약 사교도 귀족들이 입을 열어도 매한가지다.
그렇게 되면 이실리엔은 오히려 환영한다.
‘저자들은 사교도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미스린토의 권력을 지닌 자.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는 세력을 가지고, 나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스티아다.
그녀는 사교도라도 미스린토라는 이름을 가진 덕분에 충분한 발언력이 있다.
결론은 하나지만 중요한 것은 귀족들의 입으로 소문이 퍼질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티아를 이용할 수 있다.
잘만 되면 그녀가 내건 조건을 역으로 되돌려 줄 수 있다. 그녀와 함께 이면의 몬스터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이실리엔은 선포식 때 미리 말했다.
‘이면의 세력은 일년전쟁에만 사용된다!’라고.
하지만 이스티아는 다르다.
그녀는 사교도다.
사교에 의해서 이면의 몬스터로 인한 오해가 생긴다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용당해 줘야겠지. 베러세인?”
벽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결코 보이진 않겠지만 집무실에는 네 명의 베러세인들이 더 숨어 있다.
만약 이실리엔을 제외한 그 누군가가 이곳에서 딴마음을 먹는다면 그 순간 숨통이 끊어지리라.
“무엇이 필요하시오?”
“이스티아의 사교의 소지부들을 몇 개 쳐서 그 성과를 에틸랑쥬 언니에게 알려 줘. 그리고 너흰 나서지 말고 ‘펜 길드’로 에틸랑쥬 언니의 가장 큰 자금줄이라는 헤르고스 후작의 가족을 납치해서 이스티아에게 넘겨. 소지부 쪽으로 시선을 돌려놓고 납치하면 될 거야.”
“펜 길드에 베러세인을 심는 것이?”
“암살자는 너무 티가 나. 펜 길드는 베테랑 용병들이 많으니까 납치 정도는 쉽게 성공할 거야. 이 일만 성공하면 퇴직금을 줘도 괜찮겠지.”
“펜 길드라! 무척 우수한 자들인데, 버릴 생각이시오?”
“상관없어. 우리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돼.”
“알겠소.”
***
아제랄드 크림.
소이렐의 백의 천사, 하얀 연기의 연금술사, 신수(神手)의 마녀, 도서관 마녀, 요정, 크림빵 체이서(Chaser)…….
그 외에도 수많은 별명을 가진 ‘마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크림빵 하날 입에 문 채로 연금술에 매달리고 있었다.
마법과 의술도 일대종사에 들었다곤 하지만 아제랄드 크림의 직업 정체성은 엄연한 연금술사다.
단지 연금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배웠던 마법이 대성(大成)하자, 본의 아니게 마녀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그녀는 마녀라는 호칭이 싫었다.
그래서 의술을 배워 마녀의 이미지를 지워 보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술마저 대성하며 ‘신수의 마녀’라는 원치 않던 별명만 하나 더 얻고 말았다.
십수 년 전부터는 연금술, 마법, 의술을 하나의 이치로 정립해서 세 분야의 경지가 더욱 높아졌다.
그 덕분에 정교에서도 인정받아 아틀리에(Atelier)를 얻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루메아 정교는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거처를 제공해 준 고마운 곳이었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시험관에 하얀 돌 조각 같은 것을 넣고 반응을 살피던 크림의 얼굴을 구겼다.
시험관의 액체가 점점 회색으로 물들더니 부글부글 끓어 넘치려 하고 있다.
“……너무 세.”
근래엔 부러지거나 부서진 뼈를 고정하고 굳힐 수 있는 새로운 소재를 개발 중이다.
협착으로 인해 뼈가 박살 나 버린 경우에는 누구든 불구를 면치 못했으니까.
크림은 지하의 아틀리에를 나와 도서관으로 올라왔다.
대수도원의 도서관은 시스터들이 관리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관리만 할 뿐, 사서들은 시스터가 아니다.
이곳에 오래 머물다 보니 자연히 관리해 보지 않겠냐는 언질이 온다.
바로 저런 ‘도서관 폐인’처럼 말이다.
“라그민 아저씨.”
갈색 단발머리에 깐깐해 보이는 외눈안경을 끼고 있는 학자풍의 사내는 나이만 200살 가까이 먹은 마녀가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자 난처하다는 얼굴로 돌아봤다.
“예, 아제랄드 님.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탄산수가 나오는 곳 알아?”
라그민은 지질학자다.
서른 중반의 나이에 교수직도 가지고 있는 똑똑한 사람이다.
“약산(弱酸)이 필요해. 개발 중인 신소재에서 독성을 중화시키려는데 반응이 너무 세게 일어나. 너무 중화시키면 성질을 잃어버려. 그래서 탄산수를 이용해 보려고.”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들은 이야기로는 로니어 캐니언의 계곡에 적갈색으로 물든 석회암 지대가 있다는데 그곳에서 탄산수가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크림의 가느다란 어깨가 축 늘어트렸다.
“으! 어딘지는 짐작이 가지만, 먼데…….”
“탄산수가 사방 천지에 널려 있을 리가 없잖아요. 고작 예닐곱 시간 거리에요. 모험을 좋아하는 별난 시스터님과 다녀오시는 게 어때요? 좀 위험하긴 해도 아제랄드 님이 있으면 괜찮을 거고요.”
크림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시스터 루사나는 날 너무 괴롭혀.”
“에이, 다 좋아서 그러는 거죠.”
“아니야! 눈빛에 살기가 묻어 있어.”
“격하게 좋아하나 보네요. 그런데 요새 환자분들을 안 돌보시는 것 같던데, 너무 연금술에 매달리는 것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식사는 좀 제대로 하세요, 이틀째 아틀리에에서 안 나오셨잖아요.”
크림이 이틀째 아틀리에에서 안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 또한 이틀째 여기 처박혀 있었다는 말.
그리고 라그민은 크림이 처음으로 이 도서관에 왔을 때부터 소년의 모습으로 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크림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곤란해 하는 사람이 있어?”
대수도원에도 의료 시설은 있다.
그곳의 시스터들은 크림이 온 뒤로 의술 실력이 향상되어서 사실상 크림이 나설 일도 거의 없어졌다.
단지 그녀에 대한 소문만 듣고 ‘아제랄드 크림’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을 뿐이었다.
“글쎄요? 가기 전에 의료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돌아서려던 크림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라그민을 돌아봤다.
“혹시 라그민은 갈 일 없어?”
“좀 살려 주세요. 논문 발표일이 코앞이에요. 이번엔 라우프 님도 참석하신데서 눈도장 찍을 좋은 기회라구요.”
그동안 크림은 몇 번이나 로니어 캐니언에 다녀왔다.
로니어 캐니언은 연금술과 의술에 필요한 재료들을 무궁무진하게 제공해 주는 장소였다.
수많은 광석과 약초부터 시작해서 운이 좋으면 생소한 성질을 가진 광물을 얻어서 연구해 볼 수도 있었다.
아틀리에로 돌아가서 떠날 채비를 마친 크림은 라그민의 말대로 의료원에 들러 보았다.
침상에 누워 있던 몇몇 환자들이 크림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해 보였다.
모두는 아니지만 크림에게 치료를 받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당장 크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아제랄드 님, 외출하세요?”
“로니어 캐니언에 가려구요.”
“아, 뭐 또 구하러 가시는구나. 조심히 다녀와요.”
***
돌건 산맥.
소리안 공작령의 중심을 가르는 평균 해발 1,460미터, 최고 3,280미터의 고산이 늘어서 있는 험준한 산맥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약간 북쪽에 치우쳐 있고, 남쪽인 보팔리아 지방과 북쪽의 소이렐 지방의 경계 같기도 하다.
“눈 쌓인 거 보이십니까? 저길 넘어야 합니다.”
체셔는 해발 1,877미터의 로발랭트와 2,292미터의 익씰의 봉우리 사이를 가리켰다.
그곳 또한 중간부터는 새하얀 눈과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서 까마득해 보였다.
“저길 하루 만에 넘을 수 있나?”
“산장에서 머물다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말은 여기서 팔아야 해요. 로니어 캐니언에 말은 못 데리고 갑니다.”
유시엘이 타고 있는 점박이 말은 유시엘이 승마를 배우면서부터 함께 했던 말이다. 이실리엔은 젖소 같다고 놀려댔지만…….
체셔는 유시엘의 안타까워하는 눈빛을 읽어 내고는 말을 바꾸었다.
“아니, 맡겨 두고 가죠. 올 때 다시 타면 되니까요.”
두 사람은 영지에 들르는 대신에 산지 아래에 있는 작은 부락으로 가서 채비를 했다.
며칠간 노숙을 감행하며 여기까지 오면서도 사교도의 행위로 추측되는 어떠한 시비에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까지는 체셔가 사냥을 해서 끼니를 해결했었지만, 이제는 산을 오를 것이다.
하루 정도는 제대로 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평범한 가정집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이튿날 오전.
산을 오를 채비를 마친 두 사람은 신세를 졌던 가정집에 말을 맡기기로 했다. 여물비와 함께 수고비도 더 얹어 주려고 했지만 인심 좋은 아주머니는 여물비만 있으면 됐다며 조심히 다녀오라고 했다.
유시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에 오른다.
짐은 체셔가 메고 있었지만 맨몸이라도 해발 2,000미터 가까이 되는 고산을 넘는 것은 고된 일이다.
그것도 산을 타 본 경험이 없는 유시엘에겐 더욱더.
“가자!”
유시엘은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간 노숙도 잘해 냈다.
의지와 관계없이 정신을 놓는 일도 없었다. 이번 산행도 문제없다고 자신했다.
“잠깐만요, 아가씨.”
유시엘의 몸에 남아 있는 베라드포그의 독은 지독했다.
내심 며칠 정도 지나면 중화될까 싶기도 했지만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여전히 유시엘의 생문에 모여서 자신을 붙잡고 있는 체셔의 기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아, 알았다.”
그간 수십 번을 했지만 할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옷 속으로 사내가 손을 쑥 집어넣어서 맨살을 만지는 것은 여성인 이상 쉽게 적응할 수 없는 행위였다.
기를 쏟아붓던 체셔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소량도 아니고 대부분의 기를 쏟아붓는 것은 몸에 상당한 무리를 가져온다.
그런 것이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아무리 체셔라도 처음과 달리 지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음.”
짧은 신음을 흘리는 체셔를 바라보던 유시엘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고맙다는 한마디를 하기가 힘들다.
수고했다는 말은 쉽게 나와도 어째서인지 고맙다는 말은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참 이상하다.
생각해 보면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소릴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목적지인 산장까지 종주부터 약 11시간이 소요된다는 말을 들은 유시엘은, 그 정도면 문제없다고 자신했다.
적어도 말을 11시간 동안 타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하지만 당당하게 앞서는 유시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체셔는 걱정이 앞서고 있었다.
완만한 경사가 있는 자갈길을 따라가는 두 시간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산길에 들어서자 극심한 경사와 함께 체력을 갉아먹는 험준한 지형이 두 사람을 반겼다.
유시엘은 의외로 선전했다.
높직한 바위도 잘 올라탔으며, 가파른 경사에도 체셔의 손을 빌리지 않고 혼자 잘 걸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