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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22화)
4. ‘검’의 능력(4)
“이쯤에서 쉬도록 합시다.”
한 시간쯤 더 올라왔을 때는 체셔가 전망이 탁 트인 곳에 놓인 넓은 바위 위에 짐을 내려놓았다.
아직까지는 그리 높은 곳까지 올라오지 않아서 날씨는 덥다는 느낌이었다.
“머리를 묶어 드리겠습니다.”
“그, 그래.”
체셔와 달리 유시엘은 땀에 푹 절어 있었다.
그래서 체셔는 양해를 구하고 끈으로 머리를 묶어 주려 했다.
‘이런 무신경…….’
유시엘이 남성에게 머리카락을 허락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모르고 있는 체셔는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 체셔가 남의 속도 모르고 웃는 얼굴로 물었다.
“기분은 어떻습니까?”
바위에 걸터앉아서 보팔리아의 황토 지대를 바라보는 유시엘은 밝게 대답했다.
체셔의 저런 모습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산에서 땀을 흘린다는 것은 상쾌한 기분이로구나.”
“예, 산장까지 힘내죠.”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사람의 몸이란 참 특이해서 막상 고생을 할 때는 그 감각이 둔해졌다가 잠시 쉬기라도 하면 그 이후부터는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두 배 세 배로 겹쳐서 몰려온다.
“……으으.”
유시엘이 그런 인체의 신비를 몸으로 증명했다.
앞서 걷던 유시엘은 숨을 몰아쉬며 뒤처지기 시작했다. 체셔가 보폭을 맞춰 주려 해도 소용없을 정도였다.
“잠시 앉아 보십시오, 아가씨.”
그래도 예상했던 일이다.
체셔는 유시엘을 바위에 앉혀 놓고는 부츠를 벗겨 냈다.
“벌써 부었네요.”
유시엘의 발은 산길을 걸었던 탓에 가죽에 쓸려서 발갛게 부어 있었다.
그래도 굳은살 하나 없는 자그맣고 예쁜 발이었다.
“조금 시릴지도 모릅니다.”
체셔는 양손에 기를 두른 채 유시엘의 발을 두 손으로 꾹 붙잡더니 마사지를 시작했다.
“읏!”
갑자기 체셔가 발을 주무르기 시작하자, 유시엘은 깜짝 놀라며 신음을 내뱉었다.
마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저릿저릿하다.
그리고 피 대신 차가운 얼음물이 혈관을 타고 도는 것처럼 발부터 시작해서 전신이 시원해졌다.
“재, 재주가 좋구나!”
“감사합니다.”
체셔의 태도는 사무적이다.
사적인 감정을 최소로 하며 ‘검’으로서의 의무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사실 유시엘에겐 그런 체셔의 태도가 썩 내키지만은 않았다.
물론 체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체셔는 ‘검’의 교과서 같은 모습이다.
무엇 하나 어긋남이 없다.
다만 유시엘이 S를 타고난 사람이라는 게 문제다.
미스린토에 있을 때와 다르다.
체셔와 둘만 있게 되니 그 본능을 어딘가에 표출할 방법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는 언니들의 속을 긁어 놓거나, 가끔 자신의 미모에 빠져 맥을 못 추고 홍알대는 병신 같은 귀족 사내들을 상대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방법이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발장난도 쳐 봤지만 체셔는 그런데 둔감한지 무덤덤했다.
게다가 그 후로는 점점 입장이 불리해졌다.
주군이면 뭐하나?
민폐는 혼자 다 끼치고 있는데.
열심히 마사지를 하고 있던 체셔는 유시엘의 이글거리는 시선을 느끼고는 살짝 고개를 들어 보았다.
“…….”
웬만하면 눈빛만 보고도 유시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요 며칠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유시엘의 머릿속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약이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불편하십니까?”
유시엘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넌 나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
체셔는 반대쪽 발에 마사지를 시작하며 대답했다.
“아름다우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기쁜 말임에 틀림없지만 유시엘이 원한 대답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불쾌해졌다.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대답인데 또 오죽하겠나.
“개인적인 생각을 듣고 싶군.”
“제가 어디까지 솔직해지길 원하십니까?”
“물론 영혼의 밑바닥부터다.”
체셔는 유시엘과 잠깐 눈을 마주치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아가씨는 저의 ‘주군’이십니다. 그 외에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뭐?”
원하는 대답은 딱히 없었지만 이것도 예상을 너무나도 비켜 가 버리는 대답이다.
체셔는 정말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후.”
유시엘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그 반응에 체셔도 난처해지고 말았다.
‘요 며칠 아가씨의 태도가 유독 이상하군. 시대를 불문하고 홍차의 온도와 여자의 마음은 어렵다더니…….’
그리고 체셔는 빗나간 오해를 시작했다.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분명 친구가 필요하신 거겠지.’
적당히 휴식을 취한 후, 유시엘은 다시 기운을 차려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표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체감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도 강해지고, 수목한계선에 도착했다는 것을 증명하듯 삼림이 사라지면서 초목들의 키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체셔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꺼냈다.
“망토는 처음입니까?”
망토로 몸을 가린 유시엘은 걷다가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정말 불편하군. 게다가 왜 이렇게 무겁지?”
“참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햇볕도 강하니 후드를 써, 피부가 타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질 무렵에는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일 정도였다.
“신비로운 풍경……. 온통 하얗게 빛나는구나.”
고산의 산소 부족 현상으로 고생하던 유시엘은 달빛을 머금은 눈밭을 보며 가까스로 얼굴을 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소녀다운 감성은 어디 가질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아가씨만큼은 아닙니다.”
체셔가 속에도 없는 것 같은 소릴 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유시엘은 징그러운 벌레를 본 표정이 되었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월광의 윤무는 새하얀 눈밭을 무대로 황홀하게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달빛을 받으며 경관을 감상 있는 유시엘은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요정 같은 모습이었다.
“…….”
체셔가 걸음을 멈추었다.
유시엘도 체셔가 걸음을 멈추자,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봤다.
“체셔?”
“예, 아가씨.”
체셔는 자신이 유시엘을 바라보다가 넋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이해하진 못했다.
‘모르겠군.’
체셔는 다시 걷기 시작하면서 유시엘의 태도가 변한 원인을 찾아보고자 생각에 잠겼다.
물론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앞서 가던 유시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산장까진 얼마나 남았지?”
“한 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체셔의 말처럼 한 시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언덕 위로 노란 불빛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산장에 도착하자, 체셔가 앞서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돌건의 산장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젊은이여.”
거실에 모여 있던 사내 몇이 체셔를 맞아 주다가 뒤따라 들어오던 유시엘을 보며 동시에 숨을 삼켰다.
“커헉!”
비명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체셔는 그 분위기를 깨듯 손뼉을 쳐 보였다.
“산장의 주인이 어느 분이신지요?”
한 사내가 입가의 침을 다급히 훔치면서 대답했다.
“그 양반은 사냥하러 갔소. 언제 올지 모르니 쉬고 있구려. 요기를 하려면 주방에 가서 대충 찾아서 들고.”
유시엘은 망설일 것 없다는 듯, 빈 방을 찾아 들어갔다. 체셔도 그 뒤를 따랐다.
식사보다는 휴식이 필요했다.
방은 두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두 사람이 자기엔 좁았지만 싫어도 체셔는 유시엘의 곁에 있어야 했다.
“몸을 닦고 싶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체셔는 타월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벽난로 앞에는 커다란 아궁이가 있었다.
그곳에는 눈을 퍼다 녹인 뜨거운 물이 가득했다.
이렇게 물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겨울, 아니, 눈이 가득한 지역의 특권이다.
유시엘이 몸을 닦는 동안 돌아앉아 있던 체셔는 옷 갈아입는 소리가 끝난 후에 고개를 돌렸다.
“바로 주무실 겁니까?”
“훗! 발 마사지나 한 번 더 해라.”
“예, 아가씨.”
유시엘은 마사지를 받는 도중에 잠들어 버렸지만, 체셔는 내일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 마사지를 했다.
높은 산을 오르며 무리했다.
내일이 되면 근육이 뭉쳐서 제대로 걷기도 힘들 거다. 그리고 유시엘이 잠들었을 때는 발뿐만 아니라, 다리도 마사지를 해서 충분히 근육을 풀어 줬다.
만약 누가 봤다면 체셔는 감정적인 것이 여러 부분에서 결여됐다고 여길 장면이리라.
마사지를 마친 체셔는 유시엘의 몸을 엎드리게 하고는 웃옷을 걷어 내 버렸다. 물론 생문에 남은 기를 쏟아붓기 위함이었다. 그 후엔 체셔도 선잠을 잤고, 새벽쯤에 깨어나서 또다시 유시엘의 생문에 기를 쏟아부었다.
날이 갈수록 생문에 모아 둔 독기가 거칠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기가 약해진 것 같았다.
“……큰일이군.”
동이 텄다.
유시엘은 당연히 늦잠이다.
체셔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듣고 선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는 중년 사내가 사냥용 덫을 손질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 또한 체셔를 보며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신가? 만일 내 이름을 묻는다면, 나는 알도.”
“반갑습니다, 알도. 지난밤에는 늦게 도착해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일행이 피곤한지 늦잠을 자네요. 조금만 더 신세를 지겠습니다.”
“얼마든지 있다 가게.”
산장이라고 공짜는 아니다. 오히려 여관보다 비싼 숙박료를 받는다.
체셔가 차를 얻어 마시고 있을 때, 유시엘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그녀를 힐끗 쳐다본 알도는 지난밤의 사내들과 마찬가지로 헛바람을 삼켰다.
“난생 이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 보는구려. 어떻소? 나의 비장의 차를 대접하고 싶소만.”
“좋지.”
체셔는 알도가 자신에게 차를 타 줄 때부터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감시했다.
즉, 그가 차를 타기 위해 했던 행동을 하나하나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중간에 유시엘이 등장하면 차를 권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으니까.
체셔는 알도가 차를 타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체내에서 기로 붙잡아 뒀던 차를 다시 컵에 뱉어 냈다.
의심을 지우기 위해 체셔의 차에는 독을 타지 않았다 쳐도 혹시나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했던 행동과 비교했다.
‘역시…….’
부디 아니길 바랐건만 유시엘의 차를 탈 때는 자신과 넣는 재료가 ‘하나’ 달랐다.
그는 비장의 차라고 했다.
좋은 의미로는 더 맛있는 차일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의 사정상 한 번쯤은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체셔는 유시엘과 눈을 마주치고는 한쪽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교도일 가능성이 있다는 신호다.
그리고 지금은 독을 이용한 상황.
이제 유시엘은 준비된 연극을 할 것이다.
“알도, 당신은 덫 사냥꾼입니까?”
“그렇소. 내 덫은 커다란 멧돼지도 잡아내지!”
알도가 호탕하게 웃으며 유시엘의 앞에 찻잔을 내려놨다. 그러자 체셔는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저도 사냥은 나름 자신 있습니다. 당장 한 마리 잡아 올 수도 있죠.”
체셔는 장난스런 기색으로 알도를 불렀다.
알도는 유시엘이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는 것을 힐끗 쳐다보고는 웃는 얼굴로 체셔에게 다가갔다.
“그렇소? 혹시 오면서 좌측에 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