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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티어즈 1권(23화)
4. ‘검’의 능력(5)
탱그랑!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갑자기 유시엘이 컵을 놓치며 푹 고꾸라졌다.
“아가씨?!”
체셔는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알도도 놀랐는지 다급히 유시엘에게 다가가려 했다.
“이, 이게…… 무슨?”
“잠깐만요!”
체셔가 알도의 앞을 막아섰다.
유시엘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물론 그 피는 이런 상황을 위해 미리 대비해서 항상 품에 넣고 다니던 빨간 물감을 담은 작은 가죽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체셔는 일부러 알도에게 등을 보이면서 유시엘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에잇!”
그 순간 알도가 체셔의 등에 단검을 내질렀다.
어차피 독살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전에 선공을 취한 것이다.
“꺼! 꺼어어억!!”
하지만 어느새 체셔의 검이 알도의 목을 쭉 그어 놨다. 반쯤 잘린 목에서 핏물이 벌컥벌컥 쏟아져 나왔다.
알도는 필사적으로 목을 움켜쥐며 물러섰다.
반대로 유시엘은 태연하게 몸을 일으키고는 손수건으로 물감이 묻은 입가를 우아하게 닦아 냈다.
“여기도 사교도가 있는 건가? 그 이후로 처음이군.”
“크르르륵…… 크륵!”
알도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부릅뜬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다가 결국 눈을 까뒤집고 말았다.
“일년전쟁이 끝나면 저흰 일류 배우가 되어 있겠군요.”
“불유쾌한 이야기다.”
체셔는 바로 짐을 챙겨 나왔다.
“어쩌면 지난밤부터 저희의 행적이 노출됐을지도 모릅니다. 한시라도 빨리 대수도원으로 가야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강한 적들과 마주치면 그때는 저도 힘듭니다.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유시엘과 체셔가 산장을 벗어나고, 약 한 시간 후.
알도가 죽어 있는 산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얀 위장복과 복면을 쓴 사내였다.
그리고 어깨에 새겨진 검은색 단도 문양!
바로 은영성의 베러세인이었다.
그는 이실리엔의 지령대로 엘반토르로 향하는 도중에 알도의 신호를 받고 다급히 달려왔다.
“과연…….”
그는 산장 입구의 발자국을 비롯해 여러 흔적을 살펴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슈우우우욱! 슈우우우!
갈색 연기의 신호탄 하나가 수직으로 쏘아졌다.
그리고 대각선 방향으로 빨간색 신호탄 하나가 더 쏘아졌다.
“대체 어디로 갈 생각이지?”
왼쪽은 엘반토르.
오른쪽은 사교권이다.
두 사람도 그것을 알 것이다.
여기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이대로 향한다면 로니어 캐니언밖에 없다.
어쩌면 유시엘은 들은 것과 다르게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 왈케르나 번드가 아닌 로니어 캐니언의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려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체셔는 지금까지와 달리, 조금씩 자주 유시엘의 생문에 기를 쏟아붓고는 반 시간씩 꼼짝 않고 기를 보충했다. 아무리 서둘러야 했어도 적을 만나면 싸울 수 있을 정도의 기력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반 시간 정도면 충분했지만 가면 갈수록 그것도 부족해졌다.
게다가 상황이 상황이다.
체셔는 평소 이상으로 기감을 퍼트려야 했고, 그것은 기의 소모를 더욱 부추겼다.
“벌써 따라붙었습니다. 적은 사교도가 아닙니다. 움직임이 마치 암살자 같아요.”
유시엘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체셔는 이미 데바요르라는 초일류의 암살자와 싸워서 이겼다.
물론 체셔는 그가 데바요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공격이 목적이 아니라 미행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군요.”
“처리할 수 있겠나?”
“상대는 암살자입니다. 혼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가씨의 곁을 떠나는 순간을 노릴지도 모릅니다.”
상대는 암살자라 보기에는 산악 지형에 익숙했다.
그리고 기감을 감지하는 능력과 차분한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는 체셔가 기감의 범위를 조절해서 유인하려 해도 결코 걸려들지 않았다.
그도 체셔가 유시엘을 두고 자신을 공격하러 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미행만 해도 성공이었으니까.
유시엘은 오랜만에 말고기 육포를 씹으며 얼굴을 구겼다.
지난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시간 됐습니다.”
해가 중천을 넘어갈 무렵이었다.
체셔는 이번에도 짬짬이 모았던 기를 유시엘의 생문에 쏟아부었다.
‘윽!’
기감을 계속 퍼트리고 있던 탓일까?
본의와 다르게 유시엘에게 쓰는 기의 양 조절을 제대로 못하고 말았다. 내쉬는 숨에서 피 냄새가 나나 싶더니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것이 치고 올라왔다.
체셔는 유시엘 앞에서 피를 뱉어 낼 수 없어서 괜찮은 척했지만 그녀의 눈빛이 걱정으로 채색되는 것만 봐도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적은 갑자기 멈춘 두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아볼 것이다.
그리고 체셔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나면 직접적인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지금처럼 상대가 미행을 고집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다른 동료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겠지만 체셔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적을 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더 있다.
만약 이런 상태로 로니어 캐니언까지 들어가면 꼼짝없이 고립되어 죽고 만다.
즉,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다.
“아가씨. 상대는 아직 한 명 같습니다. 하지만 장담은 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이대로 로니어 캐니언으로 가면 십중팔구 ‘Dead End’ 입니다.”
유시엘이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계속 방해가 되는구나.”
“방해가 아닙니다. 저는 ‘검’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유시엘은 불쾌하다는 얼굴로 체셔를 노려봤다.
“그런 대답은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논쟁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전에 아가씨께서 격리된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은 지금도 가능합니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가능하다.”
유시엘은 뱀파이어의 특성을 강하게 가지게 됨으로 소량의 마력을 얻었다.
하지만 정말 소량이었다.
작은 공간을 만들어서 은신하는 마법도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다.
“그럼 제가 신호하면 바로 그것을 만들어 모습을 감춰 주십시오. 몇 초의 시간만 벌면 됩니다.”
베러세인은 나무 그림자 속에 철저히 모습을 감추고는 유시엘과 체셔를 따라가고 있었다.
신호탄을 쐈으니 산 아래에 있던 동료들이 미리 길목을 점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조용히 미행만 하면서 특이한 상황이 발생하면 신호만 주다가 합류하면 된다.
보고 내용대로 유시엘의 ‘검’은 예상 이상이었다.
일대일이라면 승산이 없겠지만, 그는 유시엘이라는 핸디캡을 지니고 있어서 허튼짓을 하지 않았다.
베러세인은 미행을 하면서 유시엘과 ‘검’이 왜 돌건 산맥을 넘고 있는지 추측해 보았다.
처음에는 로니어 캐니언에 몸을 숨길 거라고 예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로니어 캐니언은 생존에 대한 지식만 있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부족한 것이 없다.
그렇다곤 해도 안전한 왈케르나 번드를 두고 일부러 이런 곳에 올 이유가 있을까?
심지어 양옆으로 적의 가장 큰 세력의 본거지가 있다. 그들도 ‘머리’가 있다면 그런 곳으론 결코 가려고 하진 않을 것이고, 반드시 로니어 캐니언으로 향한다.
로니어 캐니언을 지나면 여왕국의 북쪽이다.
위로는 드넓은 황무지와 할켄 왕국의 개척지가 있고, 그 서쪽 끝자락에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다.
무려 두 달 동안은 배를 타야지만 건너편 대륙에 도착할 수 있다.
도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유시엘도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미스린토 장로회의 이목을 속인다는 것은 만인의 눈을 속인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니어 캐니언을 지나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을 하나하나 체크해 봤다.
사실 있는 것이라고는 루메아 정교의 대수도원밖에 없다.
그 외에는 변방의 작은 영지 하나와 촌락뿐이다.
정교의 대수도원에도 그녀의 힘이나, 이득이 될 것은 없었다.
아니, 그들은 일년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짐작 가는 것이 없는 만큼 더욱 둘을 관찰해 봐야 했다.
암살자는 노련함과 개인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이 대상의 버릇과 행동 방식을 완벽히 읽어 내고 암살 임무를 시작한다.
버릇 하나에 생기는 ‘틈’을 노릴 수도 있고, 어떠한 행동을 했을 때에 일어나는 ‘반응’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암살자는 가장 큰 덕목으로 ‘인내’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때까지 상대의 모든 것을 알아낸다.
중간 중간에 ‘기회’가 생겨도 한 푼의 의구심으로 충동을 붙잡을 수 있는 인내와 절제가 필요하다.
비록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베러세인은 원래 암살자가 아니다.
‘베러세인’이라는 이름은 루비 사막을 거점으로 삼는 부족을 칭하는 말이었다.
과거의 그들은 무엇보다 냉정하고 잔인했다.
모래 속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자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데는 일말의 자비심이 없었을 정도다.
협박만으로도 충분히 빼앗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고집했다.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행위에 베러세인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본능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나 곤충과 같았다.
내 함정에 걸렸으니 죽이고 빼앗는다는 논리.
그런 그들이 암살자라는 이름을 달게 된 것은 ‘드래드 랜터’라는 베러세인의 족장이 처음으로 사막에 ‘살막’이라는 단체를 세우고 암살 의뢰를 받으면서부터였다.
베러세인은 다른 훈련을 받지 않아도 암살에 능했다. 부족의 생존 방식이 바로 암살이었다.
그런 식으로 살막의 이름이 알려지고, 차차 발전해서 표면적으로 ‘은영성’이라는 공포의 단체가 생겼다.
그사이에 세력이 나뉘는 불화가 있긴 했지만, 베러세인은 대외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베러세인이 미행을 한 지 네 시간 정도가 흘렀다.
둘은 쫓긴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몇 분 정도만 숨을 고르며 상당히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갔다.
‘또 멈췄군.’
검이 쉴 이유는 없다.
유시엘의 체력이 문제일 것이다.
베러세인은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적당히 긴장을 풀어놓았다.
‘검’은 동쪽의 신비로운 무술을 익힌다고 한다.
몸을 움직이는 신법도 기사나 병사들이 배우는 것들과 궤를 달리한다.
무엇보다 ‘기’를 다룸에 능숙하다.
만약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 거리는 숨 한 번 쉴 사이에 접근해서 공격할 수 있다.
은영성에도 동쪽의 무술을 익힌 자들은 윗선에 머물고 있다.
은영성의 ‘핵’이라 칭해지는 열 명의 간부들도 그런 무술을 익힌 쳐다보지도 못할 고수들이었다.
베러세인은 체셔의 기감 범위를 벗어난 채로 두 사람의 위치가 보이는 곳까지 이동했다.
예상이 틀렸다.
문제가 있는 것은 막내 유시엘이 아니라 ‘검’이다. 딱 보기에도 ‘검’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베러세인은 눈 속에서 숨을 죽인 채로 둘을 관찰했다. 명상을 하다가 눈을 뜬 ‘검’이 유시엘의 허리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하는 거지?’
베러세인이 좀 더 접근해 보기 위해 이동하려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이건…….’
어느새 늘어나 있는 ‘검’의 기감이 불안정하다.
마치 억지로 펼쳐 놓은 것처럼 떨리고 있는 모양새다.
게다가 ‘검’은 그 이유 모를 행위를 한 뒤에 다시 명상을 했다. 그러자 기감이 안정을 되찾았다.
베러세인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상황으로 답이 나온 것이다.
‘둘 다 문제가 있었군!’
이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그들의 목적지는 루메아 정교의 대수도원이다.
그곳에서 사제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삐―
그때 베러세인의 귓가에 자신들만 들을 수 있는 짧고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왔군.’
흔적을 보고 뒤따라온 동료들이 보내는 신호다.
삐― 삐―
작지만 날카롭다.
일반인은 가청의 범위를 넘어서 듣지 못할 소리다.
자! 아군이 늘었다.
미행만이 아니라 길목에 도착하기 전에 목표물의 목숨을 노려 볼 만도 하다.
베러세인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